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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의 지혜 담은 선율 -슈베르트의 즉흥곡

기자명 김준희

독보적인 즉흥곡서 최상의 지혜 향한 수행 연상

전통적 음악 형식 존중힌 피아노 소나타 20여곡 남겼지만 
샘솟는 음악적 영감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은 즉흥곡에 담겨
8개 즉흥곡 모두 1827년 죽기 전 1년간 집중적으로 탄생돼

해인사 팔만대장경 가운데 '반야바라밀다심경' 경판.

프란츠 슈베르트의 작품은 물 흐르듯 한 선율로 가득 차 있다. 다양한 기악 작품, 특히 피아노 독주곡에서는 그 어떤 작곡가도 가지지 못한 길고 유려한 선율의 서정성을 느낄 수 있다. 대부분의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들은 루드비히 반 베토벤의 서른 두 개의 피아노 소나타 이후, 더 이상의 소나타 장르에서 형식적 변화를 꾀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소나타 이외의 작품들을 많이 썼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여느 작곡가들과는 달리 완벽한 틀을 갖춘 장르인 소나타를 두고 형식이나 구조에 관해서 혁신보다는 전통에 대한 예의를 표했고 피아노 소나타를 20여곡이나 남겼다.

그는 소나타라는 일정한 형식 안에서 규모를 축소시키거나 확장시키면서 음악적 변화를 추구했다. 특히 후기 소나타에서는 주제군(theme group)으로 더 많은 선율들을 펼쳐나가며 화성적 색채를 보여주었다. 고전 형식 위에 낭만성을 얹은 것이다. 또한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와 요제프 하이든의 소나타에서 볼 수 있는 휴지부(pause)를 두어 극적 긴장감을 더했다. 바로크시대와 고전시대 초기의 작품에서 나타난 요소들을 위화감 없이 녹여낸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 형식을 놓지 않았던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의 음악적 깊이와는 별개로 형식과 내용은 조화롭지 못했다. 슈베르트의 끊임없이 샘솟는 악상을 일정한 틀에 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오히려 슈베르트는 의외의 장르에서 그의 음악적 영감을 가장 수월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떠오르는 악상들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즉흥곡’이야말로 슈베르트의 진정한 음악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장르였다. 

슈베르트 이전에도 즉흥곡은 존재했지만, 슈베르트의 작품은 독보적인 예술성을 갖춘 최초의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슈베르트는 모두 여덟 개의 즉흥곡을 남겼다. 모두 1827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한해 전 작곡되었다. 그 중 Op.90의 네 곡은 특별히 우리에게 친숙하다. Op.90의 구조와 내용은 세상을 떠나기 전 병마로 싸우는 유약한 서른 살의 청년의 삶과 음악으로 그것을 극복해 내는 모습이 ‘반야심경’을 떠올리게 한다.

슈베르트의 초상화(1875년, Rieder).

첫 곡 C단조는 네 곡 중 가장 변화무쌍하며 가장 극적인 작품이다. G음 유니즌의 긴 여운 뒤 다소 애처로운 선율로 시작하는 이곡은 곧 같은 선율이 화음의 옷을 입고 두터워진다. 비장함 내지는 절실함을 화성으로 채워 넣는 느낌이다. C단조에서 Ab장조를 거쳐 다양한 전조를 보여주는 최초의 선율은 두 번째 새로운 선율로 해결감을 준다. 그러나 그 해결감은 반주부의 채워진 리듬과 변화를 지닌 첫 번째 선율의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전환된다. 그리고 곧 슈베르트의 마지막 소나타 D.960의 마지막 악장을 예견하는 것 같은 악상들이 펼쳐진다. 마치 ‘반야심경’의 서두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일체법이 공(空)이며, 그것을 체득하는 경지’,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그 과정을 표현한 듯하다. 최상의 지혜를 위해 수행하는 과정으로도 느껴진다. 

