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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무금선원 유나 영진 스님

중도·연기·무아·공이 하나임 깨달으면 고통은 사라진다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 정확히 알고 체득하는 게 수행 첫 걸음
선·교는 다른 방법 같은 길…화두만 들어서는 깨달을 수 없어
깨달음의 요체는 소멸 전·후 모습 동시에 보는 ‘중도’로 귀결

불교에서는 선과 교가 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깨달음에 접근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라는 뜻입니다. 선은 말 없음으로부터 시작해서 말 없는 곳에 이르는 길이고, 교는 말 있음으로 시작해서 말 없는 곳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 깨달음의 자리는 같습니다. 선은 차 맛을 직접 보는 것이라는 교는 차가 어떤 맛이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맛본 사람에게는 말이 필요 없죠. 내가 본래 부처임을 자각하는 것이니 설명으로는 한계가 있을 뿐입니다. 달마대사가 ‘혈맥론(血脈論)’에서 ‘여인음수 냉난자지(如人飮水 冷暖自知)라. 물을 마셔본 사람만이 몸소 차고 따뜻함을 아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듯이 아무리 설명을 해도 맛을 못 본 사람이 알아차리기는 어렵지만 맛을 본 사람에게는 설명을 더하면 확연해지는 법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불교의 세계관, 즉 중도·연기·무아·공을 이해해야 합니다. 불교적인 깨달음이 무엇인지, 역대 조사의 깨달음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 없이 그냥 앉아만 있어서 부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밑바탕이 깔려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다급할 때 무엇을 찾습니까. 주로 엄마를 찾죠. 가장 친숙하고 가까운 용어니까. 하지만 수좌라면 길을 걷다 넘어질 때에도 ‘이뮛고’가 나와야 합니다. 온 몸에 화두가 배어있어야지 갑자기 깨닫지 않습니다. 깨닫는 순간은 잠깐이지만 그 과정은 치열합니다. 오늘 말씀드리는 중도, 연기, 무아, 공이 밑바탕에 깔려있어서 자다가 일어나더라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가 돼야 합니다. 

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종교입니다. 부처님께 귀의할 때 ‘귀의불 양족존’이라고 하죠. 두 가지를 갖추신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뜻이죠. 그것이 지혜와 자비입니다.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새의 양 날개와 같습니다. 무엇이 앞이고 무엇이 뒤라고 할 것도 없고, 무엇이 더 크고 무엇이 더 작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완벽하게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지혜의 완성은 수행을 통해 이뤄지지만 수행의 완성은 곧 자비의 실현, 자비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간화선이라고 해서 다른 세계관이나 가치관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간화선은 바로 이 자리에서 깨달음을 실현하는 방법이기에 탁월한 것이지, ‘깨침의 경지’가 다른 것은 아닙니다. 간화선은 바로 이 자리에서 연기법을 보여주고 그것을 체험하는 수행법입니다. 

