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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쿠야(空也)의 오도리넨부츠(踊り念仏)

기자명 정혜진

한국 무애무 연상케하는 일본 전통 춤염불

헤이안시대 구야 스님에서 시작돼 잇펜 스님에 의해 확산
염불로 극락왕생 할 수 있다고 약속 받은 기쁨을 표현한 것
일본 가부키 춤·봉오도리 등에 영향 주며 민속문화에 기여

잇펜의 오도리넨부츠가 잘 묘사된 국보 ‘일편상인회전(一遍上人繪傳)’.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잇펜의 오도리넨부츠가 잘 묘사된 국보 ‘일편상인회전(一遍上人繪傳)’.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스스로를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칭하며, 자신을 낮추고 환속한 원효 스님은 무애행(無碍行)으로 유명하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라는 ‘화엄경(華嚴經)’의 구절을 따서 ‘무애’라고 했다. 그는 거리며 시장을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며 조롱박을 두드리고 노래하며 춤을 췄다. 삼국통일을 위한 전란의 시기에, 전쟁의 참화 속에서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위로한 것이다. 그리고 구원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하고 부처를 알게 하였다. 바로 ‘염불’로 말이다. 노래하고 춤추는 ‘춤염불’로 불법을 전하면서, 나무아미타불로 갈 수 있는 극락세계를 발원해 민중들을 일깨웠다. 이것이 일본에도 천여 년을 이어 전해져 오고 있다. 

헤이안(平安)시대 구야(空也, 903~972)스님으로부터 시작해 가마쿠라(鎌倉) 시대의 잇펜(一遍, 1239~1289) 스님에 의해 널리 퍼진 춤염불, ‘오도리넨부츠’가 그것이다. 오도리넨부츠란 춤이라는 뜻의 오도리(踊り)와 염불이라는 뜻의 넨부츠(念仏)가 합쳐진 말로, 북이나 징을 치고 염불을 외우며 춤을 추는 일본의 춤염불을 말한다. 염불을 외면서 추는 일본 전통 민속춤은 다양한 형식으로 전국에 분포되어 있는데, 춤꾼과 소리꾼이 구분되어 있는 ‘염불춤’(念仏踊り)과 스스로 염불을 하면서 춤을 추는 ‘춤염불’(踊り念仏)로 나뉜다. 춤꾼과 소리꾼이 분리되어 있는 염불춤은 스가와라 미치마사(菅原道真)가 886년부터 889년까지 4년간 사누키국사(讃岐国司)를 지낼 때 행한 ‘기우제 춤’을 기원으로, 마을 사람들이 감사의 의미로 추었던 것이 지금까지 남아 일본의 중요무형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편 염불춤의 기원은 헤이안 시대 중기 승려 쿠야(空也)가 바리를 치고 파발을 울리며 염불을 외워서 춤을 춘 ‘쿠야염불’이 시초가 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쿠야 스님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시중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불교를 설파한 승려로, 스님이 염불을 할 때면 ‘나무아미타불’ 6자가 6체의 아미타불로 변해 입에서 나와 형상화되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염불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예를 갖추고 앞 다퉈 구경하였다 한다. 이후 그를 이어 가마쿠라 시대에 잇펜 스님이 그의 문하생과 함께 유행(遊行)을 하면서 춤염불은 전국으로 전파되었다. 그들은 일념의 신심으로 염불을 외운 자들에게 패를 주었는데, 이를 ‘후산(賦算)’이라고 불렀다. ‘나무아마타불 결정왕생 육십만인’이라 적힌 후산을 받은 이들이 한 번의 염불로 극락왕생할 수 있다고 약속받은 기쁨을 표현한 것이 ‘춤염불’인 것이다. 

