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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당 스님, 이주형 서울대 교수에 재반론-상

기자명 만당 스님
  • 기고
  • 입력 2020.02.24 11:13
  • 수정 2020.02.24 15:40
  • 호수 1526
  • 댓글 4

마라난타 시대 쿠샨왕조는 대제국…‘축건’은 ‘천축의 간다라’ 타당

쿠샨왕조는 월지국으로 불리며 간다라와 인도 상당부분 지배
해동고승전, ‘축’자 앞에 올 땐 ‘천축의 ~(무엇)’ 용례로 사용
필자가 주장 않은 내용까지 거론하며 ‘상상’ 내모는 건 부당

옛 간다라지역인 파키스탄 다르마라지카 불교유적지.
옛 간다라지역인 파키스탄 다르마라지카 불교유적지.

이주형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가 12월10일 법보신문 기고를 통해 백제에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 스님이 간다라 출신이라고 확정지을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 가운데 영광 불갑사 주지 만당 스님은 1월8일 법보신문에 보내온 반론문을 통해 마라난타 스님이 간다라 출신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반박했다. 이에 이주형 교수가 1월20일 만당 스님 주장을 반박한 가운데 만당 스님이 2월19일 이주형 교수를 재반박하는 기고를 다시 보내왔다. 편집자

마라난타 존자의 고향은 간다라라는 필자의 주장에 대한 이주형 서울대 교수의 잘못된 내용의 반박 기고문을 보고나서 재반론의 글을 쓰게 되었다. 

먼저 이 교수는 첫 번째 기고에서 ‘해동고승전에 기록된 축건(竺乾)은 천축(天竺)이므로 마라난타 존자의 고향은 간다라가 아니다’라고 강한 논조로 주장하여 마치 천축의 개념에 간다라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혀졌었는데, 그런 의미는 아니라고 하니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어서 다행으로 여긴다.

두 번째 기고문에서는 간다라도 천축에 포함되지만 천축 일부에 불과한 간다라를 천축과 동일시하는 것은 오류라면서 ‘마라난타의 고향이 간다라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마라난타의 고향을 간다라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말이다. 축건은 인도라는 뜻일 뿐이고 그 말에는 간다라라는 뜻이 없으므로 간다라 출신이라 할 확실한 근거는 없다는 말이다.’라고 하여 첫 번째 주장보다는 훨씬 완화된 표현으로 바뀌었다.

이제 논점은 명확해졌다. 사족은 다 걷어내고 접근해보고자 한다. 마라난타 존자 출신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해동고승전’의 ‘옛기록(古記)에 의하면 축건(竺乾)에서 중국으로 들어왔다’는 내용이 유일하다. 이 ‘축건’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이 교수는 축건이 천축과 같은 말이므로 축건을 간다라로 좁혀서 볼 수 없다는 것이고, 다수의 논자들과 필자는 ‘천축의 간다라’를 의미한다고 본다는 점에서 견해가 다르다.

‘해동고승전’에서 각훈 스님은 마라난타 존자에 대해 ‘축건’에서 중국으로 왔다라고 하는 반면에 아도 스님에 대해서는 ‘천축인’이라고 하여 달리 표현하고 있으므로 축건과 천축을 구분하여 다른 의미로 썼다고 보아야 하고 그러므로 ‘축건은 천축의 간다라를 말한다’고 이전 글에서 밝혔는데, 이에 대해 이 교수는 문학적 수사일 뿐이므로 축건은 천축과 같은 의미로 봐야한다고 했다.

