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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장님임을 자각한다면

  • 법보시론
  • 입력 2020.01.13 10:11
  • 수정 2020.01.20 18:40
  • 호수 1520
  • 댓글 0

우리 사회의 갈등 양상이 여러 국면에서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거리에서는 거의 매일 서로 극단적으로 다른 이념과 지향을 강력한 형태로 표출하는 대중적인 집회가 열리고 있다. 만성 고질병처럼 계속적으로 심각한 증상을 보이고 있는 지역갈등 뿐만 아니라 계층 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 성별 간의 갈등 및 종교 간의 갈등 등의 크기와 깊이가 점점 커져서 심각하게 우려할 정도가 되었다. 왜 이러한 갈등은 생기는 것이며 심화되어 가는 것일까? 그것을 해소하거나 치유하는 길은 없는 것일까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본다.

‘열반경(涅槃經)’의 장님 코끼리 만지기 비유에는 여섯 장님이 각기 코끼리의 다른 부분을 만지고서 자신이 만진 부분만 가지고 코끼리를 판단하여 결론을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상아를 만진 장님은 무, 귀를 만진 장님은 키, 다리를 만진 장님은 절구공이, 등을 만진 장님은 침상, 배를 만진 장님은 장독, 꼬리를 만진 장님은 새끼줄과 같다고 하는 등 각기 다른 단정적 결론을 내리고, 자신이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다투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부처님은 이 장면을 보고서 장님들의 주장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전적으로 긍정하지도 않는다. 어떤 장님도 코끼리 전체에 대해서 제대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코끼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장님들이 말하는 것이 코끼리의 전체 모습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들이 말하는 부분적인 모습을 떠나서 달리 코끼리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장님은 우리들 인간 중에서 특별한 장애를 가진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닐것이다.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아무리 감각능력이나 이성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오류와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점에서 모든 사람의 인식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처럼 모든 인간이 오류의 가능성과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해서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알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것은 아니다. 장님들의 부분적인 인식이나 틀린 인식이라 할지라도 나름의 의미와 효용을 가질 수 있다. 여러 장님들의 다양한 주장들을 경청하고 들으면서 스스로 다른 사람이 만지고 있는 다른 측면 다른 사람이 보는 다른 관점과 입장에 서 보기를 거듭해 나간다면 자신의 오류를 수정하고 한계를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자신이 이미 깨친 사람이 아니라 아직 장님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다.

자신이 장님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은 다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것은 무지에서 비롯된 오만과 독선이다. 지독한 자기중심적 무지한 인식에서 다른 사람의 견해를 듣지 않고 틀린 것으로 배제하게 되어 다투고 싸우는 갈등이 생겨난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고 역설했다. 자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참다운 지식의 길이 열린다. 많이 공부하고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인정한다.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물리현상에 대해 연구하고 알아갈수록 모르는 것이 많아진다고 고백했다. 스티브잡스는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말고 계속 배우라(stay foolish)고 연설했다. 지적인 겸손 그것이야말로 참다운 지식으로 가는 출발점이자 내로남불의 사회적 갈등을 줄이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카가와 이사쿠의 ‘맹인의 무리’
나카가와 이사쿠의 ‘맹인의 무리’

일본의 화가 나카가와 이사쿠가 그린 ‘맹인의 무리’라는 그림이 있다. 맹인 다섯이 서로 의지하며 외나무다리를 건너가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다섯의 맹인들은 모두 자신들이 맹인임을 알고서 서로를 붙잡아 주고 서로 의지하면서 길을 간다. 각각의 맹인들은 각각의 위치와 능력에 따라 각각의 역할을 나누어 맡아서 수행하고 있다. 맨 마지막에는 등불을 높이 들고 있는 맹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맹인들에게 등불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마는 그 등불이 있음으로 해서 눈 뜬 사람이 마주 다가와서 부딪치지 않도록 하는 배려라고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장님임을 자각한다면 자신만의 존재나 관점 및 입장을 배타적인 방식으로 강하게 주장하는 ‘나 뿐인 사람’ 다시 말해서 ‘나쁜 놈’이 되지 않을 것이다. 자기주장의 톤을 낮춤으로써 자신을 독선에 빠뜨리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살리는 자리(自利)의 길을 열 수 있다. 또한 다른 사람의 관점과 입장을 이해하고 다른 견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이타(利他)의 길을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지적인 겸손의 태도와 자신이 한계를 가진 존재요 장님임을 자각하는 것으로부터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 및 관용이 싹트고 상호갈등이 아니라 상호 의지하고 협력하는 태도로의 전환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영근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yunjai@seoultech.ac.kr

[1520호 / 2020년 1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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