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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레자 달반드의 ‘검은 무엇’

기자명 박사
  • 박사의 서재
  • 입력 2020.06.23 13:33
  • 수정 2020.06.23 13:36
  • 호수 1542
  • 댓글 0

‘여실지견’ 때까지 찬찬히 들여다보라

밤에 뱀인줄 알았던 새끼 대신
그 자리에 갖다놓은 ‘검은 무엇’
지레 짐작하고 배척하는 원인
학살도 무지한 편견이 시발점

‘검은 무엇’
‘검은 무엇’

여실지견,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함을 역설할 때 새끼줄과 뱀의 비유는 꽤 적절하다. 한 사람이 밤길을 걷다가 무엇인가 뭉클 하고 밟았는데 기다란 실루엣이 영락없이 뱀이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간 사람은 다음날 날이 밝고서야 그놈의 정체가 궁금하여 단단히 채비를 하고 그 자리로 돌아온다. 허탈하게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은 평범한 새끼줄이었다. 가늘고 길다는 공통점 때문에 그 사람은 제멋대로 혼비백산 했던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면 놀랄 일도, 불안할 일도, 고통스러울 일도 없다. 있는 그대로 보면 오해할 일도, 불편해질 일도, 싸울 일도 없다. 부처님이 “나는 싸우지 않는 법을 가르친다”고 하신 이유는 이런 뜻이다. 그러나 여실지견은 쉽지 않다. 삶의 경험을 통해 알 만큼 겪은 사람들도 여전히 자신의 색안경과 지레짐작에 기대어 끊임없이 상상하고 판단하고 주장한다. 새끼줄을 뱀이라며, 그게 아니고 소세지라며, 정원호스를 잘못 본 거라며 박박 우기고 산다.

이란에서 태어나 테헤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작가인 저자는 새끼줄 대신 ‘검은 무엇’을 그 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색색으로 가득 찬 울창한 숲속 작은 공터에 검은 무엇이 떨어져 있다. 처음 그것을 발견한 것은 표범이었다. 이것이 무엇일까 궁금해하던 표범은 깜짝 놀라며 느닷없이 달려가 버린다. “이건 내 무늬랑 똑같잖아! 어제 사냥할 때 떨어뜨린 게 틀림없어. 다른 표범에게도 무늬가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말해야겠어!” 그 다음으로 ‘검은 무엇’을 발견한 까마귀는 “하늘에서 별 조각이 떨어졌구나! 오늘 밤 하늘이 무너져서 숲이 깔릴지도 몰라!”라며 표범보다 더 불안해하며 황급히 떠난다. 

그 다음으로 ‘검은 무엇’에 다가온 여우도, 사슴도, 부엉이도 이 알 수 없는 물건을 제멋대로 판단하고는 혼비백산하여 달려가 버린다. 그들에게 ‘검은 무엇’은 재앙의 전조다. 군대가 진군해올 것이라는 표시이기도 하고, 기마부대를 끌어들이는 부러진 말발굽이기도 하다. 심지어 온 숲을 태워버릴 용의 알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엇이건 그들의 상상 속에서 숲은 위험에 처했다. 종말이 코앞에 닥쳤다. 동물들은 우왕좌왕하며 큰 소리로 떠들어댄다. 암울한 미래를 외친다. 

기왕 잘못 보는 거, 좀 더 긍정적으로 잘못 볼 수도 있었겠다. 예를 들어 멋진 나무 한 그루로 자라날 씨앗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달콤한 초콜릿일지도 모르잖아. 동전이 가득 든 주머니처럼 생긴 것 같지 않아? 그러나 동물들은 가장 불길한 방향으로 상상력을 발휘한다. 낯선 것은 두려운 것이고, 두려움은 편견에 불을 지핀다. 그렇게 커진 편견은 극단적인 공포를 불러온다. 

귀여운 동물들이 나오는 모든 우화들이 그렇듯이 이야기는 더 끔찍한 비극으로 치닫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여실지견하지 못한 이들이 닿는 종착역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역사 속에는 지레 짐작하여 배척하고, 편견을 무기삼아 폭력을 휘두르고, 심지어 전쟁을 일으킨 예들이 무수히 많다. 끔찍한 대학살도 원인을 따져보면 무지로 인한 편견이 시발점이다. 새끼줄을 뱀이라 오해한 이들은 겁이 나서 못살겠다며 곡괭이니 삽을 들고 뱀 소탕에 나선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여 생겨난 고통은 빠르게 몸집을 불리며 파도처럼 번져나간다. 바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검은 무엇’이 멋진 나무의 씨앗이라면 우리는 느긋하게 나무가 자라는 것을 기다릴 수도 있겠다. 한 조각 초콜릿이라면 제일 처음 발견한 동물이 낼름 먹고 달콤한 입술을 핥으며 시치미 뗄 수도 있을 것이고. 동전이 가득 든 주머니라면 사이좋게 다함께 주전부리 사러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숲은 평화롭고, 종말은 요원할 것이다. 평화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검은 무엇’을 요모조모 살피고 오래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것이 뱀이 아니고 새끼줄임을 알 때까지,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박사 북칼럼니스트 catwings@gmail.com

 

[1542호 / 2020년 6월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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