그래서 각훈 스님이 ‘해동고승전’에서 천축과 관련해 사용하고 있는 단어를 모두 검토해 보았다. 서역(西域) 6회, 서국(西國) 5회, 천축(天竺) 4회, 서축(西竺)·서건(西乾)·서천(西天)·동천축·북천축·동인도·중인도·축풍(竺風) 각1회, 축교(竺敎) 3회, 축건(竺乾) 2회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각훈 스님은 ‘축’자를 앞에 둘 때는 축풍(천축의 풍조), 축교(천축의 가르침)에서 보듯이 ‘천축의 ~(무엇)’이라고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축건’도 ‘천축의 간다라’라는 의미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더군다나 ‘옛 기록을 살펴보니 축건에서 중국으로 왔다’고 하여 ‘옛 기록(古記)’에 근거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게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어떤 기록의 해석에 대해 의미를 확정하기 어려울 때는 역사적 사실과 상황을 고려해 해석을 보충하고 판단해야 한다. 동북아시아 불교전래사에서 대승불교가 발달했던 쿠샨왕조가 가장 중요하고, 대승불교사적 의미에서 볼 때 천축이 뜻하는 바는 간다라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그 이유를 살펴보겠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게 해준 단서가 된 동서교통로의 개척은 전한(前漢) 무제(BC 140∼BC 87) 때 이뤄졌다. 강성해진 흉노 견제를 위해 한무제 명을 받아 대월지국에 사신으로 파견돼 13년간 중앙아시아를 여행한 장건에 의해 대완, 강거, 대월지, 안식 등 서역 여러 나라에 관한 지식이 한나라에 전해졌으며, 천축과 불교에 관한 정보도 이때 전래됐다. 기원전 130년경 장건이 대월지국에 도달할 수 있었기에 중국과 서역의 교통이 열리게 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월지국의 역사와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월지국 이동경로.
월지국 이동경로.

월지(月氏, 月支) 또는 대월지(大月氏, 大月支)는 고대 중앙아시아의 국가로서 기원전 3세기 중반부터 기원전 1세기 중반 사이에 중앙아시아에 존재했던 유목민족이다. 본래 월지국은 둔황과 기련산 사이에 나라를 세우고 타림분지를 거점으로 동서무역을 독점해 흉노를 압박했다. 그러나 흉노가 강성해지면서 기원전 162년 노상 선우에게 패하고 월지의 왕이 살해되자 큰 부족집단은 멀리 서쪽 중앙아시아로 이동해간다. 이때 타림분지에 남아 있던 부족들은 소월지라고 불렸고, 서쪽으로 간 세력은 대월지라고 하였다. 대월지는 기원전 135년경 서쪽의 아무르 강 주변 소그디아나로 이동해 대하(박트리아)를 멸망시키고 다섯 부족의 연맹체 국가로서 무역을 하며 살아갔다. 이후 대월지의 다섯 부족 가운데 하나인 쿠샨(貴霜)족은 나머지 네 부족을 병합하고 기원전 1세기 중반~기원후 1세기 중반 경 서북인도에 진입해 세력을 확대하고 쿠샨제국을 건설했다.

‘쿠샨’은 중국어로 대월지의 다섯 부족 중 하나를 일컫는 말인 ‘귀상(貴霜)’에서 왔다. 귀상은 서양에 ‘쿠샨(Kushan)’으로 전해졌지만, 중국에선 쿠샨 왕조를 계속 대월지라 불렀다. 대월지는 불교를 받아들이고 불교가 매우 유행하면서 북쪽 실크로드를 통해 동북아시아에 불교를 전파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쿠샨제국의 3대 왕인 카니시카(Kanisika)는 2세기 중반 경에 간다라의 페샤와르(Peshawar)에 수도를 정하고 북인도의 대부분과 갠지스강 중상류의 마가다 지역, 서인도 북반(北半),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다. 왕은 국내 각지에 불탑·사찰을 건립하고 적극적인 불교 장려정책을 썼다. 이때 불교는 파르티아, 소그디아 지방에까지 보급되었고 이 시기로부터 이곳의 학승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불전 번역에 종사하기에 이르렀는데 쿠샨왕조의 영토가 인도와 중국을 잇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쿠샨 시대 문화는 카니시카왕으로부터 그의 아들인 후비슈카왕 시대에 걸쳐 동서양 문화를 융합해 간다라 미술이라고 불리는 불교예술문화를 형성해 후세의 동아시아 불교미술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카니시카 대왕 때의 쿠샨왕조 영토

한편 후한 명제는 금인(金人)에 관한 꿈을 뀐 뒤 사신 채음을 대월지에 보내는데, 대월지에서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기원후 67년에 후한으로 들어와 ‘사십이장경’ 등을 번역함으로써 중국에 최초로 불교가 전래된다. 이때 대월지가 바로 간다라를 중심으로 한 쿠샨왕조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장건의 서역 대월지국 방문으로 그 인근에 신독국(身毒國)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중국은 최초로 대월지를 통해서 인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신독국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인도를 지칭하는 명칭이 언제 신독에서 천축으로 바뀌어 불리는지 알아보는데 참고할 만한 자료가 있다. 진수(233~297)의 ‘삼국지’ 권30 ‘위서(魏書)’의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제30 배송지의 주(註)에 인용돼 있는 위(魏)의 어환의 ‘위략서융전’의 기사이다.

