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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흙무더기 속에서 피어난 대각의 꽃 용성 선사의 발원

기자명 고명석

“보리의 꽃, 이웃과 고통 함께할 때 향기 발하니”

계모 지나친 학대 속 출가자의 삶 동경하다가 청소년기에 출가
자각각타의 깨달음 일깨우고 펼친 대각교 운동으로 희망 제시 
경전번역과 찬불가 보급, 현대적 의례로 전법의 장 새롭게 펼쳐

용성 선사는 어린이 포교를 위해 찬불가를 직접 작곡하기도 했다. 사진은 용성 스님의 풍금.
용성 선사는 어린이 포교를 위해 찬불가를 직접 작곡하기도 했다. 사진은 용성 스님의 풍금.

“우리 부처님의 도는 원융무애하여 이것과 저것이 없으며, 친근함과 소원함도 없으며, 귀하고 천함도 없으며, 현명하고 어리석음도 없다. 사성(四姓)의 어느 계급에 속한 사람도 도에 들어오면 동일하고 평등하다. 그러니 어찌 금이나 옥 때문에 모든 흙이나 돌을 버릴 수 있겠는가? 영리한 자는 쉽게 통달하고 아둔한 자는 많이 막힐 뿐이다.”(신규탁 번역)

1910년 용성 선사는 위 내용이 담긴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쓴다. 귀원정종이란 근원으로 돌아가는 바른 종교로 풀이할 수 있겠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전에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주로 산중 사찰에서 선방을 개설하고 선회를 열었다. 선을 통해 불법의 정맥을 이어나가겠다는 그의 원력이 작용한 탓이다. 그가 ‘귀원정종’을 쓰게 된 동기는 유교나 기독교의 불교 비판이나 반종교적 사회사조에 맞서 불교가 왜 가장 뛰어난 종교인지를 밝히면서 불교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함이었다. 이와 관련 그는 근대 초기의 불교가 흡혈적 종교, 사기적 종교, 기생적 종교로서 아편 독과 다르지 않다는 비판에 맞서 불교를 쇄신하고 개혁하고자 했다. 산중불교에서 도심불교, 소비불교에서 생산불교로, 한문불교에서 우리말 불교로, 밖을 따라가는 맹목적 종교에서 안에서 찾는 자각적 종교로 불교를 혁신하고자 한시도 쉬지 않고 치열하게 삶을 불사른 근대 한국불교의 선지식이다.  

용성(1864~1940)은 전북 장수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계모의 지나친 학대와 푸른 솔처럼 청정한 출가자의 삶에 대한 동경으로 청소년 시절 출가한다. 16세 때, 고운사 수월영민 스님으로부터 주력수행을 지도받은 뒤 천수주와 육자진언으로 업장을 소멸하고 이후 23세 때 낙동강을 건너다 깨닫는다. 그는 천지창조 이전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귀원정종’을 도심에서 구현하고자 서울로 발걸음을 옮긴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삶의 현장에서 불법을 제대로 세우고 세상을 바꾸자는 것이었다. 산사에서 아무리 선 도리를 말해도 들을 사람이 없으면 별무소용이지 않은가. 

1912년, 그는 나이 49세 때 서울 대사동(大寺洞)의 조선불교임제종중앙포교당(朝鮮佛敎臨濟宗中央布敎堂) 개교사장(開敎師長)을 맡으며 도심포교에 뛰어든다. 그는 일요일마다 법좌에 올라 설법했다. 그 결과 도심에 참선이란 명칭이 생겨났고 입교자가 80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16년 종로 봉익동에서 ‘대각사’를 창건한고 매주 선어록 강좌를 열고 참선모임을 만들어 나간다.

1919년 용성은 만해 한용운과 더불어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해 조선 독립을 외친다. 그는 3년간 옥중에서 생활한다. 옥중 생활 속에서 그는 기독교인들이 조선글로 된 성경을 읽고 예배드리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래서 용성은 옥중에서 한문 경전을 조선글로 번역하겠노라고 원을 세운다. 출옥 후 1921년 8월경에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경전번역에 진력한다. 그 결과 ‘화엄경’ ‘금강경’ ‘능엄경’ ‘대승기신론’ 등을 우리말로 번역한다. 이는 이해하고 체득하는 불교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이 역시 ‘귀원정종'의 일환이었으리라.

