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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문장과 언어 그리고 전법

불교, 한글화 않으면 종교간 경쟁서 백전백패

일본 도겐 선사는 13세기에 한문 아닌 일본어로 뛰어난 저술 펴내
한국은 최고 글인 한글 가지고도 500년간 독창적 저술 완성 못해
‘서세동점’ 역사는 유럽 각국이 자국 언어와 문장 사용하면서부터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철학자 가운데도 문장이 훌륭해서 읽을 때마다 그 지성의 예리함뿐 아니라 문장의 수려함에도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사람이 있다. 17세기 프랑스의 데카르트 같은 이는 ‘그가 이렇게 명문을 구사하는 철학자였기에 근대철학을 더 성공적으로 시작했을 것’이라는 찬사가 붙을 정도로 맑고 매력적인 문장을 구사했다. 미국에서의 대학원생 시절 나는 그의 라틴어 및 불어 원전 영어번역을 읽고서 그 아름다움에 감탄해 그의 책 ‘명상’의 영역본을 철학전공도 아닌 친구들에게 선물했을 정도였다. 물론 명문장은 그 영향력 때문에 가끔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나는 10대와 20대 초반에 천하의 명문인 철학자 니체의 글을 읽을 때마다 심장이 뛰어 잠을 못 이룬 날도 많았다. 그런 니체의 철학과 바그너의 음악이 나치 독일의 국가 이데올로기와 음악이 되어 불행한 역사의 일부분을 구성하기도 했다.

나는 불교 공부를 주로 영어로 된 책을 통해 해 왔는데, 지금까지 읽은 모든 책들 가운데 지적으로 가장 세련되고 또 문장이 훌륭한 것은 13세기 일본의 도겐(道元)선사의 글이다. 비록 영어번역을 통해서만 읽었지만, 발췌된 영문번역만 보아도 그의 글은 정말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글의 내용은 이미 몇 세기 전부터 중국이나 한국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많지만, 도겐은 같은 내용이라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게 표현해 내고 있어서 그의 글은 한번 자리에 앉으면 다 읽지 않고서는 자리를 뜨기 어렵다. 

도겐선사의 글 다섯줄을 소개해 보겠다. 비판불교의 마츠모토 시로는 도겐이 기체론(基體論)을 결국 떨치지 못했다고 보고 있지만, 그와 같은 대학 선배 교수인 하카마야 노리야키는 도겐은 말년으로 갈수록 비판불교 입장에서 보아도 무리 없는 사상을 전개했다고 본다. 밑의 다섯줄만 보면 하카마야 교수가 옳은 것처럼 보인다.

“불도(佛道)를 공부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공부한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공부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잊는 것이다. 스스로를 잊는다 함은 만물에 의해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만물에 의해 깨닫는다는 것은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그리고 다른 이들의 몸과 마음을 내려놓아 여읜다는 것이다. 깨쳤다는 자취는 아무 곳에도 남아있지 않지만, 이 무(無)자취는 끝없이 자취를 남긴다.”

마음공부가 지향해야 할 목표가 사실은 아뜨만이 아니라 무아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화엄의 법계연기(法界緣起)와 중관의 ‘윤회가 열반’이라는 통찰, 그리고 ‘금강경’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구절들이 뒤따른다. 선문 및 대승의 후기 견해가 점점 더 소급해서 초기 대승의 견해로 귀결되는 듯한 숨은 논리전개가 흥미롭다. 위에서 비판불교론자들의 타겟인 불성론을 읽을 수도 있겠지만, ‘불성’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해서 기체론이 아닌 방향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리 나쁠 것도 없겠다.

한편 도겐이 한국 선문(禪門)의 주류인 간화선 계통의 임제종이 아니라 묵조선 계통인 일본 조동종의 개조(開祖)라고 해서 무조건 깔보아서는 안 되겠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아직도 일본 사람의 업적을 인정해 주면 친일매국노라는 소리를 듣는가? 나는 미국에 사니까 친미일지는 몰라도 친일한 적도 매국한 적도 없다. 오히려 이곳에서 강의할 때 일본 흉 봤다가 나중에 항의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나를 가장 놀라게 한 사실은 도겐의 저술 상당부분이 한문이 아닌 중세 일본어로 쓰여졌다는 점이다. 한글이 창제된 시기가 15세기 중엽이었고 한글로 된 중요한 학술서가 나오기 시작한 때는 솔직히 20세기 이후라고 보아야 하는데, 역사에 길이 남을 일본어로 된 도겐의 저술이 나온 것이 13세기였다는 점에 나는 대단히 충격 받았다. 기적처럼 훌륭한 최고의 글인 한글을 가지고도 오백 년 동안 제대로 된 어떤 독창적 저술도 완성하지 않았던 한국이, 일본에 비해 어쩔 수 없는 인구나 영토 그리고 경제의 크기에서뿐이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뒤지게 되었다는 점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퇴계와 율곡 그리고 다산은 참으로 훌륭했지만, 그들이 한글로 저술을 완성했다면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읽고서 모두가 다 얼마나 더 많이 학문을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왜 그렇게 한글과 같은 최고의 자산을 가지고도 활용하지 않는 고집을 부렸을까, 어리석게도! 우리 정말 무명(無明)을 떨치고 분발해야 한다.

유럽인들은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며 라틴어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일반 신도가 직접 성경을 읽게 되면 기득권을 잃는다고 우려한 사제들이 ‘신성한 언어
인 라틴어로 된 성경’을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신성모독이라며 극렬히 탄압했다. 마틴 루터가 최초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는데, 영어로 처음 번역한 사람은 교회에 의해 화형당했다. 그러나 자국어로 번역하는 대세를 막을 수 없었고, 인쇄술이 보급되며 국민언어로 된 성경이 널리 퍼졌다. 그리고 각 나라의 모든 문서가 점차 라틴어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국어로 쓰여 통용되기 시작했다. 유럽 각국이 자국의 언어와 문장을 사용하면서부터 그들의 국력이 날로 팽창한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이때부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한국불교계도 한문으로 된 경전과 예불문 등을 한글로 번역해 사용하려고 노력해 왔다고 들었다. 그런데 얼마 전 법보종찰 해인사에서 예불과 의식을 우리말로 행하기로 했다는 신문 기사가 난 것을 보면 다른 곳에서는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펴고 불교문화를 더 널리 전하려면 그것을 더 많은 한국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문장으로 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국민언어인 한국어와 한글로 당장 모두 바꾸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어와 한글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진행하며 포교에 전념하고 있는 이웃종교와의 선의의 경쟁에서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26 / 2020년 2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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