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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㊹ 원광(圓光)의 불교사상과 새로운 사회윤리관 ⑤

원광은 정치권력에 예속되지 않은 정신적 스승이자 엘리트불교인

불법을 세속법 위에 두는 남조 전통 따라 국왕에게 보살계
왕권신성화 기여 자장의 호국불교·원효의 대중불교와 구별
입적 연대 두 가지 혼재…당 태종의 연호 ‘정관’연대가 타당

원광 스님의 무덤 자리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 안강 금곡사지 전경.
원광 스님의 무덤 자리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 안강 금곡사지 전경.

원광이 귀국한 진평왕 22년(600) 즈음 고구려・백제・신라 관계는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백제는 30대 무왕(600~641)이 즉위하면서 46년 전 성왕이 피살된 후유증에서 벗어나 새로운 중흥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신라에 대한 침공을 재개하여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원광에게 세속오계를 받았던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전사한 것도 진평왕 24년(602)의 아막성(阿莫城)의 전투에서였다. 

한편 고구려는 26대 영양왕(590~618)이 즉위하여 말갈병을 동원, 요서지역을 침공하는 한편 남쪽으로 백제와 신라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였다. 이로 인해 신라는 양면으로 강적을 상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신라는 한강 유역으로 침략해 오는 고구려에 대항하여 중국대륙을 통일한 수와의 친선을 도모하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다. 마침내 진평왕 30년(608) 원광에게 고구려를 치기 위해 군사를 요청하는 걸사표(乞師表)를 짓도록 하였다. 그리고 3년 뒤인 진평왕 33년(611)에 다시 수에 군사를 요청하는 표문을 보냈는데, 이 글도 원광이 썼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 해에 백제는 신라의 가잠성(椵岑城)을 포위 공격하여 함락하는 등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는 한편, 고구려와 수나라의 사이에서 양단의 정책을 취하여 겉으로는 수에 고구려 침략을 요청하면서 실제적으로는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3국 사이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진평왕 34년(612) 마침내 고구려와 수 사이에 사활을 건 살수대전(薩水大戰)이 일어났다. 

그런데 수의 양제는 살수대전에서 참패를 당한 후에도 고구려에 대한 침략을 계속하여 다음해 다시 친정을 감행하였다가 요동성을공격에 실패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달인 7월 신라에 사신으로 왕세의(王世儀)를 파견해 왔다. 신라는 수의 사신을 맞아 황룡사에서 백고좌회(百高座會)을 개최하였는데, 원광이 가장 윗자리에 앉아 강설하였다. 대외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신라는 불교의 힘을 빌려서라도 위기를 극복하려 하였는데, 마침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수의 사신이 오게 되자, 제일의 사찰인 황룡사에서 불교의식을 베풀게 되었으며, 이때 원광이 나라의 정신적 스승으로서 활약하게 된 것이다. 

백고좌회는 24대 진흥왕 12년(551) 고구려에서 망명해온 혜량(惠亮)에 의해 팔관회(八關會)와 함께 개최된 적이 있었는데, 이 두 법회는 대표적인 호국불교 의례였다. 특히 백고좌회는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 호국품(護國品)에 의거하여 거행되는 의례인데, 그 ‘호국품’의 요지는 국토가 나누어지려고 할 때나 파괴와 큰 화재,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놓일 때 100명의 법사를 초청하여 ‘반야바라밀경’을 강의하게 하면 국토 안에 있는 100부의 귀신들이 국토를 지켜준다는 것이다. 경전은 구마라집(鳩摩羅什)과 불공(不空) 번역 2종이 전하는데, 역자가 불확실하여 단지 구역본(舊譯本)과 신역본(新譯本)으로 불려진다. 원광이 강의한 것은 구역본으로서 신역본에서 새로 추가된 주술적 요소보다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이성적이고 실천수행적인 것에 비중을 더 둔 것이다. 같은 ‘반야바라말경’ 촉루품(囑累品)에서는 국왕 등의 국가권력이 승려에 대하여 간섭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원광 자신이 중국 유학 중에 정치권력에의 일방적인 예속을 거부하였던 남조불교를 먼저 접하였던 사실을 아울러 고려할 때, 걸사표를 지으라는 진평왕의 명을 받고 원광이 말했다는 “자기 살기를 구하여 남을 멸하는 것은 승려로서의 행동이 아니다”고 한 말의 의미, 나아가 그의 불교와 국가권력의 관계에 대한 고민과 갈등을 이해할 수 있다.

