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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풍랑을 뚫고’

기자명 정혜진

제주 4·3사건 해원 상생 염원을 춤으로 승화

1949년 최승희가 4·3항쟁 감명 받아 처음으로 창작
1960년대 이후 사라졌다 최승희 제자 김락영이 복원
2019년 오사카서 열린 ‘4·3위령제’서 박선미가 공연

2006년 국내에 초연된 금강산가극단의 ‘풍랑을 뚫고’(사진 맨위). 박선미 공훈배우(사진 아래). 이철주 문화기획자 제공

재일조선인 1세들의 처절한 생존을 상징하는 음식이 ‘호르몬(ホルモン, 곱창)’이다. 일본인이 먹지 않아 버리던 호르몬을 가져와 1세들은 가게를 열어 척박한 환경에서도 삶을 개척해 나아갔다. 이렇게 정착하여 형성된 곳이, 지금은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오사카 츠루하시(大阪 鶴橋)의 코리아타운이다. 그러나 이곳이 생긴 배경이 우리의 슬픈 역사와 관계 깊다는 것을 많은 이들은 알지 못한다.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희생자와 그들의 가족과 후손들이 터를 잡았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뿐.

재일동포 가운데는 제주도 출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오사카는 제주도 출신의 재일동포가 일본에서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왜인가? 지금은 아름다운 휴양지로 알려진 제주도는 한때 죽음의 섬이었다. 현대사에서 한국전쟁을 제외하고 무고한 민간인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사건을 겪으며 제주도민의 8분의 1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1948년의 제주 4·3사건으로 말이다.

제주 4·3사건은 1947년 제주의 삼일절 기념 집회에 참석한 시위 군중을 향해 경찰이 발포하면서 민간인 6명이 희생당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경찰의 발포에 항의하는 도민들의 항쟁이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3만여명에 이르는 무고한 도민들이 희생됐다. 결국 수많은 도민들이 조국을 등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츠루하시에 모여, 코리아타운이 형성된 것이다. 당시 오사카 등으로 밀항한 제주도민은 최소 1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될 정도이다.

그런 오사카에 조선인들의 납골당을 두고 무연고자와 순난자들을 위해 공양을 드리고, 4·3사건의 위령제를 여는 사찰이 있다. 원효대사의 화쟁 사상을 바탕으로 한국과 조선 그리고 일본의 국적과 종파에 관계없이 불교의식과 포교활동을 통해 아시아 평화를 기원하는 통국사(統国寺)다. 이 절은 1969년에 총련계인 재일본조선불교도협회 산하로 들어가 통국사로 명명된 사찰로, 4·3의 처참한 역사를 해원하고 화합하며 교훈을 잊지 않고자 하는 사람들이 건립한 위령비가 있다. 사건으로부터 70년이 되던 2018년에 세워진 위령비 기단에는 제주도 내 170여개 마을에서 가져온 돌이 놓여 있다.

오사카에서는 1998년에 처음으로 위령제가 개최되었으나 특정된 장소 없이 회관 등을 빌려 행사를 치르다가 통국사가 부지를 제공하면서 위령비를 세우고 ‘재일본 제주4·3 희생자 위령제’가 개최되었다. 이 기림 행사에서 제주 4·3사건을 모티브로 한 춤이 공연되었다. ‘풍랑을 뚫고’가 그것이다.

효고현 출신의 조선무용가로 1981년에 금강산가극단에 입단하여 무용부장을 역임한 박선미가 인민배우 김락영으로부터 평양에서 직접 배워와 재현한 것이다. 가극단에서 솔리스트로 활동하던 그녀는 오사카조선고급학교에서 조선춤을 배우기 시작하여 평양음악무용대학 통신학부 무용안무과를 다니며, 북한의 무용가들로부터 직접 작품을 사사 받았는데 ‘풍랑을 뚫고’가 대표적이다. 

원작은 1949년에 최승희가 창작한 것으로, 그녀는 잡지 ‘조선예술’(1965년)의 기고에서 “1948년에 제주도에서 일어난 4·3항쟁을 돕기 위해 노인이 쪽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하였다는 짤막한 기사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창작 동기를 밝히고 있다. 또 “노사공이 백발을 날리며 풍랑을 뚫고 나가는 모습을 표현하며 나라와 겨레, 정의와 진리, 이 모든 참되고 아름다운 목적을 향하여 역경을 극복하고 나아가는 조선 사람의 백절불굴의 민족적 성격을 천명해 보이고자 하였다”고 안무가로서의 의도를 설명한 바 있다. 

‘노사공(老沙工)’ 혹은 ‘풍랑을 헤가르고(乘風破浪)’라는 작명으로도 공연되었던 이 작품은, 1949년 12월 북경에서 열린 아시안부인대회에서 최승희가 독무로 추어 주은래 수상으로부터 격찬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춤은 북한에서 1960년대까지는 공연되었으나 서서히 잊혀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작품이었다. 이후 최승희가 복권되고 최승희의 제자로 평양음악무용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던 김락영이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받아 복원하였고, 마침 춤의 재형상화 작업이 끝나 있던 이 작품을 김락영과의 면담 후 박선미가 전수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1999년에 공훈배우 칭호를 수여 받은 금강산가극단 세 명의 배우들을 위한 조인트 콘서트(2001년)의 독무를 준비하던 박선미 공훈배우가 무용이론 공부를 하다 접한 ‘풍랑을 뚫고’의 한 장의 사진을 떠올려 북측에 요청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원작의 곡은 ‘법성포 뱃노래’로 우리에게도 귀에 익숙한 전라남도 민요곡이다. 이 곡을 리석이 편곡하고 새로운 가사를 달았다. 주인공의 심리나 극적 상황을 무대 밖에서 불러주는 ‘방창’이라고 하는 형식의 노래는 당시 공훈배우였던 조정림이, 합창은 국립민족가극단에서 담당하였다. 김락영이 재형상한 ‘풍랑을 뚫고’ 역시 전습 당시 평양음악무용대학 소속의 원곡을 불렀던 조정림이, 편곡은 최승희의 음악을 많이 작곡했던 신영철이 맡았다. 

5분 40초 정도의 작품인 ‘풍랑을 뚫고’는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가 나며 출항을 묘사한 초장과, 귀에 익숙한 빠른 리듬의 뱃노래 합창에 맞춰 풍랑과 맞서 싸우는 노인을 묘사한 중장, 그리고 이윽고 풍랑을 뚫고 목적지인 제주에 도착하여 안도하는 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은 2006년 금강산가극단의 내한 공연 때, 박선미에 의해 한국에서 초연되었다.

반세기 만에 복원된 뜻깊은 명작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감을 깊이 느낀다는 박선미는 “이 춤이 고난을 극복해 나간다는 의지가 우리 민족 특히, 재일조선인의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래서 이 작품은 어려운 지금의 시기에도 큰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리라.

동백꽃은 제주 4·3의 영혼들이 붉은 동백꽃처럼 차가운 땅으로 소리 없이 스러져간 것을 의미하여 제주의 아픈 봄을 상징하는 꽃이 되었다. 추운 겨울 홀로 피었다가 초봄이면 떨어지는 새빨간 동백꽃의 꽃말은 ‘그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한다. 차마 전하지 못한 마지막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제주 4·3의 정신인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이 인류 보편의 가치로 만개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정혜진 예연재 대표 yeyeonjae@gmail.com

 

[1533호 / 2020년 4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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