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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지유 스님 하안거 결제법어

  • 교계
  • 입력 2020.06.11 19:58
  • 수정 2020.06.12 17:02
  • 호수 1541
  • 댓글 0
지유 스님.
지유 스님.

오늘 드디어 하안거 결제 날이 당도했습니다. 왜 제가 새삼스럽게 이러한 말을 하는가 하면 금년에는 지난 2월부터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퍼져서 국가적으로도 그렇고 불가에서도 그렇고 모든 행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부처님오신날까지 하느냐 못하느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다행히 국민들이 질서를 잘 지키고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고 해서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한 달 연기하여 윤 음력 4월 8일에 치르게 되었습니다.

금년 결제도 하느냐 못하느냐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말로 전염되는 상황에 가장 위험한 것이 밀폐된 공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밀집, 또 가까이 접하는 밀접이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호흡해야 하고, 바이러스 균은 눈에 보이지 않고 돌아다니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그런 상황을 피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결제를 하게 되면 대중이 모이게 됩니다. 또 밀폐와 밀접의 상황에 놓이기 때문에 논의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국민과 대중이 워낙 질서를 잘 지킨 덕분에 결제는 해도 좋다, 대신 결제를 하더라도 밀폐된 공간, 많이 모이는 밀집, 밀접한 상황을 피하기로 하였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여름이니까 좌선을 할 때도 창문을 다 열어 놓고, 거리도 띄우고, 가능하면 사람이 대면하지 않는 것을 지키며 각자 마음을 먹은바 공부에 열중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험악하고 병이 유행을 하더라도 우리가 근본으로 하고자 하는 각자 자기 수행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물론 금년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지만, 각자 출가해서 불문에 들어왔다고 하면 반드시 새겨야 할 기본이 있습니다. 이 근본은 어제 들어온 사람도, 10년, 20년, 30년, 오랜 세월이 지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불문에 들어와서 오랜 세월을 보낸 사람이라면 보는 것도 많고 들은 것도 많고 느낀 것도 많을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자칫 잘못하면 기본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불문에 들어오기 전에는 불법이 무엇인지, 또 부처님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불문에 들어와 보니 가장 기본이 “심시불(心是佛)”이라고 합니다. 즉, “부처가 무엇인가, 부처는 바로 마음이다.”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분은 없으실 겁니다. 듣지 못한 분도 없을 겁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 부처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도대체 부처님이라고 하는 분이 어떤 분인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이 부처님이라는 말인가?’ 하고 궁금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은 어떤 선지식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어떤 것을 부처라고 합니까?”
그랬더니 선지식의 대답은
“심시불, 마음이 바로 부처다.”
그 말을 듣고 바로 깨달았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어디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사람 외에 특별한 존재가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마음이 부처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소리를 수없이 들었지만 지나가는 소리로 흘려 버립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린 이분은 선지식의 딱 한 마디를 듣고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수없이 들었고, 수없이 책자를 통해서도 보았는데 왜 이것을 그냥 넘어간 것입니까?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참선한다, 주력한다, 염불한다, 독경한다, 물론 그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배고플 때 밥 먹어야 하고, 목마를 때 물 마셔야 하고, 예불 시간에는 예불해야 합니다. 공양할 때는 대중이 함께 참석해야 하고, 울력할 때는 다 같이 울력하는 것처럼, 일상생활을 남과 똑같이 합니다.