“일체 중생의 왕생은 나무아미타불로 필정하는 곳. 신불신을 가리지 말고, 부정을 가리지 말고, 패를 나눠주라”고 설파한 잇펜은, 번뇌를 버리면 마음은 부처와 하나가 된다고 믿었기에 백성들에게 염불을 외며 추는 춤을 권했다. 춤 자체로 법열을 얻는다는 것이 잇펜 춤염불의 인식체계이기 때문이다. 염불자는 지혜와 번뇌와 선악의 경계를 버리고 귀천과 지옥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극락을 바라는 마음도 버리며, 불교의 깨달음과 모든 것을 버리고 외는 염불이야말로 가장 아미타불의 본원에 부합한다는 것이 잇펜의 사상이자 교리였던 것이다.

현재 잇펜을 잇는 시종(時宗)의 춤염불은 잇펜이 처음으로 춤염불을 행한 나가노현 사쿠시의 사이호지(長野県 佐久市 西方寺)에서만 실연이 되고 있으며, 아토베(跡部) 오도리넨부츠로 명명해 1986년에 일본 중요무형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유배된 큰아버지를 찾아 아토베(跡部)를 방문했을 때, 보라색 구름을 보고 염불을 외면서 춤을 춘 것이 유래가 되었다는 아토베의 오도리넨부츠는 사이호지 본당 내 도량의 가운데에 북 2면을 설치한 뒤 그 받침대에 염주를 놓고 정좌와 묵념으로 시작을 한다. 그리고 북을 마주보고 선 두 명의 성인남성이 타고를 시작하면 8명의 성인여성이 염불을 외우며 입장을 한다. 북가락에 맞추어 작은 징을 치며 북을 중심으로 둥글게 돌아가며 추는 이 춤은 단순하지만 조금씩 빨라지는 장단에 스텝을 맞춰 약 20분가량 공연된다. 춤염불 후에는 본존에게 올린 삼색 경단을 나눠주는데, 이것을 먹으면 지혜가 생기고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고도 하여 에도 시대에는 서민의 즐거움으로 각지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잇펜이 원류가 된 오도리넨부츠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일본민속예술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지만, 에도 시대에 제정된 단가제도를 통해 유행의 시종이 신자를 늘릴 수 없게 된 것이 원인이 되어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춤염불 자체는 한국에서도 익숙한 가부키 춤과 일본의 대표적인 마츠리에서 추어지는 봉오도리 등에도 큰 영향을 주는 등 일본민속문화에 기여한 바가 크다.

비견하여 한국의 무애무(無㝵舞)는 민초들의 불교 포교를 위해 원효가 대중적으로 염불춤 형식으로 행했다는 시각과 궤를 같이하나, 궁중의 여기들에 의해 궁중연에서 추어지며 원래의 취지를 벗어나 변모하기 시작했다. 고려에 들어 궁중의 향악무가 되고부터 호리병도 금방울과 채백(彩帛)으로 화려하게 장식되기에 이르렀고, 원효가 혼자 추던 무애무는 여러 기녀들이 무애사를 선창하고 무애를 어르다가 잡고 춤을 추는 형식으로 변화하였다. 궁중정재의 양식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후 무애무는 세종대에 이르러서는 불가어를 쓴다는 이유로 연향에서 금지되는 수모를 겪었으나, 효명세자가 새롭게 무애무를 창시하면서 궁중연에서 다시 연희가 되었다. 다만 새로운 무애무는, 부처님의 자비로 임금의 만수무강을 비는 내용으로 변모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12명의 무인 중 2명이 표주박을 손에 들고 춤을 추면 협무라 칭하는 다른 10명의 무인이 그 주위를 맴돌면서 함께 춤을 추었다. 

불법을 노래로 지어 춤과 함께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반 대중에까지 잘 알 수 있도록 한 원효의 무애무와 나무아미타불 염불로 극락왕생을 발원하게 했던 쿠야의 오도리넨부츠는 염불회향의 서원과 다르지 않다. 그 발심을 담은 김호성 교수의 시집 ‘꿈속에서 처음으로 염불춤을 추었다’의 싯귀로 마무리를 갈음한다. 

“온 우주가 무너진 폐허 위에 핀 한 송이 꽃, 나무아미타불”

정혜진 예연재 대표 yeyeonjae@gmail.com

 

[1531호 / 2020년 4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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