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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난타 고향이 간다라라 할 근거는 없다”

  • 기고
  • 입력 2020.01.28 09:22
  • 수정 2020.01.28 10:58
  • 호수 1522
  • 댓글 4

이주형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천축 일부에 불과한 간다라를 천축과 동일시하는 것은 오류
해동고승전의 ‘축건’은 인도일 뿐 간다라라는 의미는 안 담겨
“4세기 중국에 온 인도승려 대부분 간다라 출신”도 추측 불과

간다라 북쪽에 위치한 스와트 지역(고대의 오장국)의 불탑.

이주형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가 12월10일 법보신문 기고를 통해 백제에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 스님이 간다라 출신이라고 확정지을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 가운데 영광 불갑사 주지 만당 스님은 1월8일 법보신문에 보내온 반론문을 통해 마라난타 스님이 간다라 출신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반박했다. 이에 이주형 교수가 1월20일 만당 스님 주장을 반박하는 기고문을 보내왔다. 편집자

 

우선 필자의 기고에 대한 만당 스님의 반론 기고에 잘못된 점이 있어서 그 점부터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만당 스님은 필자가 간다라가 천축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처럼 잘못 이해하여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쓰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첫 기고문을 보면 피터 리가 ‘해동고승전’에 나오는 ‘축건(竺乾)’이라는 말을 ‘India or Gandhara’라 잘못 번역한 것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은 구절을 괄호 안에 넣은 것이 보일 것이다. “이 번역자는 간다라가 고대 인도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피터 리가 간다라가 인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잘 알지 못하여 “인도 또는 간다라”라 선택적 병치를 한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구법승들이 이야기하던 고대 인도의 경계선은 대체로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잘랄라바드 분지와 카불 분지 사이에 있었으며, 페샤와르 분지를 중심으로 하는 간다라는 고대 인도의 오천축국 가운데 북천축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상식에 가까운 것인데 이 지역에 정통한 전문가인 필자가 마치 이 사실을 몰랐던 것처럼 아마도 본의 아니게 독자들을 오도한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간다라는 분명히 천축의 일부이다. 문제는 과연 천축의 한 부분에 불과한 간다라가 천축과 동일시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만당 스님도 중국 문헌에서 ‘축건’이 ‘천축’을 뜻하는 용어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반박하기 어려움을 일부 인정하는 듯하다. 이것은 연구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번역상의 실수를 하고 그것을 다른 연구자들이 계속 반복해 온 것이라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당 스님으로서는 권위 있다고 하는 번역의 서술을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스님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만당 스님은 어차피 간다라가 천축의 일부이므로 천축 출신이라는 말이 간다라 출신이라는 말도 될 수 있지 않느냐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두 가지는 엄연히 다르다.

예를 하나 들어 본다. ‘US’라는 말을 우리는 누구나 ‘United States’의 약자이고 미국을 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Utah State’(유타주)라고 이해하여 번역했다고 하자. 미국 출신이라는 것이 유타주 출신이라는 것과 같은 것인가? 미국 출신이라고 해도 유타주 출신인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US 출신’이라는 문장을 가지고 유타주 출신일 수도 있지 않냐는 주장을 펼 수는 없다. 그 사람은 미국의 51개 주 중 어느 주 출신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의 상황은 마치 천 년 뒤에 지금은 누구나 아는 ‘US’라는 말의 뜻이 잊혀져 ‘US’를 ‘Utah State’라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US’는 미국이라는 뜻일 뿐이다.

필자가 지적한 것은 마라난타의 고향이 간다라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라난타의 고향이 간다라라는 말도 아니다.) 마라난타의 고향을 간다라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동안 마라난타의 간다라 출신설의 근거로 제시된 ‘해동고승전’의 ‘축건’이라는 말은 인도라는 뜻일 뿐이고 그 말에는 간다라라는 뜻이 없다. 그래서 그 말을 근거로 간다라 출신설을 펼 수 없고 결국 간다라 출신설은 확실한 근거가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출신이라고 해서 간다라 출신일 수도 있지 않냐고 주장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마나 한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그럴 수도 있지 않냐는 이야기를 사석에서 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공식적으로 거론하며 공식적인 일에 사용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또 만당스님은 ‘축건’이 ‘천축’이라는 뜻이라 할지라도 '천축의 간다라'라는 뜻으로 쓸 수도 있지 않았겠냐는 주장을 편다. 우리는 어떤 단어를 사용하며 여러 의미를 담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명시적 의미와 함축적 의미이다. ‘꽃’을 보며 환희를 느낄 수도 있고 덧없음을 느낄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함축적 의미로 다르게 읽을 뿐이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말에 여러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명시적 의미로 ‘꽃’은 어디까지나 꽃일 뿐이다. 하물며 어느 시대에 어느 지역을 적시하는 하나의 지명을 두 가지 이상의 명시적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분명히 ‘인도’라는 뜻으로 중국에서 통용된 ‘축건’이라는 말이 지금부터 천년쯤 전에 중국과 한국에서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될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이다. 뜻이 모호한 말이라면 모를까 교양 있는 지식인들 사이에 과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축건’이라는 말은 중국에서 적어도 4세기경부터 쓰이고 있었다. 중국 문헌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맥락은 도교 경전으로 알려진 ‘노자서승경’에서 노자가 서쪽으로 가서 축건에서 고선생(古先生, 노스승)에게 도를 들었다(聞道)는 구절을 불교 문헌에서 인용하거나 거론하는 것이다. 여기서 고선생은 부처님을 가리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런데 도교에서 노자가 인도로 가서 부처가 되어 불교를 열었다고 주장했던 것을 상기하면 불교 문헌의 이 서술은 도교의 통설과 다르다 할 수 있다. 그래서 불교 문헌에 인용된 ‘노자서승경’은 처음에는 도교도의 것이 아니라 불교도들이 쓴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현행 도교의 ‘노자서승경’에서는 “노자가 서쪽으로 가서 축건에서 도를 열었다(開道)”고 되어 있는데, 도교도들이 뒤에 이렇게 바꾸었다는 것이다. 당대에 이르기까지 불교 문헌에 등장하는 ‘축건’은 대다수가 ‘노자서승경’의 ‘축건 고선생’에 대한 언급과 관련된 것이다. 4세기에 동진의 지둔(支遁) 스님이 이 말을 석가모니불상에 대한 찬문에서 쓰고 있는데, 그것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축건 교화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노자서승경’의 맥락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의 도교와 관련된 맥락 때문인지 불교도들은 주로 ‘천축’이라는 말을 썼고, 645년에 현장이 인도에서 돌아온 뒤에는 ‘인도’라는 말도 함께 통용되었다.

