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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㊳신라 중고기의 왕실계보와 진종설화 ⑰

자장, 국가 위기에 계율 강화와 교단 정비 통해 불교 통한 사상 통일

당 태종의 여왕 퇴위론으로
비담의 난 등 내부분열 격화

‘속고승전’과 ‘삼국유사’에
자장에 의한 교단정비 기록

자장은 당에서 귀국한 이후
황룡사와 왕실 무대로 교화

국가 예속된 중대불교 비해
자율적인 교단 운영 길 열려

​​​​​​​불교계 숙정과 교단 정비로
신라불교 질적인 성장 이뤄

‘속고승전’ 자장전. 해인사팔만대장경 판본. 자장은 도선의 남산율종(南山律宗)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이러한 점이 도선이 ‘속고승전’에 자장을 입전(入傳)시킨 배경이었을 것이다.

신라 본국의 명령에 따라 자장이 급거 귀국한 선덕여왕 12년(643)은 내우외환의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 시기였다.

대내적으로는 진평왕대(579〜632)의 54년이라는 오랜 통치기간을 통하여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없어 딸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여왕(女王)’이라는 점에서 통치능력에 불신을 사게 되었다. 즉위 초기에는 종실의 대신 을제(乙祭)가 나라의 정치를 총괄하는 섭정을 담당하였고, 뒤이어 상대등 수품(水品)과 내성사신 용수(龍樹)가 국정과 궁중의 관리를 분담하였다. 그러나 여왕의 통치능력에 대한 불신은 해소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이 더욱 강화되는 외환이 겹치게 되자 여왕 퇴진론으로 발전하였다. 자장이 귀국하는 선덕여왕 12년에는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협공을 고발하고 당의 구원을 요청하러 간 신라의 사신에게 당의 태종이 여왕퇴위안을 제시하는 외교 문제로까지 부각되었다. 마침내 자장이 귀국한 4년 뒤에는 진골귀족을 대표하는 상대등 비담(毗曇) 등이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 하면서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르렀고, 여왕 자신이 그 반란 중에 세상을 떠나는 위기 상황을 맞게 되었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선덕여왕 11년(642) 연개소문이 집권하여 대외강경정책을 추진하게 되면서 신라에 대한 압력을 더욱 강화하였고, 백제에서는 1년 앞선 선덕여왕 10년(641)에 호전적인 의자왕이 즉위하여 신라에 대한 침공을 치열하게 감행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대외적으로 양대 강국의 협공을 받는 위급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자장이 귀국하기 1년 앞선 선덕여왕 11년(642)부터 의자왕은 신라에 대한 침공을 더욱 강화하여 7월에는 낙동강의 서쪽 40여 성을 빼앗았고, 8월에는 백제가 고구려와 공모하여 당항성(党項城)을 빼앗아 신라의 대당외교의 길을 차단하려 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백제는 신라의 서쪽 방어선의 요충인 대야성(大耶城)을 함락하고 김춘추의 사위인 도독 품석(品釋)을 죽였다. 이에 신라는 8월에 당나라에 급변을 알리는 사신을 파견하는 한편 김춘추는 직접 고구려에 가서 구원을 요청하는 모험을 감행하였다. 