그런데 가장 기본이 무엇이냐, 심시불, 마음이 부처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는 모른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각자 마음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마음이라고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형태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보려고 해도 볼 수 없고 귀를 기울여도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코로 마음에 어떤 냄새가 나는가 하고 맡아보아도 냄새도 없습니다. 어떤 맛이 있는가 하고 마음을 맛보려고 해도 맛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이름만 마음이라고 했지 있지도 않은 것을 마음이라고 하는가? 이렇게 생각하기도 할 겁니다.
마음은 형태와 모양이 없기에 눈으로 볼 수 없고, 형태와 모양이 없기에 두드려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깥에 물체가 있고, 바깥에 소리가 나고, 바깥에 냄새가 나고, 바깥에 맛이 있다는 것은 오직 마음만이 알 수 있습니다. 마음 자체는 맛이 아니고 소리도 아니고 냄새도 아니고 빛깔도 아니지만 각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러쿵저러쿵 생각하고 있는 존재가 누구입니까? 소리가 나자 이 소리가 무슨 소리인가, 종소리구나, 예불 때가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자체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마음을 깨달았다고 해서 없던 마음이 새로 생기고 마음을 깨닫지 못했다고 해서 도망가는 일은 없습니다. 깨달아도 마음이고 깨닫지 못해도 마음입니다. 하지만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해야 하는지 저렇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상생활 속에 이랬다가 저랬다가 만족대로 되지 않고 감정과 욕심대로 항상 불안하고 고통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마음입니다만, 깨달은 사람은 그 고통 속에 살던 자기가 마음 하나 깨달음으로서 지금까지 고통에 사로잡힌 것이 삽시간에 없어집니다. 깨닫지 못하면 고통 속에 묻혀 있고, 깨달은 사람은 그것을 다 밀어내어 버렸습니다. 깨달아도 깨닫지 못해도 똑같은 마음입니다. 깨달아도 바깥에 종소리가 나면 종소리가 난 줄 압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 심지어 축생, 미물, 곤충까지도 바깥에 소리가 나면 똑같이 압니다. 그 아는 자체가 마음입니다. 옛 선사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화두를 들고 열심히 열심히 힘을 다하고 노력해도 깨닫지 못했던 것이 갑자기 바깥에 쿵 하는 종소리를 듣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런 소리를 여러분은 수없이 들으셨을 겁니다. 한번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렇게 목탁을 치면 목탁 소리인 줄 아시잖아요? 종을 치면 종소리인 줄 압니다. 종소리를 들으면 종소리인 줄 알잖아요? 그것이 누구입니까? 남입니까? 귀신입니까? 다른 부처님입니까? 아닙니다. 나 자신입니다. 소리 나기 전에도 있었고, 소리는 사라져서 없어지더라도 이 마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심시불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 너도, 나도, 사람, 축생, 벌레도 모두 똑같이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은 종소리가 나자마자 이러쿵저러쿵, 좋다, 나쁘다, 좋으면 취하고 나쁘면 버리는 취사분별로 마음이 산란합니다. 그래서 어지럽고, 어지러우니까 피곤해서 혼침에 빠져 버립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알기는 아는데 소리인 줄 알고, 빛깔인 줄 알고, 맛인 줄 알면서 온갖 사량분별 속에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원한 맛이 하나도 없습니다. 피곤하다고 해서 잠에 빠져 버리면 그렇게 편안할 수 없지만, 그것은 혼침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일상생활에 눈만 뜨면 이 생각, 저 생각을 합니다. 피곤하면 잠에 빠지고, 이것이 1년 365일, 10년, 100년 동안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마음을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했지만, 불생불멸의 마음이 혼침과 산란에 묻혀 버리니까 근본의 자기 본래 갖추고 있던 힘이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고 결국 그것이 생로병사에 늙고 병들어 죽는 원인이라고 했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종소리를 듣자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했구나, 하고 싹 쓸어버리니까 소리가 났다고 해서 산란하거나, 어떤 물체가 보인다고 해서 괴롭거나, 그러한 것이 없습니다. 이런 것이 사람마다 갖추어져 있어서 “심시불이니라.” 하고 깨달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리는 심시불뿐만 아니라 온갖 법문, 부처님 경전, 게송 등 외우지 못하는 게 하나도 없을 정도이지만 그렇게 머릿속이 복잡합니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 마음을 자기 속에 놔두고 있으면서 깨닫지 못한 것은 마음이 바깥으로 향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든 생각을 다 집어 던져 버려라,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 “백척이나 되는 장대에서 마지막 끝까지 나아갔는데 거기에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가라.”고 했습니다. 나가면 죽는다? 죽어야지요. 크게 한바탕 죽으면 크게 산다고 하였습니다. 마지막까지도 못하고 있던 걸 모두 놓았을 때, 그때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본래면목이 무엇이겠습니까? 종소리가 나면 종소리인 줄 알고, 찬 것이 오면 찬 줄 아는 것이 본래면목이지 어디 멀리 있다가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아, 본래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그렇지요?