당대까지는 불교도들이 쓰기를 꺼리지 않았나 싶은 ‘축건’이라는 말이 송대부터는 사용이 상대적으로 빈번해지고 그런 흐름이 청대까지 이어졌다. 송대에는 ‘축건’이 ‘인도’를 뜻하는 말로 스님들을 비롯한 지식인들 사이에 잘 알려져 하나의 상식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덕전등록’에는 “보리달마가 멀리 축건에서 와서 정법안장을 우리에게 보였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그 뒤에 여러 선불교 문헌에도 인용되었다.

각훈은 아마 자신의 시대에 인접한 송대 문헌, 또 송대에 유행한 문헌을 통해 이 말을 알게 되고 쓰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각훈이 ‘천축’을 뜻함이 명백한 ‘축건’이라는 말을 ‘천축의 간다라’라는 말로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쓸 수 있었을까? 각훈같이 불교 문헌에 대해 상당한 식견을 갖고 있던 사람이 무지함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그런 일을 했을까? 각훈의 ‘해동고승전’이 역사서로서 세부 서술에 있어 얼마나 신뢰할 만한지는 의문이 없지 않으나, 각훈은 자신의 문장과 식견에 자부심을 갖고 있던 사람이다. 각훈이 중국의 불교도들과 다른 뜻으로 그 말을 썼을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각훈은 우리도 글을 쓸 때 그렇게 하듯이 문장에 변화를 주기 위해 인도를 뜻하는 말로 ‘축건’을 썼고 그 밖에 ‘천축’ ‘인도’ ‘서건(서쪽의 건축, 즉 천축)’을 혼용하고 있다.

‘해동고승전’에서 각훈은 최치원의 ‘난랑비서’를 인용하는데 여기에 “모든 악은 행하지 말고 모든 선은 행하라는 것은 축건태자의 교화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諸惡莫作 衆善奉行”은 일찍이 중국에서 초기에 번역된 경전인 ‘법구경’ 등에 나오는 “諸惡莫作 諸善奉行 自淨其義 是諸佛敎”(모든 악은 행하지 말고 모든 선은 행하며 스스로 그 뜻을 맑게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말씀이다)라는 유명한 구절의 한 부분이다. 최치원이 이 말을 인용하며 쓴 “축건태자”라는 말은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을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최치원이 굳이 ‘축건’이라는 말을 쓴 것은 그가 ‘난랑비서’에서 유불선 삼교를 거론하면서 ‘노자서승경’에 나오는 ‘축건 고선생’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난랑비서’ 같은 글에서 굳이 ‘본생담’에 나오는 보시태자 이야기 같은 것을 불러올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것은 궁색한 억측에 불과하다.

만당 스님은 4세기쯤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승려들은 대부분 간다라 출신이 아니겠냐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능성에 대한 추측에 불과하다. ‘인도 출신’이라고 하는데 간다라 이외의 지역을 배제할 수 있는 근거는 희박하다. 만당 스님은 상상도 못하냐고 하지만, 추측이나 상상은 할 수 있어도 공적인 역사적 사실로 내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축건’의 ‘건(乾)’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인상을 주건 간에 간다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축건’의 ‘건’이 간다라라는 착시를 준 것도 이해는 간다. 필자는 20대에 간다라에 관해 처음 공부할 때 ‘예불문’에 나오는 ‘서건(西乾)’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마치 ‘서쪽의 간다라’와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실은 ‘축건’보다 ‘서건’이라는 말이 더 ‘서쪽의 간다라’라는 느낌을 준다. ‘축건’을 ‘천축의 간다라’라 하는 것은 조어상으로도 어색하지만, ‘서건’을 ‘서쪽의 간다라’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서건’을 ‘서쪽의 간다라’라 받아들이지 않고, 그 말 때문에 간다라를 우리 불교의 원류로 여기지도 않는다.

만당 스님이 지난 20년간 마라난타와 관련하여 펼쳐 오신 일이 많은 줄 안다. 만당 스님의 신심과 원력에 대해 필자는 미력한 불자로서 경탄과 존경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도, 그것을 흔쾌히 수용할 수 있는 것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이라 믿는다.

이주형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마라난타의 간다라 출신설의 문제에 대해서는 필자가 지난 연말에 출간된 ‘중앙아시아연구’ 24-2호에 상세한 논고를 발표했으니 그것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 논문을 보면 지난 20년간 우리 불교계가 휘둘린 마라난타의 간다라 출신설-‘축건’은 ‘해동고승전’의 번역상 실수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피하기 어려웠다 하더라도 파키스탄의 초타라호르가 마라난타의 고향으로 확인되었다는 주장-의 실체가 얼마나 황당한 것이었는지 여실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522호 / 2020년 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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