Op.90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사랑받는 곡인 두 번째 Eb장조는 그 어떤 설명으로도 충분하지 않는 작품이다. 셋잇단음표만으로 이루어진 선율은 특정한 모양은 없으나 그 진행 방향의 변화만으로도 훌륭하다. 방향성으로만 이루어진 이 선율은 슈베르트 특유의 샘솟는 듯한 악상의 자연스러움 그 자체이다. 분명 선율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직접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모호하지도 않다. 셋잇단음표로 물 흘러가듯 흐르는 아름다운 선율 중간의 수직적인 단조의 선율도 과하지 않다. 이 유명한 작품을 묘사하거나 설명하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다. 단순히 ‘낭만주의 시대의 서정성 넘치는 작품’ 이라고 규정짓기도 어렵다.

가장 정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세 번째 곡 Gb장조는 듣는 이로 하여금 풍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며 감상하기에도 편안하다. 그러나 연주자의 관점에서 내림표가 여섯 개나 붙은 Gb장조의 조성과 한 마디의 두 개의 박자표를 가진 이 곡은 간단하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검은 건반에서 고요하게 표현해 내야 하는 긴 호흡의 오른손 주선율, 드러나 있지는 않으나 숨어있기만 해서는 안 되는 오른손 내성부,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적은 왼손의 5도 중심의 화음. 피아니스트에게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이 두 곡의 주된 선율은 명확하게 구분 지어지기보다는 경계가 모호한 편이다. 음악적으로 크게 긴장의 고조와 해결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듣는 이는 오히려 일정한 형식과 틀 안에서 논리적으로 구현된 음악보다 쉽게 감상하고 즐길 수 있다. 형식과 내용, 그 구조에서 가장 자유로운 이 두 곡이 듣는 사람들에게는 친숙함과 더불어 더 큰 감동을 가져 온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듯한 선율 속에 내재된 화성의 긴장감과 해결감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즉흥곡 Op.90의 제 2번과 제 3번은 마치 ‘반야심경’의 주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만 같다. 이 두 곡에서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을 떠올린다면 과장일까.  

슈베르트의 생가에 보존된 피아노.

내성적인 성격의 슈베르트는 작곡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대우받지 못하는 음악가였다. 음악가들이 인정받았던 낭만주의 시대에는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일기에서 “인생은 둥근 공과 같은 것으로 기회와 정열이 모두 갖추어지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삶은 무대와 같고 사람은 그 무대에서 역할을 맡는다. 칭찬이나 비난은 다른 세계에서 온다”고 고뇌한 흔적을 남겼다. 주로 평온한 아름다움을 음악으로 표현했던 슈베르트는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함께 타인의 평가에서 분리된 자신만의 내면화된 모습을 갈구하고 있었다.

Op.90의 Ab장조는 끝을 장식하는 곡답게 슈베르트의 내재적인 격렬한 낭만성이 정제된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곡의 전반부는 두 마디의 하강하는 선율의 반복과 두 마디 코드의 반복으로 시작된다. 더욱이 Ab장조의 조성은 30번째 마디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여섯 마디로 구성된 주제선율이 네 번이나 낯선 조성으로 반복된 후에야 진정한 시작과도 같은 원조성이 등장하는 것이다. 소나타와 같은 일정한 형식과 구조 안에서는 허용되기 어려운 상당히 새롭고 진취적인 형태이다. 

앞선 세 곡의 중간 부분과는 다른 전혀 상반된 분위기의 대조적인 부분은 마치 ‘지혜의 언덕에 이르는 길’로 안내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또한 이 곡의 마지막은 앞선 세 곡의 종결 부분과 사뭇 다르게 안정감과 편안함, 그리고 깊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슈베르트의 즉흥곡 Op.90의 네 곡은 피아니스트에게는 반드시 거쳐야 할 교과서와도 같은 곡이다. 동시에 감상자들에게는 자연스러움과 정서적인 안정감, 그리고 풍부한 서정성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또한 슈베르트가 형식과 구조를 떠나 자연스러운 최고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이다. 

삶에 대한 깊은 고뇌와 철학적 사고를 순수한 음악 그 자체로 구현했던 슈베르트의 즉흥곡은, 길지 않은 삶을 살아간 청년 음악가가 인생의 마지막에 얻은 지혜의 산물이기도 하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는 공(空)과 반야(般若). 슈베르트의 즉흥곡 네 곡을 들으며 지혜의 안목으로 인생을 관조하고 진리를 향한 걸음을 내딛는 모습을 느껴보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다. 

김준희 피아니스트 pianistjk@naver.com

[1523호 / 2020년 2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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