옛 선사의 말씀에도 ‘지도무난(至道無難)’이라, 도(道)는 어려운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것이 없다고 하지만 좋다, 나쁘다, 취사분별을 하다 보면 도 속에 있으면서도 도의 혜택을 보지 못한다, 그러한 점만 털어버리면 환하게 열린다, ‘신심명(信心銘)’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옛날에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주장자를 들면서,
“이 소식을 아느냐?”
들어보셨지요? 그리고는 다시 ‘탁’ 치면서
“이 소리를 아느냐?”
그런데 거기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 물건을 들면 누구든지 무엇을 들었는지 압니다. 바로 그놈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도 못 알아듣기 때문에 죽비로 탁탁 치는 것입니다. 물건에 무엇이 있고 죽비에 무엇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건을 들었으면 물건 들은 줄 알고 있는 각자 자기 마음, 소리가 나면 소리인 줄 알고 있는 그 마음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래서 선사의 법문은 “내가 이 법상에 오르기 전에 설법해 마쳤느니라.”하고 내려갑니다. 그 말씀이 이해되시지요? 오르고 난 후에 아는 것이 아니라, 오르기 전에도 촛불이 켜져 있고, 전등불이 켜져 있습니다. (말을 하고 하지 않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합니다. 그 복잡한 것을 다 집어던지시기 바랍니다. 모든 생각은 집어던질 수 있지만, 집어던지는 그 마음은 생각이 생겨났다고 해서 같이 생기거나 생각이 사라졌다고 해서 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나든 말든 관계없이 불생불멸입니다.

오늘은 오래 법문하면 안 된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수심결(修心訣)’의 한 구절을 설명하고 내려가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우리가 공부를 하는데, 어떤 식으로 공부를 해야 합니까? 무슨 방편을 지어야 한 생각을 돌이켜서 문득 자기 자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답이,

“네 스스로 마음인데 거기에 무슨 방편이 필요한가? 만일 어떤 방편을 지어서 깨달음을 구하고자 한다면,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자기 눈으로 자신의 눈을 보지 못하고는 자기 눈이 없다고 생각하고 눈을 찾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미 자기 눈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보이는 것이 자기 눈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아, 나에게 있었구나. 있는 것도 모르고 새삼스럽게 보려고 했던 것이 잘못이구나.’ 이렇게 자기에게 본래 있는 줄 알았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눈을 본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새삼스레 눈을 보려고 할 생각이 있을 리가 없고 보지 못한다는 생각도 있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이미 자기의 마음인데 그것을 어떻게 알려고 하는 것입니까? 보십시오. 이미 자기 마음입니다. 소리가 나면 소리인 줄 압니다. 이렇게 (손을) 흔들면 흔드는 줄 압니다. 그렇게 잘 알고 있는데 그 이상 무엇을 더 알려고 합니까? 만약 알려고 애를 쓴다면 골치만 아픕니다. 알 수 없습니다. 눈을 보려고 애를 써보십시오. 눈이 봐 집니까? 애를 쓸수록 눈병만 걸릴 뿐입니다. 눈을 보지 못하는 줄 알면 그 사람은 눈을 아는 사람이라고 하듯이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줄 알면 그것이 바로 자기 마음을 깨달은 사람, 시즉견성(是卽見性)이라, 알 필요가 없는데 이 이상 어떻게 알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이야기를 더 하고 싶은 것이 많지만 다음 기회 있을 때 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6월6일 금정총림 범어사 보제루에서 봉행된 ‘불기 2564년 하안거 결제 법회’에서 방장 지유 스님이 설한 내용입니다.

 

[1541호 / 2020년 6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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