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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우주이성과 개인이성의 구조적 동일성

수학 이용해 인류에 공헌한 뉴턴이 보살

서양의 자연 탐구 배경엔 수와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 전통
仁·情 등 인간 감정과 정서 중시했던 동아시아와는 크게 달라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모차르트의 소나타가 스피커로 흐른다. 공기로 전달되는 소리가 모여 음악을 이룬다. 이 음악은 CD 디스크가 돌면서 만든다. 이 디스크는 연주자들이 악보를 보며 연주한 소리를 녹음해 놓은 물건이다. 우리는 악보와 CD 디스크 그리고 음악소리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음을 안다. 그렇지 않고는 이 셋이 모두 하나의 음악과 연결될 수는 없을 테니까. 이 셋을 관통하는 공통된 것은 무엇일까? 철학에서는 이를 구조적 동형성이라고 설명한다. 그 구조란 일종의 논리적 구조를 가리키는데, 악보와 CD 그리고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이 모두 논리적 구조가 같기 때문에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제 사물의 논리적 구조와 형제지간인 우주의 수학적 구조를 고려해 보자.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에피소드는 언제나 신선한다. 엄밀히 말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런 법칙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온 우주의 변화와 움직임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내게 신선함을 주는 부분은 실은 이 이야기의 다른 측면이다. 뉴턴은 ‘신의 섭리’나 ‘자연에 내재된 목적’과 같은 모호한 개념으로 우주의 운행을 두루뭉술하게 기술하지 않았다. 그는 정교한 수학을 이용해 그때까지 알려진 지구상 그리고 천체의 모든 변화와 움직임을 정확히 기술 및 설명하고 또 예측했다.

뉴턴은 1687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책을 발표해 학문의 역사를 바꾸고 인류역사에 절대적 공헌을 했다. ‘자연철학’이란 자연을 연구하는 철학(학문) 즉 물리학을 말하고, 또 뉴턴은 ‘수학적 원리’라는 말로 추상적인 신학적 또는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닌 정밀한 수학적 원리로 자연세계의 진리를 규명하겠다는 점을 제목에서도 분명히 했다. 논리학과 수학을 꺼린 중국인들이 해 놓은 다른 학문만 오랫동안 따라한 동양이 전근대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서양인들은 수학을 바탕으로 세계를 항해하고 자연과학을 발전시키며 산업혁명을 완성했다. 그리고 뉴턴의 영국과 영국계 이민자들이 개척한 미국은 민주주의조차 이룩했다.

재직했던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근처 어느 언덕에 앉아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며 수학이라는 멋지고 정교한 붓으로 그 장면을 그리고 있는 뉴턴을 한번 상상해 보자. 지적(知的)으로 이처럼 숨 막히는 장면도 없을 것이다. 수학을 이용해 그가 인류에 공헌한 업적을 생각해 보면 뉴턴만큼 사람들을 이롭게 한 보살이 또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가 수학으로 자연세계를 탐구한 배경에는 수천 년 동안 서양을 관통하는 수(數)와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존재한다. 인(仁)이나 정(情) 같이 인간의 감정과 정서를 기반으로 한 가치를 바탕으로 개인과 사회의 생활을 꾸려온 동아시아와는 반대로, 이성(logos)을 따라야지 감성(pathos)으로 행위하면 안 된다는 판단이 서양의 전통이다. 이 전통은 고대희랍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6세기 피타고라스학파는 ‘만물의 근원은 수’라며 우주가 수학적 원리로 만들어지고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그 후 희랍과 로마의 스토아학파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개개인의 이성이 우주의 이성과 동일하다고까지 보았다. 이 말은 두 이성의 논리적 구조가 동일하다는 뜻이다. 스토아학파는 논리학을 열심히 연구했다, 논리의 구조를 연구하면 우주의 구조를 알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수학시간에 배우던 명제함수에 사용된 진리표도 2000여년 전 스토아학파가 만들어 낸 발명품이다. 이들은 이토록 철저히 논리적이고 비판적 사고를 요하는 치밀하고 정교한 작업을 성실히 수행했다.

우리 이성의 산물인 수학이 자연과 우주를 설명하는 가장 유용한 도구로 쓰인다는 사실이 우주가 실제로 수학적 원리로 움직이고 또 우주와 우리 이성의 구조가 논리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한편 스토아학파의 전통을 계승한 서양인들은 이성을 단지 자연세계를 탐구하기 위해서만 사용할 것이 아니라 삶을 더 잘 살기 위해서도 작동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삶을 잘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쿨’한 이성(logos)이지 ‘핫’한 감정이나 정서(pathos)가 아니라고 보는 점에서 서양문화 일반과 동아시아 문화권 사이에 차이가 많다. 예를 하나 들겠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서양에서는 장례식에서 소리 내어 우는 사람이 거의 없다. 서양인들은 대개 필연적인 것을 긍정하라는 스토아 전통에 맞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어떤 조건들이 모여 죽음이라는 결과가 나왔는데, 이것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고 따라서 그것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는 것이 이들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서양인들은 감정은 가능하면 절제되어야 하며 이성을 무력화시키도록 키우면 절대로 안 된다고 본다.

수레에 목이 매여 있는 개의 비유가 있다. 움직이는 수레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과 그 법칙이고,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것에 매여 있다. 여기서 목이 매인 개에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멈출 수 없는 힘으로 움직이는 수레를 따라가지 않겠다고 버티면서 끌려가든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수레가 움직이는 방향과 속도에 맞추어 함께 걸어 나가든지 해야 한다. 스토아학파의 전통을 이은 서양인들은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이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감정으로 버티는 것을 영웅적인 자세가 아니라 어리석음의 소치로 본다.

우주와 인간의 이성은 그 논리적 구조가 같기 때문에, 우리가 로고스(이성)에 따라 ‘쿨’하게 살아야 자연의 변화와 움직임에 따르는 순조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 스토아학파와 스피노자로부터 비롯된 서양인들의 생각이다. 파토스(격정)의 길은 자연에 어긋나기 때문에 스스로와 다른 이들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파토스는 우주의 원리도 내 삶의 원리도 될 수 없다. 여러 해 전 우리나라의 분노지수가 세계 1위라는 조사 결과가 있었는데, 요즘은 또 정치적 이념으로 편이 갈리어 서로 갈등의 극으로 치닫고 있다. 우리 모두가 감정적으로 극도로 ‘핫’한 시기에는 ‘쿨’한 로고스의 역할을 강조했던 서양인들의 지혜를 차분히 음미해 볼 필요가 있겠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24호 / 2020년 2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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