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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중국에 회자됐던 백제의 제석사 불사리 영험 이야기

백제 무왕, 부처님 사리 봉안 신라보다 4년 앞섰다

삼국유사에 643년 신라 자장 스님 중국에서 사리 이운해 봉안    
백제 사리신앙, 중국서 7세기 나온 관세음응험기에 상세 수록
639년 낙뢰로 무너진 탑서 나온 사리병 스스로 열렸다 전해져

익산 제석사지 전경과 목탑지(중앙). 639년 7층목탑에서 나온 불사리 6매의 영험 이야기가 고대 중국의 ‘관세음응험기’에도 실렸다.

신라에 사리신앙이 전국화, 대중화 되었던 건 643년에 자장 스님이 중국에서 불사리를 모셔와 황룡사 구층목탑, 통도사 금강계단에 봉안하면서부터라고 얘기했다. 사실 자장 스님은 그 외에 오대산 월정사에도 소중하게 불사리를 봉안했다. ‘삼국유사’에 “석가모니 입멸 후 다비해서 나온 불두골, 치아사리, 가사 등은 문수사리에게 맡겨졌다. 훗날 신라의 자장 스님이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이 불두골, 치아사리, 가사를 받았고 귀국하여서 월정사에 봉안했다”라고 나온다. 석가모니의 사리가 이 땅에 왔다는 믿음이야말로 우리나라 불교 발전에 있어서 가장 든든한 토양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고려 때는 석가모니 사리 외에 가섭여래, 정광여래의 사리도 있다고 생각하는 등 불사리에 대한 인식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지며 사리신앙이 극성했다. 미국 보스턴박물관의 고려시대 소형 은제 사리탑 명문에 ‘가섭여래 사리 2매, 정광여래 사리 5매를 넣었다’라고 나오는 것도 그런 믿음이 있어서였다(Korean Silver-work of Koryo Period, 1941). 황수영 박사는 1972년 현지를 방문해 이 탑 안에 들어있던 사리 7매를 확인했다(‘금석유문’, 1979).

고대 사리신앙으로 다시 돌아와, 고구려와 백제의 사리신앙을 알아본다. 고구려는 신라보다 145년 먼저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아쉽게 사리신앙과 관련한 이야기는 지금 거의 전하지 않는다. 다만 1988년 함남 신포의 절골에서 나온 477~488년 사이 제작된 금동판에 ‘여래께서 금하(金河)의 신[석가불]의 묘택(妙宅)에서 가없는 가르침을 펼치다가…(중략)…다비[闍維]함을 보이셨다’라고 새겨져 있어 고구려 사람들의 불사리에 관한 이해도를 조금 엿볼 수 있을 뿐이다(‘조선유적유물도감’, 1990). 앞으로 북한 지역의 절터 발굴조사가 활발해져 고구려 사리신앙에 관해 더 잘 알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왕궁리 오층석탑. 1965년 수리시 나온 사리장엄이 ‘관세음응험기’ 내용과 비슷해 무왕이 제석사 목탑 불사리를 이곳에 다시 봉안했을 가능성이 있다.

백제 역시 언제 어떻게 불사리가 전래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7세기 일본에 불사리를 전했을 정도이니(‘일본서기’), 신라 못잖게 사리신앙이 왕성했고 또 그에 상응할 만큼 상당한 양의 불사리가 봉안되어 있었을 것이다. 한편, 백제 사리신앙의 면모가 7세기 중국에서 나온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보인다. 중국을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 전하는 관음보살의 영험담을 모은 책인데, 여기에 백제 익산에 있는 제석사(帝釋寺) 이야기도 나온다. 요약해 보면 이렇다.