[罽賓國, 大夏國, 高附國, 天竺國, 皆竝屬大月氏. 臨兒國 浮屠經云 其國王生浮屠 浮屠太子也… 此國在天竺城中. …昔漢哀帝元壽元年…(계빈국, 대하국, 고부국, 천축국은 모두 대월지국에 속한다. ‘부도경’에 말하길 “임아국(룸비니)의 국왕은 부처님을 낳았는데 부처님은 태자이다. …이 나라는 천축성 안에 있다.”고 한다. …옛날 한의 애제 원수 원년(B.C 2)…]

이에 의하면 전한 말 기원전 2년에 대월지국 즉, 쿠샨왕조를 통해서 중국에 불교가 알려지고 있었고, 당시에 이미 ‘천축국’이라는 이름이 쓰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 주목할 점은 광의의 간다라 지역뿐만 아니라 갠지스강 중상류 지역을 중심으로 한 천축국까지도 대월지국에 속한다고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쿠샨왕조는 마투라, 마가다, 네팔 지역까지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해 통치하고 있었으므로 최광의의 간다라에는 갠지스강 중상류를 의미하는 천축국까지도 포함시킬 수 있다.

그렇기에 쿠샨왕조가 다스리던 인도를 지칭해 ‘천축(天竺)’이라고 하거나, 천축의 간다라를 뜻하는 ‘축건(竺乾)’이라고 하거나, 서쪽의 천축을 의미하는 ‘서축(西竺)’ ‘서건(西乾)’이라고 하거나 간에 관계없이 통용되는 것이다. 서건을 ‘서쪽의 간다라’라고 하여도 쿠샨왕조 시절에 대입하면 틀린 말이 아니다. 당시 역사적 상황에선 천축의 간다라나 간다라의 천축이나 구분할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해동고승전’의 ‘축건’은 ‘천축의 간다라’를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그리고 위 내용에 비추어 보면 최치원이 쓴 ‘난랑비서’의 ‘축건태자지화야’라는 구절에 나오는 ‘축건태자’에 대한 의문도 사라진다. 축건은 천축을 의미할 수도 있고, 천축의 간다라를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굳이 후대에 만들어진 ‘노자서승경’이나 ‘노자화호경’ 등을 논거로 삼을 필요도 없다. 근대에 발견된 돈황본 ‘노자서승경’도 당대(唐代)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 교수는 반박 기고문에서 “만당 스님은 4세기쯤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승려들은 대부분 간다라 출신이 아니겠냐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능성에 대한 추측에 불과하다. ‘인도 출신‘이라고 하는데 간다라 이외의 지역을 배제할 수 있는 근거는 희박하다. 만당 스님은 상상도 못하냐고 하지만, 추측이나 상상은 할 수 있어도 공적인 역사적 사실로 내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필자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필자가 법보신문에 기고한 글 어디에도 ‘4세기쯤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승려들은 대부분 간다라 출신이 아니겠냐’고 한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교수는 이 부분에서 필자가 ‘상상도 못하냐’고 했다고 하지만, 필자가 기고문에서 상상이라는 용어를 쓴 대목은 마라난타 존자의 고향이 간다라의 쵸타라호르일 것이라고 소개한 사람들에게 근거를 물었을 때 근거는 없고 추정하는 것이라는 대답을 듣고 마라난타존자의 고향이 어디쯤일 것이라고 상상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일 것이라고 하고 웃어 넘겼다는 부분에서이다.

만당 스님
영광 불갑사 주지

이 교수의 이전 글을 읽으면서도 논리적 비약과 독단이 심하다는 점을 느꼈지만,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다. 과연 글이나 제대로 읽고 기본적인 사료조사나 하고 글을 쓰는 것인지, 양식 있는 학자가 맞는지 이 교수에게 묻고 싶다.

[1526 / 2020년 2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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