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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부처님이 염불하게 한 이유

중생심의 본체는 부처님과 구별이 없다

불심을 달궈 번뇌 흩어지게 하면 청정‧순진한 마음만 남아
이런 경계 이르러야 ‘마음 그대로 부처, 부처 그대로 마음’
염불은 기운을 기르고 정신 수양하여 본래면목 참하는 법

중국 관음도량의 발원지로 알려진 보타산에 건립된 첫 사찰 불긍거관음원은 염불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중국 관음도량의 발원지로 알려진 보타산에 건립된 첫 사찰 불긍거관음원은 염불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제111칙 : 신원행 셋은 생사를 끝마치고 벗어나는 묘법이다.
 
어리석음은 지식이 조금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선악의 경계 인연은 모두 과거 숙세 업장이 초래하여 현생의 행위로 감득하는 줄 모르고 인과응보가 없고 전생과 내생 등이 없다는 허튼소리 함을 가리킨다.

일체중생은 지혜의 눈이 없어 단멸에 집착하지 않으면 곧 상주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단멸에 집착하는 자들은 사람은 부모의 기를 받아서 태어나고, 태어나기 전에는 본래 아무것도 없으며, 죽고 난 뒤에는 육신이 썩어 소멸하고 영혼도 흩어지거늘 어찌 전생과 내생이 있겠는가? 말한다. 상주를 집착하는 자는 사람은 죽어 사람이 되고 축생은 죽어 축생이 된다고 말하며, 업장은 마음이 만들어내고 육신의 모습은 마음을 따라 바뀌는 이치를 모른다. 과거 생에 극악한 사람은 현생의 몸이 뱀이 되고, 지극히 폭력적인 사람은 현생의 몸이 호랑이가 된다. 그 업력이 맹렬하게 크면 생존 시에도 그 몸이 변화될 수 있거늘, 하물며 사후에 혼식이 업력에 이끌려 그 몸이 변화되는 것이랴?  

그래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십이인연은 삼세를 관통하는 지론이다. 전생의 인으로 후생의 과보를 받게 되고 후생의 과보는 전생의 인이 있기 마련이다. 선악의 응보로 화복이 닥치는 것도 자업자득이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하늘은 단지 그의 소행에 근거하여 인과응보를 안배할 뿐이다. 생사의 순환은 끝이 없기에 본래심성을 회복하여 생사를 끝마치려는 사람은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여 서방에 태어나길 구하는 법문을 버리면 그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 탐진치 삼독은 생사에 빠지는 근본이고, 신원행 셋은 생사를 끝마치고 벗어나는 묘법이다. 저 삼독을 버리려면 이 셋을 닦아야 한다. 이 셋으로 득력하면 저 삼독은 저절로 사라진다.

제112칙 : 자신의 본분을 다하며 바깥 사물에 노닌다.

세속 일에 뒤얽혀 벗어날 수 없는 자는 세속 일에 뒤얽혔을 때 일을 떠나 구르지 않겠다 마음만 먹으면 그 뒤얽힌 일에서 벗어난다. 거울이 사물의 상을 비출 때 그 상이 와도 막지 않고 상이 가도 붙잡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이런 이치를 모른다면 세속 일을 모조리 없애, 하는 일이 전혀 없어도 여전히 산란한 마음과 망상에 단단히 뒤얽혀 빠져나갈 수 없다. 불도를 배우는 사람은 평상시 자신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 이러면 세속 일에 뒤얽혀 있어도 종일토록 바깥 사물에 노닐 수 있다. 이른 바 “일심에 머묾이 없으면 모든 경계에 한가하고, 육진을 싫어하지 않으면 여전히 정각(正覺)을 이룸과 같다.” 바로 이런 뜻이다.

제113칙 : 이치에 어긋나는 감정과 생각이 마음에 싹트지 않게 하라.