자장이 귀국하는 선덕여왕 12년(643) 정월과 9월에도 거듭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특히 9월에 파견된 사신에게 당 태종이 제시한 선덕여왕의 퇴위론은 신라왕실에 상당한 충격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 왕실과 귀족세력은 친여왕파와 반여왕파로의 분열이 격화되었고, 선덕여왕 말년(647) 마침내 상대등 비담 등에 의한 반란으로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고구려와 백제 양국의 침공을 받는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신라는 군사력을 재정비하여 대항하는 한편 대당외교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군사권을 장악한 김유신과 대당외교권을 장악한 김춘추가 중심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특히 반여왕파의 중심인물인 비담의 반란을 진압하고 진덕여왕을 즉위시키는 과정에서 주동적 역할을 한 김춘추・김유신의 연합세력이 정치・외교・군사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자장의 귀국은 이와 같은 3국 사이의 긴박한 대외정세의 변화와 신라 귀족세력의 분열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 속에서 선덕여왕의 귀국령에 따라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귀국 뒤의 자장의 활동은 바로 이러한 국가적 위기 상황의 타개라는 시대적 과제를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는 문제이다. 국내에서의 자장의 활동은 계율과 교단의 정비, 중국 문물제도의 수입, 황룡사9층탑의 조성과 왕권의 신성화 등 다양하게 전개되었는데, 역시 중심적인 것은 계율의 강화와 교단체제의 정비 문제이다. 당시 자장에 의해 단행된 교단의 정비에 대해서는 ‘속고승전’ 자장전과 ‘삼국유사’ 자장정률조에서 구체적인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먼저 ‘속고승전’ 자장전의 해당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자장이) 고향 땅에 다다르자 모든 국민이 나와 맞이하였다. 일대의 불법이 여기에서 흥성하게 나타났다. 왕은 자장이 대국(당)에서 존경받았고, 올바른 가르침을 지녔으므로 그의 강리(綱理)가 아니면 불교계를 맑고 깨끗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자장을 대국통(大國統)으로 삼고 왕분사(王芬寺, 芬皇寺)에 머물게 하였다. 이 절은 바로 왕이 조성한 곳이었다. 또 별도로 정원(靜院)을 세우고 특별히 10명을 출가시켜 항상 자장을 시중들게 하였다. 또 궁중에 들어와 여름 동안 ‘섭대승론’을 강의해 줄 것을 청하였다. 만년에는 황룡사에서 ‘보살계본’을 강의하였는데, 7일 낮 7일 밤 동안 하늘에서 감로가 내렸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이 강당을 덮었다. 사부대중이 일어나 감탄하고 명성이 더욱 멀리 퍼졌다. 법석을 마치는 날이 되자, 자장에게 계를 받은 자들이 구름 같이 많았다. 이를 계기로 변화하고 분발하는 이들이 열 집에 아홉이었다. 자장은 이렇게 불교가 번창하는 때를 만나 더욱 용맹하게 되었고, 원래부터 소유하고 있던 의복과 재산을 모두 보시에 사용하였다. 오직 두타행을 일삼았고, 난야에서 업을 익혔다.  참으로 해동에 불법이 전해진 지 100년이 되었지만, 주지하고 수봉함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그리하여 여러 재상들과 함께 기강을 바로 잡을 방법을 상세히 의론하였다. 이때 왕과 신하 및 위아래의 의견이 모두 모이기를, 일체 불법에는 반드시 규율이 있는 법이니 모두 승통에게 맡긴다는 것이었다. 자장은 승니 오부(五部)에게 각각 예로부터 익히던 것을 더욱 힘쓰게 하고, 다시 강관(綱管)을 두어 감찰하고 유지하게 하였다. 보름마다 계를 설하고 율에 따라 참회하여 (악업을) 제거하게 하였다. 봄과 겨울에 전체 시험을 쳐서 계율을 지키고 어기는 것을 알게 하였다. 또 순사(巡使)를 두어 여러 절을 두루 돌아다니며 경계하고 장려하여 설법하게 하였다. 불상을 장엄하게 꾸미는 등의 여러 일을 관리하는 것을 정비하여 일정하게 하였다. 이러한 업적에 의거하여 말한다면 호법보살(護法菩薩)이란 바로 이러한 사람일 것이다.”