639년 11월 어느 날, 낙뢰로 인해 절 건물이 불타버리고 7층 목탑도 무너졌다. 탑에 가보니 주춧돌 심초석 안에 수정 사리병과 칠보, 목제 칠함에 담긴 ‘금강반야경’을 사경(寫經)한 동판(銅板) 등이 들어 있었다. 소식을 듣고 관청에서 나온 관리가 사리병을 열어보려 했지만 단단히 봉해져 있었다. 사리병을 들고 비춰보아도 안이 보이지 않고 흔들어보아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아 빈 병 같았다. 사리병인데 사리가 없다니, 이상했다. 관리가 궁에 들어가 보고하자 무왕은 곧바로 스님을 청해 참회법회를 성대히 열었다. 이때 신이한 일이 일어났다. 요지부동이던 병뚜껑이 스르르 열렸고, 안을 들여다보니 불사리 6매가 들어 있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불사리는) 불에도 타지 않는다(火不能燒)”는 ‘법화경’ ‘보문품’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었고 “무릇 성인의 자취[불사리]는 어디든 나투시어 사람들을 이끌어주시니, 만일 지극한 마음으로 믿는다면 어찌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夫聖人神迹 導化無方 若能至心仰信 無不照復覆 捨拾右條追繼焉)”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후 왕과 궁인들의 믿음이 더욱 커졌고, 절을 다시 지어 이 불사리를 공양하였다.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 ‘관세음응험기’에 나오는 제석사 목탑의 사리병, 금동함 등의 묘사와 실물이 거의 비슷하다.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2009년 해체수리시 미륵사의 유래가 적힌 금동판, 사리호, 사리병과 불사리 등이 나왔다.

처음에는 안 보였지만 사람들이 참회법회를 하고 정성을 다하자 불사리가 비로소 감응했다는 이 이야기는 천 여 년 전 중국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다가 책에도 실린 것이다. 요즘 사람들한테는 환상적이고 전설 같은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1993년 제석사지가 발굴되어 불에 탄 목탑지, 금당지 등이 확인되면서 ‘관세음응험기’의 이야기가 허구가 아님이 인정되었다. 그런데 사실 그보다 훨씬 전인 1965년 인근의 왕궁리 오층석탑이 해체수리될 때 이미 사람들의 큰 관심을 끈 적이 있었다. 탑 안에서 발견된 수정 사리병, 금제 함 속에 담긴 금판 ‘금강반야경’(현 전주국립박물관 소장)의 재질과 형태가 ‘관세음응험기’에 나오는 묘사와 놀랍도록 일치했기 때문이다. 사리병에 담긴 불사리의 수만 6과 대 16과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제석사 목탑에서 신령한 불사리가 출현하자 감격한 무왕이 부근에 오층석탑을 세우고 여기에 다시 봉안한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실제 근래 석탑 부근이 본격 발굴되어 궁궐과 사찰 건물들, ‘왕궁사’라 새겨진 기와 등이 확인되어 이런 추정에 힘을 실어주었다. 1400년 전 불사리가 나타났던 이야기를 그저 전설로만 생각했는데 오늘날 사람들 앞에 다시 모습을 보였으니 전설의 화현(化現)이라고 해야 할까. 

제석사와 왕궁사 불사리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미륵사로 마무리된다. 백제 최고의 사찰인 미륵사는 무왕이 부인 선화공주와 함께 창건했다(‘삼국유사’ ‘무왕’조). 16세기 무렵에 폐사된 뒤 빈 절터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석탑 1기가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런데 2009년 석탑 해체수리 때 사리장엄이 발견되어 큰 관심을 모았다. 함께 나온 금판에는 639년 기해년에 무왕과 왕후의 발원으로 불사리를 봉안하고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그 유래가 적혀 있다. 백제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동 사리호를 비롯해 여러 수준 높은 공예장식품들 중에는 불사리로 보이는 작은 구슬들과, 이미 깨져 있던 유리 사리병 조각도 있었다. 이전부터 전해오던 불사리를 석탑을 새로 지으면서 다시 봉안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혹시 무왕은 민심을 모으고 국력을 결집하기 위해 제석사 목탑에서 나온 불사리를 왕궁리 오층석탑에 넣고, 심혈을 기울여 창건한 미륵사의 탑에도 그 일부를 봉안한 것은 아닐까? 

신라에서 사리신앙의 일대 전기가 되었던 것이 자장 스님의 황룡사, 통도사, 월정사 불사리 봉안이었다면 백제에서는 그보다 4년 전인 639년에 무왕의 제석사, 왕궁사, 미륵사 불사리 봉안이 그랬다. 이렇듯 백제와 신라는 비슷한 시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리신앙을 발전시켜 나갔다.

신대현 능인대학원대학 불교학과 교수 buam0915@hanmail.net

 

[1528호 / 2020년 3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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