참된 앎이 드러나게 하려면 응당 일상생활 일체 행위 중에서 항상 깨달아 비춤을 일으켜야 한다. 일체 이치에 어긋난 감정과 생각이 마음에 싹트지 않게 하여 항상 자신의 마음이 공하여 한 물건도 없어야 하고, 밝고 청정하여 꿰뚫어 사무쳐야 한다. 예를 들어 경대는 바깥 경계 일체를 비추고 있어도 자신은 경계를 따라 바뀌지 않나니, 아름답고 추한 상은 상대방에게 있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바깥 경계가 닥쳐와도 미리 헤아리지 말아야 하고, 바깥 경계가 물러감에도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이치에 어긋나는 감정과 생각이 잠깐이라도 마음에 싹트면 즉각 엄하게 공격하고 다스려 남김없이 섬멸해야 한다.

제114칙 : 지혜로서 비추어 깨달아 지혜공덕의 바다를 이루라.

중생의 일념은 부처님과 구별이 없다. 단지 미혹하여 깨닫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전체 지혜덕상은 모두 번뇌업고로 변화된다. 마음은 본래 하나인데 미혹과 깨달음으로 달라서 괴로움과 즐거움으로 다르다. 그래서 일념 심성이 본래 지혜공덕의 바다인데 단지 번뇌로 인해 가려서 지혜가 비춤이 없으면 전체 번뇌업고의 바다를 이룬다. 오늘 지혜로써 그것을 비추어 깨달으면(覺照) 번뇌업고의 바다가 지혜공덕의 바다로 변화된다. 그래서 ‘화엄경’에서 말씀하시길, “일체중생이 모두 여래의 지혜덕상을 갖추고 있건만 망상과 집착으로 인해 증득하지 못하나니, 망상을 여의면 일체지(一切智)와 무애지(無礙智)가 곧 현전하느니라.”

제115칙 : 중생심은 부처님과 구별이 없어 부처님은 염불하게 하신다.

중생심의 본체는 부처님과 구별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염불하게 하신다. 부처님의 위덕과 위신력의 지혜불로써 범부의 번뇌혹업에 뒤섞인 불심을 삶고 달구어 그의 번뇌혹업을 전부 사방으로 흩어 사라지게 하고, 오직 청정 순진한 마음만 남게 하신다. 이러한 경계에 이르러야 “마음 그대로 부처이고, 부처 그대로 마음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경계에 이르지 못한 채 말함은 그 체성을 보는 것에 불과할 뿐, 사상과 역용에서 논하면 완전히 이렇지 않다.

제116칙 : 오랫동안 염불하면 불성이 저절로 드러난다.

염불은 기운을 기르고 정신을 수양하는 법이자 본래면목을 참하는 법이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소란스러워 지성으로 염불하면 일체 잡념 망상이 모두 점차로 사라진다. 소멸하면 마음은 하나로 돌아가고 하나로 돌아가면 기운과 정신이 저절로 충만하다. 그대는 염불하면 망상이 멎을 수 있음을 몰라, 잠시 염불 해보면 마음속에 망념이 모두 나타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오랫동안 염불하면 저절로 이런 망념은 사라진다. 처음에는 망념이 있음은 염불한 까닭에 비로소 마음속 망념이 드러남이고, 염불을 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다고 느낀다. 예를 들어 집 안이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다가 창구멍으로 한 줄기 햇빛이 들어오면 집 안에 미세먼지가 드러난다. 집안에 먼지는 햇빛 때문에 드러나듯이 마음속 망념도 염불 때문에 드러난다. 그러나 항상 염불하면 마음은 저절로 청정해진다. 

공자는 요순(堯舜) 주공(周公)의 도를 우러러 흠모하여 염념마다 잊지 않았다. 그래서 국그릇 속에 요 임금이 보이고, 담벼락에 순 임금이 보이며, 꿈속에서 주공이 보였다. 이러한 언제나 억념함은 염불과 어떤 차별이 있는가? 부처님께서 중생의 가슴이 번뇌혹업에 오염됨을 보면 나무아미타불의 위대한 명호로써 중생이 가슴으로 칭념하게 하신다. 향기에 물든 사람이 몸에도 향기가 있듯이 오랫동안 염불하면 업이 사라지고 지혜가 밝아지며, 장애가 다하고 복이 높아지면서 자심이 본래 갖춘 불성이 저절로 드러날 수 있다.

허만항 번역가 mhdv@naver.com

 

[1538호 / 2020년 5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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