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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현세의  ‘초월’-하

기자명 유응오

초월과 파란, 그 다르지 않은 삶

최고 압권은 파란이 삭발장면
삭발자가 숱한 형상으로 변화
뭇 중생 일심으로 회귀 표현
모든 희로애락 녹이면 일심뿐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초월 스님과 현대를 사는 파란의 삶이 다르지 않은 것은 과거에 쌓은 선업이 현세까지 이어져오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초월 스님과 현대를 사는 파란의 삶이 다르지 않은 것은 과거에 쌓은 선업이 현세까지 이어져오기 때문이다.

작품 속 파란의 가방에 담긴 은장도는 밝음이가 자살을 계획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 은장도는 할머니가 유물로 남겨준 것이다. 작품 속에서 밝음이는 할머니가 소녀시절에 끌려가 몸소 겪어야 했던 치욕과 고통의 과거를 목도한다. 일본군에게 능욕을 당한 뒤 자살하려는 할머니를 위무하는 것은 다름 아닌 파란이다. 파란의 말을 듣고서 할머니가 하는 말은 가슴 저릿하다.

“그래야 나중에 너를, 예쁜 파란이와 씩씩한 밝음이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아팠지. 너무너무 아팠지.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았지. 온 몸에, 영혼에까지 새겨진 고통과 상처는 지워지지 않더라. 내 안의 기쁨과 사랑을 채워 그 고통의 상처를 덮어야만 하는 거란다. 나도 그랬고, 초월 스님도 그런 거야.”

파란의 아픈 사연을 짐작했기에 진관사 주지스님은 “모든 건 칼을 쥔 그 사람의 마음에 달린 법이야. 할머니께서 겪은 아픔과 고통을 미움과 분노로 되갚지 않고, 너희에게 사랑을 베푸셨듯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자살하고자 했던 칼로 파란은 삭발한 뒤 사문(沙門)에 든다. 이 작품의 최고 압권이 바로 파란이 삭발하는 장면이다. 파란이 삭발할 때 번뇌초인 머리카락을 잘라주는 사람의 형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귀, 측간귀, 처녀귀 등 고혼(孤魂)이었다가 중간에는 초월 스님의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로 바뀌고, 나중에는 현실세계의 은사인 주지스님으로 바뀐다. 삭발 과정에 아래와 같은 내레이션이 흐른다.

“모진 질병 들 때에는 약초 되어 치료하고, 흉년 든 세상엔 쌀이 되어 구제하며, 여러 중생 이익 된 일 한 가지도 빼지 말고 허공에 끝이 없듯 경계 없이 나아가서 나 너 없는 일심으로 부디 성불하시기를. 내가 간 독립의 길과 네가 갈 구도의 길 다르지 않을 것이니. 한 치도 물러남 없이 용맹정진하여라.”

작품 속에서는 아귀, 측간귀, 처녀귀 등 고혼과 세속의 사람들과 출세간에 든 수행자가 다르지 않다. 육도윤회 하는 모든 중생이 일심(一心)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초월 스님과 현 시대를 사는 파란의 삶이 다르지 않다. 과거에 쌓은 선업이 현세에까지 이어져오기 때문이다. 

‘길 없는 길을, 발 없는 발로’ 출가의 길을 택한 파란을 보면서 작품 속에서 인용된 “일체의 경계에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는 대장부가 되어라.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비범한 대장부가 되어라”라는 대행 스님 법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주지스님이 파란에게 건넨 “세상 속의 모든 존재가 너의 마음자리에서 나온 것이니까.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은 사람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지만 그것들을 닦고 지워내고 녹여내면 그 안에 남은 것은 일심”이라는 말은 이 작품의 주제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초월 스님이 수륙재 끝에 한 “마음은 체가 없어 한걸음에 우주를 건너지. 숨 한 번 크게 쉬어 벗어나라. 너를 묶고 있는 슬픔과 아픔을. 너를 가두고 있는 고통과 번뇌를”이라는 말씀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 불교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현세는 오래 전 불국사의 제의로 월산 스님의 행장을 그리려고 했던 사실을 밝힌 바 있다. 불교계가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다면 유명 만화가들이 한국불교를 이끈 조사스님들의 행장을 작품화하는 것도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유응오 소설가 arche442@hanmail.net

 

[1530호 / 2020년 3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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