원광의 활동 가운데 치병(治病)에 대해서는 ‘속고승전’ 원광전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해주고 있다. 

“본국의 왕이 병에 걸려 의원의 치료에도 차도가 없자, 원광을 궁중으로 초청해서 별도의 궁전에 모시게 하였다. 밤이면 두 시간이나 심오한 법을 설하고, (왕에게) 계(戒)를 주고 참회하게 했더니, 왕이 깊이 신봉했다. 어느 때 초저녁에 왕이 원광의 머리를 보니, 금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햇무리(日輪) 같은 형상이 그의 몸을 따라 다녔는데, 왕후와 궁녀들도 함께 그것을 보았다. 이로 인하여 나을 수 있다는 마음을 거듭 발하여 (원광을) 별실에 머물게 했더니, 오래지 않아 마침내 병이 나았다.” 이 일화는 원광의 제자인 원안(圓安)이 서술한 자료를 ‘속고승전’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인데, 원안은 원광의 법을 계승하고 수에서 활동한 인물로서 원광의 행적, 특히 귀국 뒤의 활약 내용을 중국에 전해주어 ‘속고승전’에 수록케 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내용 가운데 원광이 왕에게 주었다는 계는 귀산 등에게 세속오계를 가르쳤을 때 말했다는 보살계(菩薩戒)였을 것인데, 국왕이 승려에게 계를 받음으로써 불법을 세속법보다 우위에 두는 남조불교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남조 양의 무제(武帝)나 진의 무제(武帝) 등 황제가 승려로부터 계를 받고 ‘보살계제자(菩薩戒弟子)’로 불렸으며, 참회문(懺悔文)을 남기기도 하였다. 수의 문제(文帝)는 중국을 통일하고 불교치국정책을 추진하면서 사탑을 세우는 등의 불사와 함께 경전 연구를 진흥시킴으로써 남북조불교를 통합하였으며, 황제 자신도 보살계를 받고 있었다. 중국 유학 중에 진과 수의 불교를 직접 견문하였던 원광이 귀국한 뒤에 수계와 동시에 참회하는 불교를 그대로 실천한 것으로 보인다. 국가권력에 일방적으로 예속되거나 무속이나 밀교의 신비적이고 주술적인 신앙과는 차원을 달리하여 실천적인 불교수행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원광은 해마다 두 번의 불교경전 강론을 통하여 진의 금릉과 수의 장안을 왕래하면서 배워온 중국의 선진불교를 소개하고 제자를 양성하는 승려 본연의 역할과 함께 새로운 윤리덕목 제시, 외교문서 작성, 국가적인 호국법회 주관, 치병 활동 등 세속과 출세간을 넘나들면서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었다. 

‘속고승전’ 원광전에서는 원광의 말년과 임종 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원광은 나이가 많아 수레를 타고 대궐에 들어갔고, 의복과 약・음식을 왕이 몸소 마련하여 다른 사람이 돕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왕은 오로지 혼자만 복을 받으려고 했으니, 감동하고 존경하는 모습이 이 정도였다. 세상을 떠나려 할 때 왕이 친히 손을 잡고 위문하며 백성을 구제할 수 있는 법을 남겨 달라고 부탁하니, 상서로운 징조를 설명하여 온 나라 구석구석에 미치게 했다. 건복(建福) 58년(641)에 몸이 불편한 것을 느끼더니 이레가 지나 매우 간절한 계를 남기고, 머물고 있던 황륭(룡)사에서 단정히 앉아 임종하였다. 이때가 춘추 99세로서 바로 당 정관(貞觀) 4년(630)의 일이었다. 임종할 때 절 동북쪽 허공에서는 음악 소리가 가득하고 이상한 향기가 절에 가득 차니, 승려와 신도들이 모두 슬퍼하면서도 경사스러운 일로 여겨 신령스러운 감응이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를 교외에 장사지냈는데, 나라에서 우의(羽儀,儀裝)와 장례용구를 내려주어 국왕의 장례와 같이 하였다.” 