위 인용문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부분은 귀국한 뒤 선덕여왕이 세운 분황사, 그리고 황룡사와 왕궁을 무대로 하여 ‘섭대승론’과 ‘보살계본’ 등의 경론을 강의하고 계를 주는 등의 홍법 활동을 통하여 계를 받는 자들이 열 집에 아홉이라고 할 정도의 교화의 업적이 컸음을 서술한 내용이다. 자장의 교화활동은 신라불교를 크게 진흥시켜 이른바 ‘중고불교’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교화대상은 왕실이나 귀족사회에 국한되었고, 일반 서민들이 포교의 대상으로 부각되는 것은 원효에 의한 대중불교화운동을 기다려야 했다. 다음 둘째 부분은 자장의 교단정비에 관한 내용인데, 자장의 불교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자장은 전체 불교교단을 사미(沙彌)・사미니(沙彌尼)・정학녀(正學女)・비구(比丘)・비구니(比丘尼)의 승니(僧尼) 5부로 조직한 다음 교단을 감찰하는 기구로 강관(綱管)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이 강관은 교단을 통제하는 기능을 실제로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종래의 승정기구보다 발전된 형태였지만, 또한 모든 권한이 자장에게 위임되었다는 점에서 불교교단이 국가권력에 강력하게 예속되어 관리된 ‘중대불교’보다는 자율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왕과 신하 및 위아래의 의견을 모아 교단의 규율을 일체 승통인 자장에게 위임하기로 결정한 것이었기 때문에 교단의 자율성이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외적의 침입과 귀족세력의 분열이라는 국가적 위기상황 속에서 불교교단을 중심으로 한 사상통일이 시급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안돼 김춘추 일파가 집권한 진덕여왕 원년(647) 대도유나(大都唯那) 1인과 대서성(大書省) 1인의 승관직이 각각 증치된 사실은 교단통제의 전권을 위임받은 자장의 위상과 역할에 어떤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한편 자장은 교단 정비의 전제로써 계율을 강조하여 15일마다 계를 설하고 율에 의거하여 참회하게 하였다. 그리고 봄과 겨울에는 시험을 치루어 계율을 제대로 지켰는지의 여부를 알게 하였다. 또한 순사(巡使)를 두어 지방사찰에 대한 감독도 강화하였다. 일찍이 법흥왕대(514〜540) 율령반포와 불교공인이 이루어지고, 진흥왕대(540〜576)와 진평왕대(579〜632) 국가발전과 불교교단의 비약적인 성장을 보았다. 이러한 발전과정에서 승려의 역할은 단순히 불교의 종교적 문제에 그치지 않고 중국의 선진 문물제도를 수입하는 선각자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때로는 외교문서 작성과 정치적 자문의 역할을 통하여 정치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따라서 진흥왕 11년(550) 안장(安藏)을 대서성(大書省)에 임명하고 이듬해 고구려에서 망명해온 혜량(惠亮)을 국통(國統), 보량(寶良)을 대도유나(大都唯那)에 임명한 것은 불교에 대한 통제보다는 승려 우대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조치였다. 그러나 그 뒤 비약적인 국가의 발전과 교단의 확대는 교단의 숙정과 국가적 통제의 필요성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바로 그러한 숙정과 통제의 역할을 국가로부터 위임받은 인물이 비상설직 승관인 대국통에 취임한 자장이었고, 자장은 그에 부응하여 불교교단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크게 발전시키고 개편시켰던 것이다.

자장이 불교계를 숙정하고 교단체제를 정비하는 개혁을 추진할 때의 중심 사찰은 황룡사(皇龍寺)였다. 황룡사는 진흥왕대 창건된 이래 ‘중고불교’의 중심사찰이자, 국가불교의 상징 사찰로서의 역할을 강화시켜 왔다. 황룡사의 사주(寺主)가 교단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높아져서 선덕왕대에는 사주가 동시에 국통을 겸직하였다. 자장은 대국통이면서 동시에 제2대 사주였으며, 제3대 사주인 혜훈(惠訓) 역시 국통이었다. 자장은 황룡사 경영의 모델을 수의 문제(文帝)의 불교치국책의 중심사찰이었던 장안의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찾았던 것으로 보이며, 중국 유학 중 도선(道宣)과의 교류가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본다. 자장은 교단의 숙정과 계율의 진흥, 황룡사의 운영에 있어서 도선의 남산율종(南山律宗)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말년의 자장이 보여준 열렬한 문수신앙도 도선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본다. 자장의 이러한 불교 활동과 업적이 도선으로 하여금 생존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속고승전’에 입전(入傳)시키고, 호법보살로서 칭송하게 하였던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20호 / 2020년 1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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