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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국 고대 사리친견 의식에 보이는 사리관

“불사리는 시공 떠나 부처님 뵙는 감동 전달”

불사리는 생전 석가모니 부처님과 다름없는 성물로 간주
7세기 수당시대로 내려오며 사리신앙은 더욱 유행하게 돼
왕과 신하 사리 엄격히 관리하다 50~100년 후 꺼내 친견

중국 법문사 사리탑.
중국 법문사 사리탑.

인도에서 출발한 불교는 1세기에 중국, 4세기에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불사리는 생전의 석가모니와 다름없다는 사리신앙은 불탑의 건립을 유행시켰고 나아가 불교의 전파에 큰 동력이 되었다. 사리관(舍利觀)도 확대 변화되어, 처음에는 석가모니의 사리만 예경의 대상이었으나 나중에는 고승들의 사리 역시 그 가르침을 이어받으려는 제자들에 의해 존숭되었다. 그래서 석가모니의 사리를 특별히 ‘진신사리’ 또는 ‘불사리’라고 하여 승려의 사리와는 구분해 부르기도 했다.

문헌으로 보면 우리나라 사리신앙은 4~5세기 무렵 뿌리를 내린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의 사리는 대부분 중국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전래 형태는 중국의 공식 사절을 통하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스님들이 중국에서 공부한 뒤 돌아올 때 불사리를 가져오는 형식이 가장 많았다. 중국은 1세기 후한(後漢)시대에 경전과 불상 등을 가져온 인도 불교사절단에 의해 불교를 처음 접한 이래 사리신앙이 급격히 발전하였다. 한중 양국의 고대 사리신앙 모두 외국에 의해 촉발되고 발전되었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한 점이 많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사리신앙의 여러 모습을 보기에 앞서 중국 사리신앙의 자취와 흐름을 먼저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사리는 대부분 탑 안에 봉안하기 때문에 탑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탑을 세운 과정을 잘 살피면 곧 사리봉안의 역사도 알 수 있다. 그런데 불교사나 미술사에서 탑을 말할 때면 주로 탑의 양식만을 연구대상으로 할뿐, 탑의 제작 동기이자 핵심이랄 수 있는 사리봉안의 과정과 의미는 거의 하지 않아 아쉽다. 사리신앙과 탑의 조성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어서 서로 떼어놓고 말해서는 그 완전한 의미를 알기 어렵다. 그에 비해서 중국에는 탑과 사리봉안 과정이 함께 언급된 예가 많아 탑의 건립 역사를 통해 사리신앙을 이해하는 게 가능하다.

중국은 인도로부터 불교를 소개받은 68년에 백마사(白馬寺)를 짓고 석가여래사리탑을 세우면서 사리신앙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188~193년 사이 쉬저우(徐州)에 부도사(浮圖祠, 祠는 寺와 비슷한 개념)가 세워졌는데 그 이름에 특히 눈길이 간다. 부도는 고승의 사리를 봉안한 묘탑의 뜻으로 주로 사용하지만 옛날 중국에서는 탑의 다른 명칭이기도 했다. 불사리 봉안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이름까지 ‘불사리를 봉안한 절’이라고 하였으니 사리신앙이 대중에게 얼마만큼 중요하게 다가갔던가를 알 수 있다. 4세기에 접어들어 북위(北魏)에서는 7~9층의 고탑이 유행했다. 뤄양(洛陽)의 영녕사(永寧寺) 9층탑은 높이가 무려 134~147미터로 추정될 정도로 거대했다. 탑이 커지고 화려해진 것은 그만큼 불사리신앙이 확대되었다는 뜻이다. 북위와 육조시대는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과 같은 시대로, 지금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삼국시대의 사리신앙과 사리장엄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이후 7세기 수당(隋唐)시대로 내려오면서 사리신앙이 더욱 유행했다. 법을 찾아 나선 스님들은 진신사리 친견을 위해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서라도 인도의 사리탑까지 찾아가 예경을 올리곤 했다(의정(義淨),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 불교도들에게도 국내에서 열리는 사리친견 행사 참여가 최대의 소망이었다는 기록도 적잖게 보인다. 중국에서 특히 사리친견 행사가 많이 열렸던 것은 중국 탑의 독특한 형식과도 관련이 있다. 전탑과 목탑 위주인 중국 탑은 우리나라처럼 불사리를 봉안하는 자리를 탑 아래에 지하시설을 만들어 그곳에 두었다. 봉안한 후 문을 달고 밀봉해 놓았다가 나중에 언제든 문만 열면 다시 꺼내볼 수 있는 구조다. 물론 이 사리시설은 평소에는 엄격히 관리된다. 그러다가 50년 또는 100년 후에 문을 열고 사리를 꺼내 왕과 신하 그리고 백성들이 친견한 다음 재봉안하는 행사가 큰 유행을 이뤘다. 예컨대 시안(西安)의 법문사(法門寺)에서는 수나라 이래로 몇 백 년에 걸쳐 불사리를 꺼냈다 다시 봉안하는 이런 친견행사가 여러 차례 이뤄졌고 그때마다 왕과 신하, 스님들과 불교도들 모두 열광적으로 참여하곤 했다.

이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사리감응기(舍利感應記)’로, 불경을 번역하기도 했던 수나라의 저명한 학자 왕소(王邵)가 황제의 명을 받아 인수사리탑(仁壽舍利塔)을 세우며 사리를 봉안하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한 글이다.

“사리를 석함에 넣었다. 스님들이 사리병을 높이 쳐들어 주위에 에워싼 대중들에게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눈을 비비고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사리에서 광명이 비추었다. 사람들은 탑 안으로 들어가는 사리를 보고 감격해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마치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는 듯했다.”

열광의 사리친견이 비단 인수사리탑에서만 있었던 건 아니다. 왕소는 ‘사리감응기’에 전국 각지에서 열렸던 사리친견 행사도 적어놓았다. “정오에 사리를 지하에 넣으려 하자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여 어찌할 줄 몰랐다.”(안주), “4월 8일에 사리를 땅속에 넣으려하자 사리탑 옆 오동나무 가지와 잎이 일제히 사리가 묻히는 쪽을 향하여 숙였다.”(낙양), “4월 8일 정오에 사리를 땅 속에 넣었다. 승속이 모두 구슬프게 울었다”(섬서성 섬주) 등등 전국 각지의 사리 봉안, 친견 행사의 분위기는 “사리를 안치하는 곳은 무릇 어느 곳이나 이와 같았다”고 한다. 사리봉안 행사에 나온 사람들이 이미 1000여년 전 열반한 석가모니의 사리를 묻으면서 마치 바로 엊그제까지 뵈었던 스승을 떠나보내는 듯이 슬퍼하는 광경이 인상적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니 불사리는 시공을 떠나 지금 당장 석가모니를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해주는 특별한 힘이 있는 것 같다.

사리신앙은 가람구성, 곧 사찰 전각의 배치 형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불상이 봉안된 전각 바로 앞에 우뚝한 불탑을 둔 것은 절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전각보다 불탑이 먼저 시선에 들어오도록 하려는 배치였다. 그만큼 불사리에 대한 믿음이 강렬했던 것이다. 북위 사람 양현지(楊衒之)가 ‘낙양가람기’에서 “이슬비 내리는 서울, 사백여든 곳 절마다 목탑은 우뚝하여라”라고 노래한 구절에도 불사리와 탑을 의미 있게 바라보았던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 배어있다.

신대현 능인대학원대학 불교학과 교수 buam0915@hanmail.net

 

[1522호 / 2020년 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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