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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고려시대 불사리 신앙의 몇 가지 예들

고려, 불사리 봉안해 왕실안녕·국운융창 발원

정종, 개국사에 불사리 봉안하기 위해 십리길 걷는 이례적 행차  
공민왕, 노국공주 추모 위해 불사리 궁내로 맞아 법회 봉행 
고려 왕실 불사리 봉안 전통 조선으로…이성계는 연복사에 모셔

연복사탑 중창비. 권근이 지은 ‘연복사탑 중창기’를 새긴 비석. 1910년 개성 연복사에서 서울 용산의 철도구락부로 옮겨졌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고려 왕실의 전통에 따라 불사리를 봉안한 내역이 담겨 있었다.
하남 하사창동 백제 목탑지. 백제 초기의 사찰 천왕사가 자리했던 하사창동에 남아 있는 목탑지다. 고려 공민왕이 가져와 왕륜사에 봉안했다는 불사리는 이 목탑지에서 얻은 것일 가능성이 있다.

고려가 우리 역사에서 불교가 가장 성했던 시기이기는 했어도 사리신앙에 관한 한은 정보의 밀도가 그다지 높지 않고 빈 칸이 많아 아쉽다. 역사 자료의 많고 적음과 역사의 이해도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료의 부족이 정밀한 연구에 걸림돌이 되기는 한다. 그래도 몇몇 장면들을 통해 고려시대 불사리 봉안의 흐름을 살필 수 있는 건 다행이다. 특히 고려 왕실에서 불사리 봉안에 유난히 비중을 두었던 모습이 눈에 띤다. 

고려가 건국한지 30년이 지난 948년, 정종(定宗)이 궁궐을 나와 지금의 개성시 독암동 탄현문(炭峴門)을 지나 걸어가는 행차를 사람들이 모여 지켜봤다. 정종이 직접 개국사(開國寺)에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걸음이었다(‘고려사절요’ 2, ‘정종문명대왕’조). 궁중에서 개국사까지 십 리나 되는 먼 길이었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어느 시대 어떤 왕조이든 왕이 공식적으로 궁 바깥으로 걸어 나가는 일은 아주 드물다. 정종이 고려의 임금들 중에서도 손꼽을 만한 호불(好佛)의 군주기이기는 해도 이 불사리 봉안 행차는 아주 이례적이라고 할 만 했다. 

개국사는 태조가 창건한 사찰이라 후대 왕들은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곤 했다. 그런데 당시 정종은 서경 천도, 곧 개성에서 평양으로 서울을 옮기려 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해 권위에 적잖은 타격을 입었을 때였다. 따라서 이 행차에 어떤 정치적 고려가 깔려 있었을지 모른다. 설령 그렇다 해도, 궁을 나와 불사리를 소중히 가슴에 품고서 걸어가는 왕의 모습을 지켜본 백성들이 크게 감격했을 것은 분명하다. 이후 조야에 불사리를 예경하는 사람들이 급증했다. 그런즉 정종의 불사리 봉안은 고려에서 사리신앙이 번성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약 400년이 지난 1366년, 공민왕(恭愍王)은 그 한 해 전 죽은 왕비 노국공주를 추모하기 위해 특별한 불사리 봉안 행사를 가졌다. 광주(廣州) 천왕사(天王寺)에 있던 불사리를 궁내로 맞이해 법회를 연 다음, 개성 송악동의 왕륜사(王輪寺)에 다시 봉안하는 행사였다. 천왕사는 하남시 하사창동에 있던 대찰로, 고려 철불 중 가장 큰 ‘광주 철불’(보물 332호, 국립중앙박물관)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사역(寺域)에는 백제 목탑지가 있는데, 공민왕이 봉안한 불사리가 바로 이 목탑지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또 왕륜사는 고려 태조가 창건한 10찰 중 하나로, 공민왕의 이 불공 이후 다시금 융성하게 되었다. 