이로써 원광의 말년 최고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모습과 진평왕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추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이 자료 가운데 문제되는 것은 입적 연대가 건복 58년(636)과 정관 4년(630) 등 2가지로 기록되어 혼란을 주는 점이다. 엄밀히 말하면 건복이라는 진평왕대의 연호는 선덕여왕 3년(634)년으로 끝났다는 점, 그리고 ‘속고승전’의 편찬자가 당의 승려 도선(道宣, 595~667)이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당 태종의 연호인 정관으로 표기된 연대가 더 정확할 것이다. 따라서 원광의 입적 연대는 진평왕 52년(630), 당시 나이는 80여세로 추정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속고승전’ 원광전에서는 원광 입적 이후 그의 무덤에 얽힌 설화 한 구절을 전해 주고 있다. “그 뒤 속세 사람 가운데 죽은 태아를 낳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곳 속설에 ‘복이 있는 사람의 무덤 옆에 묻으면 자손이 끊이지 않는다’ 고 하여 몰래 원광의 무덤 옆에 묻었다. 그러자 죽은 태아의 시체에 벼락이 쳐서 무덤 밖으로 내던져버렸다. 이 일로 인하여 (원광에게) 공경의 마음을 품지 않았던 사람들도 그를 우러르게 되었다.” 

학자들은 이 설화를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하여 무시하여 왔다. 그러나 이 설화도 원광의 제자 원안이 ‘속고승전’ 편찬자에게 전해준 자료 일부로서 신빙성이 높다고 보며, 설화가 상징해주는 의미는 따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설화에 의하면 세속의 일반인에게 원광은 복이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 태아의 시체가 무덤에서 내쳐졌다는 사건은 원광이 일반인들로서는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위엄 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원광은 비록 정치권력에 예속되어 왕권을 신성화하는 역할에는 동의하지 않았고, 세속과 출세간을 넘나드는 활약을 하였으나, 진평왕과도 특별한 관계를 맺으면서 국가의 정신적 지도자로 군림하였던 엘리트불교인이었을 뿐이었지, 일반 서민들 속에 들어간 대중포교사는 아니었다. 이러한 점에서 26대 진평왕대(579~632) 원광의 엘리트불교는 다음 27대 선덕여왕대(632〜647) 왕권의 신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던 안함(安含)・자장(慈藏)의 호국불교와는 구분되며, 또한 29대 무열왕・30대 문무왕대(654〜681) 원효의 대중불교와도 구별되는 것이다. 이것은 3부류의 인물에 대한 단순한 평가의 문제가 아니고, 그들이 활동했던 3시기의 불교의 역할과 역사적 과제가 달랐던 데 기인한 것이다.

끝으로 첨언할 것은 원광의 부도(浮屠)에 관한 것으로 ‘삼국유사’에 수록된 고본 ‘수이전’에 의하면, “원광이 향년 84세로 입적하자 명활성(明活城) 서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는데, 정확한 사실로 본다. 명활성 서쪽에 조성되었다는 원광의 묘지 자리는 일반적으로 안강읍(安康邑)에 위치한 삼기산(三岐山,속칭 臂長山) 금곡사지(金谷寺址)로 추정되고 있다. 원광의 부도는 신라후기 이후의 부도와 달리 시신을 매장한 일반 분묘의 형태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에서도 당대 전기까지는 승려의 시신도 일반 분묘의 형태로 매장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한 반드시 다비(茶毗)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뒤에 그 무덤 자리에 금곡사라는 사찰이 세워지면서 그 연기설화가 생기고 동시에 원광의 행적에 산신신앙과 민속신앙 등이 덧붙여져 고본 ‘수이전’의 원광전 같은 내용의 설화가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앞에서 인용한 태아 시신을 암매장했던 사건도 그러한 분묘 형태와 관련된 것으로 본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33호 / 2020년 4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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