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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편견 뛰어넘은 지혜의 음악 ‘존 케이지’

기자명 김준희

분별심 떠난 음악세계 ‘숫타니파타’ 가르침 보는 듯

음표 대신 침묵으로 연주한 ‘4분33초’의 파격적 무대 선보여
선불교·동양 철학 관심 많아 인도철학 여덟 감정 작품에 담아
버트런드 버셀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창조 충동 개발에 있어”

산치대탑_이라발용왕귀불도.

1952년 여름, 뉴욕의 한 공연장 무대에서 피아니스트가 걸어 나와 정중히 인사를 했다. 청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유명 작곡가의 새로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했다. 피아니스트는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를 펼쳤다. 그러나 피아니스트는 건반을 전혀 누르지 않고 뚜껑을 열고 닫는 것을 반복할 뿐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청중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피아니스트는 계속해서 피아노 앞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4분 33초가 흐른 뒤 피아니스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무대 뒤로 퇴장했다.

미국의 현대 작곡가 존 케이지의 ‘4분 33초’가 초연되었던 날의 모습이다. 그날 피아니스트가 가지고 나온 악보에는 음표가 하나도 없었다. 악보에는 음표 대신 각 악장의 첫 부분의 침묵을 뜻하는 ‘Tacet'과 피아노 뚜껑을 열고 닫는 지시, 각 악장의 연주 시간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텅 빈 악보의 침묵과 대비되는 객석의 소음과 여기저기 들려오는 청중들의 목소리가 그날의 연주였다. 비의도적인 상태에서 우연히 들리게 되는 소리 자체가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신선한 파격이었다. 이것은 ‘침묵’에 대한 깊은 사고와 연구가 이룩해 낸 존 케이지의 깨달음이었다. 

존 케이지는 어려서부터 음악 외에도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미술, 건축 등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쇤베르크에게 화성 이론과 작곡을 배웠지만 전통적인 작곡방법 대신에 자신만의 특별한 작곡법을 연구했다. 항상 정해진 소리만으로 음악을 만들어 내야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특별한 소리와 ‘소음’에 관한 생각에 몰두하였다. 그는 특별히 피아노에 여러 가지 도구(예를 들어 못, 나사, 볼트 등)를 장착하여 프리페어드 피아노(prepared piano, 준비된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을 고안해 냈다. 피아노 현에 장착된 다양한 크기와 재질의 도구들이 피아노의 음색과 음질을 변화시켜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의 1944년 작품인 ‘A Room’은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 미니멀리즘(minimalism) 스타일로 작곡되었다. 피아노에 볼트를 장착하고 연주하게 되는 이 곡은 4, 7, 2, 5; 4, 7, 3, 5라는 복잡한 리듬 체계(마디)에 기초했다. 맥박이 일정하게 흐르는 짧은 구성을 나타내는 것 같은 이 곡은 상당히 정적인 것 같으면서도 어떤 꿈틀거림이 느껴진다. 존 케이지의 탐구 정신과 그의 음악을 들으면 ‘숫타니파타’의 구절이 떠오른다.

‘어떤 것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분별심을 내지 말라./ 덧없는 세상에서 생존 상태에 더 이상 머물려고 하지 말라./ 깊이 생각하며 부지런히 정진하는 사람은/ ‘내 것’ 이라는 소유개념을 갖지 않는다./ 생과 죽음 근심과 슬픔을 버리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세상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라.’(제5장 피안도품 1055, 1066)

프리페어드 피아노는 가장 보수적인 악기라는 인상이 강한 피아노를 가장 진보적인 악기로 변화시킨 것이다. 연주자에 따라 다양하게 변할 수 있는 피아노의 기본적인 음색 이외에도 인위적으로 피아노의 음색과 음질을 변형시켜 새로운 시도를 만든 존 케이지는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현대음악의 화두를 던진 것과도 같다. 건반악기인 피아노가 가지고 있는 현악기, 타악기적 특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것도 큰 특징이었다.

피아노 앞의 존 케이지.

존 케이지의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위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소나타와 간주곡’이다. 모두 19개의 소나타와 4개의 간주곡으로 구성된 이 곡은 전부 연주하는데 대략 1시간이 넘게 소요된다.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위한 작품 중 가장 복잡하고 심오한 이 작품은 소나타는 각각 2부 형식(binary form)과 3부 형식(ternary form)으로 되어있고 간주곡은 조금 더 자유로운 형식으로 작곡되었다. 1946년부터 2년 여간 작곡된 이 곡은 피아노의 현에 약음기, 금속, 고무 등을 끼워 넣어 다양한 사운드와 함께 타악기적인 효과를 더욱 나타내었다. 

이 곡에서 존 케이지는 리듬의 비율을 조정하는 새로운 수준의 복잡한 기술을 보여주었다. 각 소나타에서 자연수와 분수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퀀스는 각 작품의 구조를 나타내고 있으며 동시에 개별 선율들도 일정 공간 안에서 구현되고 있다. 선불교 및 동양의 사상과 철학에 관심이 많았던 존 케이지는 이 작품을 쓰기 직전 인도철학가인 아난다 쿠마라스와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이 작품은 인도의 철학에서 볼 수 있는 여덟 가지 ‘영구적인’ 감정(해학적이고, 경이로운, 에로틱한, 영웅적인, 분노, 공포, 혐오와 슬픔)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공통적인 ‘평온한 경향’도 작품 속에 담고자 했다. 

존 케이지의 작품을 연주하기 위한 prepared piano. 

1951년에 작곡된 ‘프리페어드 피아노와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서트’의 가장 특별한 점은 ‘악보’에 있다. 존 케이지는 기존의 오선보와는 다른 도형 모양의 독자적인 악보를 만들었다. 이 곡의 피아노 악보는 그가 새로 고안한 80여개의 기호들로 가득 차 있다. 마치 차트와도 같은 이곡의 악보는 임의의 변화에 의한 우연성을 담고 있다. 이 곡은 연주자의 임의로 악보의 한 부분을 선택해 연주 할 수 있고, 독주나 다양한 앙상블 형태로 연주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곡은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위한 작품 중 피아노의 현악기적, 타악기적인 요소가 극대화된 곡이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충동이 있다. 하나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는 창조 충동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하려는 예술가의 활동이 전형적인 예이다.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를 소유하려는 소유 충동으로 무언가를 모으기만 하는 충동이다. 창조의 충동은 소유의 충동보다 우위에 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창조의 충동을 계발하고 강화하는 데 있다. 창조의 충동이야말로 새로운 삶을 여는 열쇠이다.”

존 케이지야말로 새로운 삶, 지혜로운 삶을 일궈낸 예술가일 것이다. 그의 소리와 소음에 대한 연구로부터 시작된 탐구는 ‘침묵’이라는, 음악가로서는 다소 이질적인 분야까지 그 경계를 확장시켰다. 결국 끝없는 연구에서 비롯된 시도와 변화는 ‘완전한 침묵은 없다’는 결론과 함께 음악사 뿐 아니라 전 예술사에 한 획을 그은 ‘4분 33초(1952)’의 탄생을 가져왔다. 편견과 선입견, 그리고 소유욕이 없는 그의 음악은 부처님의 말씀이 담겨있는 가장 지혜로운 음악이 아닐까.

김준희 피아니스트 pianistjk@naver.com

 

[1537호 / 2020년 5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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