궁중에서 열려 문무백관이 모두 참여한 불사리 봉안식에는 공민왕에 이어서 승려 신돈(辛旽)이 배관하고, 여러 관리들도 지위의 고하에 따라 차례로 불사리를 경배했다. 화려한 복장을 하고서 왕 옆에 나란히 앉은 신돈의 오만한 행동이 뭇 신하들을 분노케 했지만(‘고려사절요’ 28 ‘공민왕 3’), 당시 왕실이 불사리 봉안 행사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가 잘 나온다. 공민왕은 즉위 초기부터 약 100년 전부터 이어져온 중국 원나라의 내정간섭을 뿌리치고 부국강병에 힘쓰며 꺼져가던 국운을 되살리려 노력한 개혁군주였다. 하지만 사랑하는 부인 노국공주의 죽음은 그를 실의에 빠트렸고, 불사리를 봉안해 왕비의 극락왕생을 기원한 이후에는 궁중 깊숙이 침잠한 채 세상과 멀어졌다. 그 뒤로 고려 왕실의 불사리 봉안도 더 이상 열리지 않았으니 쇠잔해가는 고려 국운의 잔영과 묘하게 겹쳐진다.

중국과 고려의 왕실 간에 불사리가 오가기도 했다. 1333~1370년 무렵 원나라 순제(順帝)가 고려에 불사리와 무진등(無盡燈) 등을 보내자 고려 왕실은 이를 금강산 장안사에 봉안했다. 300년이 지난 1631년, 동양위(東陽尉, 명예직 벼슬) 신익성(申翊聖)이 금강산 장안사에 가서 이를 보고는 “참으로 기이하구나!”하고 감탄하였다(신익성, ‘유금강소기’). 신익성은 부마(駙馬, 임금의 사위)였기에 왕실 일원이다. 고려 왕실에서 봉안한 불사리를 300년이 흐른 훗날 조선 왕실의 한 사람이 찾아본 인연이 심상해 보이지 않는다.

고려 왕실의 불사리 봉안 전통은 조선에까지 이어졌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1392년 그 해에 개성 연복사(演福寺)에 비로자나불상과 대장경을 안치하고 불사리를 봉안했다(권근, ‘연복사탑 중창기’). 이 사실을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 이유는, 조선은 전대와 달리 불교가 억눌리던 사회였지만 태조의 이 불사리 봉안 고사로 인해 사찰을 중심으로 한 사리 신앙이 어느 정도 인정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만 불사리를 얻는 일이 극히 어렵게 되어 승사리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을 뿐이다. 

한편,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왕실 및 사찰에 이어 일반인도 불사리 봉안의 새로운 주체로 참여했음이 박쇄노올대(朴瑣魯兀大)의 일화에 보인다. 그는 고려 사람인데 어렸을 때 원나라로 보내어져 황궁의 내시가 되었고 높은 벼슬까지 얻었다. 몸은 원나라에 있지만, 마음은 고국에서 멀어지지 않아서 지금의 하남시 항동 금암산에 있던 신복선사(神福禪寺)가 중수될 때 힘을 보탤 만큼 평소 고향과의 연결 끈을 놓지 않았다. 돈독한 불자인 그는 ‘사리가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것은 공경하는 사람의 정성에 따른 것’이며, ‘자그마한 불사리 하나라도 얻어서 공경히 공양하면 한량없는 복덕을 반드시 받는다’라고 믿었다. 그래서 1350년 무렵, 대중이 불사리의 공덕을 입을 수 있도록 자신이 힘들게 얻은 불사리를 대도(大都, 지금의 북경)의 곡적산 영암사(靈巖寺)에 봉안했다. 간혹 이 영암사를 국내의 절로 알고 언급하는 글이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여하튼 비록 고려 땅이 아니라 원나라에서의 일이었지만 이 소식은 금세 알려져 문인 이곡(李穀)이 ‘곡적산 영암사 석탑기’를 써서 특기할 만큼 당시 고려 사회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불교가 크게 억눌렸지만 소규모이나마 사찰을 무대로 한 개인의 사리 신앙은 오히려 확대되었다. 그런 면에서 박쇄노올대가 개인 자격으로 발원해 불사리를 봉안한 것은 사리 신앙의 역사에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신대현 능인대학원대학 불교학과 교수 buam0915@hanmail.net

 

[1541호 / 2020년 6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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