연기법은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이라.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볼 때 연기법에서 자유로운 것은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창조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유일신에 의한 창조를 말하는데 창조했기 때문에 태초가 있고 태초가 있기 때문에 종말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불교는 ‘무시무종(無始無終),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합니다. 윤회·순환하기 때문입니다. 서양사상의 시작이 ‘1’이라면 동양사상의 시작은 ‘0’입니다. 순환하는 것이지 시작과 끝을 나눌 수 없다고 합니다. 시작과 끝을 나눌 수 있는 가르침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태초가 있고 종말이 있어서 종말론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만물은 순환합니다. 꽃도 지난해 피었던 꽃이 올해 다시 핍니다. 연기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앉아계신 안심당을 보세요. 수많은 목재가 모여서 안심당을 이루고 있죠. 조립하기 전에는 집이라고 안 하죠. 그럼 이 집을 이루고 있는 진짜 주인공은 무엇일까요. 대들보도 아니고 서까래도 아닙니다. 대들보가 없이는 서까래가 없고 서까래가 없이는 집이 될 수도 없으니까요. 그 가치는 동등합니다. 여러분이 여기 오실 때 차를 타고 오셨죠. 자동차 부속이 4만여 개라는데 그 부속이 모두 중요하지 이것이 첫째 이것이 둘째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엔진이 중요하다고 해도 운전대 없이는 조정할 수 없고, 바퀴가 없으면 굴러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 가치는 동등한 것입니다. 연기라는 것은 이처럼 홀로 존재하지 않고 반드시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연기는 공과도 연결돼 있습니다. 공은 없다는 것이 아니고 비어있다는 뜻입니다. 비어있기 때문에 연기가 가능합니다. 꽉 차 있다면 연기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공’의 개념을 자꾸 ‘무(無)’로 해석합니다. 그러다보니 불교를 잘못 알면 허무주의, 염세주의로 빠집니다. 하지만 결코 아닙니다. 불교는 가장 적극적으로 인연을 만들어가는 종교입니다. 인도의 ‘공’ 개념이 중국에 없다보니 공을 무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면서 공의 개념이 줄어들었지만 사실 공의 개념은 무보다 훨씬 큽니다.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죠. 하지만 공기도 있고 수분도 있고 전기도 흐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공은 모양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진공묘유(眞空妙有)’라. 공을 위해 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양을 떠난 자리, 말을 떠난 자리에 진실로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진공과 묘유를 함께 이야기했으니 또한 중도입니다. 진공은 없다는 생각이고 묘유는 있다는 생각이니 있고 없음을 떠난 자리가 중도입니다.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1과 10의 사이는 5가 아닙니다. 이 중도에 대한 바른 견해를 세우는 것이 오늘 여러분의 공부입니다. 팔만사천 모든 가르침이 중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아는 무엇일까요. 부처님 당시의 대도시인 바라나시에는 수미산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갠지스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수미산의 눈 녹은 물이 흘러 바다까지 이어집니다. 성산으로 여겨지는 수미산에서 흘러내린 물이기에 성수라 여기고 그 주변으로 인도 전역의 종교인들과 사상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부처님이 혈혈단신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속에서 논쟁으로 외도들을 굴복시키고 최고의 사상가·종교인으로 우뚝 섰습니다. 당시 인도에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인도에서 ‘범(梵)’은 우주를 주재하는 신을 뜻합니다. 이 범과 ‘아(我)’가 하나다. 우주를 주재하는 신과 내가 같다는 것이 당시 인도의 중심사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도하신 부처님은 바라나시에서 ‘무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전부 아가 있다고 했는데 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공이기 때문입니다. 또 무아는 연기와도 연결됩니다. ‘홀로 독립된 나는 없다’입니다. ‘연기한다’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무아설입니다. 나에게 집착하는 순간 고통이 옵니다. 내가 있는 순가 상대가 있습니다. 상대적인 세계로 차별하게 됩니다. 하지만 부처님이 본 세계는 차별 없는 세계입니다. 하나입니다. 꽃이 피고 지며 변화할 뿐이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아 역시 독립된 나, 다른 존재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나는 없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의 나, 군대 갔을 때의 나, 지금 여기 앉아있는 나는 모습만 다를 뿐이지 같습니다. 그러니 연기·무아·공·중도는 말만 다르지 같습니다. 그리고 연기·무아·중도·공을 하나로 말할 때 ‘중도’라 합니다. 이것이 불자의 올바른 세계관입니다. 이 세계관이 저변에 깔려 있고 부처님이 깨달으신 내용도 이것임을 확연히 알아야 합니다. 

물을 보세요. 물은 액체지만 얼면 고체고 증발하면 기체입니다. 모양만 바뀔 뿐이지 하나입니다. 물이 증발했다고 없어집니까. 질량은 불변하니 모양이 변했다고 해서 질량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는 시간과 열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결국은 한 모습입니다. 땅에 있으면 물이라 하고 증발하면 기체라 하고 허공에 떠있으면 구름이라고 합니다. 무거워져 땅으로 다시 내려오면 비고 얼면 얼음입니다. 눈, 서리, 이슬이라고도 합니다. 물의 본성은 젖어드는 것이지만 그 모습은 수시로 바뀐다는 것을 동시에 보는 것이 중도입니다. 소멸되었을 때 모습과 소멸되기 이전의 모습을 동시에 보고 여기에 차별이 없는 안목, 이것이 중도입니다. 그러니 중도를 체득하면 고통이 사라집니다. 죽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지만 그 모양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중도의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해의 바탕 위에서 수행이 이뤄져야 합니다. 하지만 화두를 잡는다고 해서 다른 것을 무시하거나 부처님의 말씀을 등한시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계율은 부처님의 행위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닦아야 할 세 가지 수행을 계정혜(戒定慧) 삼학이라 합니다. 계는 그릇과 같습니다. 정은 그 그릇에 담긴 물입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그릇을 깨끗이 닦는 것입니다. 깨끗한 그릇에 고요하게 물이 담겼을 때 밝은 지혜가 비춥니다. 셋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셋이니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를 잘 이해해서 늘 수행하시는 불자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서울 조계사 참선 전문 수행기관 선림원이 진행한 ‘간화선의 이해와 사상’ 교육과정 중 백담사 무금선원 유나 영진 스님이 5월13일 강의한 내용 일부를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1540호 / 2020년 6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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