1925년에 들어 그는 망월사에서 만일참선결사회(萬日參禪結社會)를 열어 모범적인 수행결사를 도모한다. 활구참선(活句參禪), 견성성불(見性成佛), 광도중생(廣度衆生)를 목표로 삼았다.

“마치 물의 근원이 완연하여 진실로 도도한 장강의 파도가 만리와 같으니 우리 종(宗)도 또한 그러하므로 선종 본사는 청정한 산간에 건조(建造)하여 도인을 양성하고, 선원 포교당은 각각 도시 가운데 설치하여 천하의 대중으로 함께 이익을 얻게 할지로다.”(‘만일참선결사회 창립기’)

용성은 이때 활구참선 발원문을 짓는다. 그 주요 내용을 보자.

“중생이 지은 업이 무량하여서 망망고해 벗어날 기약이 없어 이를 가엾게 여겨 보리심을 일으킵니다. 광겁이 다하도록 부모 육친이 삼계의 고통바다 늘 출몰하고 육도를 왕래하니 고통이 한량없어 이를 가엾게 여겨 보리심을 일으킵니다. 사생과 육취세계 모든 중생이 약육강식에 원한이 쌓이고 깊어 이를 가엾게 여겨 보리심을 일으킵니다. 제가 지금 복 없고 능력도 없어 뜻과 원력은 크고 역량은 작지만 분심을 일으키어 용맹스럽게 서원을 세워 지장보살 대원행처럼 중생제도 맹세합니다. 미미한 정성으로 지금 설립한 참선결사가 한 표주박의 물로 불타는 산을 끄는 것과 같으나 문수보살 대지혜처럼 우리 지혜 광대해지고 비로자나 대원해에서 보현 관음 언제나 벗으로 삼겠습니다.”(‘백용성대종사 총서’ 용성선사 어록)

용성은 한국불교가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대처식육(帶妻食肉)에 빠져들자, 이를 폐해달라는 건백서를 총독부에 두 차례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1926년 대각교(大覺敎)를 창립한다. 계율정신을 망각한 총독부 지배하의 기존 불교로는 희망이 없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대각이란 무엇인가? ‘대(大)’란 깨닫는 주체와 깨달은 내용을 떠나 모든 상대를 끊음이요, ‘각(覺)’이란 나도 깨닫고 남도 깨우쳐 원만하고 걸림이 없음이다. 이 대각은 사람마다 갖추고 있는 것으로 마치 발아래 청풍(淸風)이요, 눈앞에  명월(明月)과 같다고 그는 말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 길을 열었으며 선적 주체자들이 그 길을 갔다. 그런 의미에서 이 대각교 운동은 인간이 스스로 깨달음의 주체가 되어 보살로 살아가자는 자각적 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용성은 또한 우리말로 ‘대각교 의식’을 편찬한다. 여기에는 우리말 반야심경, 혼례, 병인간호, 찬불가 등의 현대적 의례문과 더불어 우리말 발원문도 실려 있다. 그는 1928년 일요학교를 개설하여 6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풍금을 치며 어린이·청소년들과 어우러진다. 함양에 화과원(華果院)을 만들고 두만강 건너 연변에 대각교를 세워 선농불교와 생산불교를 지향하며 신도들의 자급자족적 생산활동과 자력갱생을 도왔으며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한다.

용성은 잡초 속에 산삼이나 영지 같은 영약이 있고 흙더미 돌무더기 속에 금이나 옥 같은 진귀한 보배가 있다고 했다. 고통에 시달리는 슬퍼하는 자의 삶의 현장에서 대각이 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뭇 사람들을 위해 보리심을 발한다. 보리의 꽃은 타자의 고통과 함께할 때 향기를 발하기에.

고명석 불교사회연구소 연구원 kmss60@naver.com

 

[1542호 / 2020년 6월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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