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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정종여의 의곡사 괘불 : 강함과 여림의 대화

기자명 주수완

중생 닮은 붓다 얼굴…우리곁에 있는 부처님 표현

참전 미화 그림서 김일성 초상화 까지…친일·월북 화가로 불려
해인사 산 인연으로 주지스님 후원 받고 오사카 미술학교 유학
의곡사 괘불·금색 장엄문양 뺀 담채 수채화, 담박한 표현 일품 

정종여, 괘불도, 1938년. 진주 의곡사. 652×355㎝.

이번 연재를 시작하며 소개했던 청계 정종여(1914~1984)의 진주 의곡사 괘불도를 다시 살펴볼 때가 되었다. 인간 세계에 발을 담그고 사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그가 지냈던 삶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에는 참전을 미화하는 그림을 그리고, 군인들의 무사귀환을 위한 ‘수월관음불상’을 그려 헌납했던 일로 그는 현재 친일화가 명단에 이름이 올라있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서울이 점령되었을 때는 김일성 초상화를 그렸고 그 후 월북했다는 점은 점점 그를 잊힌 화가로 만들었다. 친일에다 월북까지 이렇게 금기시된 타이틀 두 개를 모두 가진 인물도 드물 것 같다.


이러한 그를 한편으로는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북한 치하에서는 북한이라는 시류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아주 얄팍한 인물로도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공산주의에 관한 한 그는 한국전쟁 이전부터 ‘조선미술가동맹’이라는 좌파 단체에 속했던 만큼 갑작스런 변절은 아니었다. 나아가 거창 출신인 그는 빈농 집안에서 자라면서 고학으로 공부를 했는데, 아버지까지 일찍 세상을 뜨자 더욱 형편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럼에도 학교 성적도 우수했고 특히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가난한 형편에 그림수업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런 그가 일본 오사카미술학교로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형편이 어려워 해인사에 의탁해 사는 동안 해인사 주지스님의 눈에 띄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이 기간 불교에도 깊은 감명을 받아 이후 불교 주제의 그림을 다수 남기게 된 것이다.
 

의곡사 괘불의 화기. 정종여는 ‘화사(畵師) 청계종여(靑谿鐘汝)’로 기록됐다.

당시 해인사 주지스님이 누구신지는 아직 확인을 하지 못했지만, 혹시 1926년 백용성 스님께서 건백서를 제출할 때 함께 서명한 ‘해인사 주지 회진(會眞)’ 스님일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이 분이 어떤 목적으로 그림에 재능 있는 청년 정종여를 굳이 일본으로 유학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다. 여하간 스무살 남짓이었던 1934년에 그는 오사카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불과 2년 뒤인 1936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 화가로서 인정받고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어쩌면 정종여는 가난을 극복하고 화가의 꿈을 이루게 해준 불교, 그리고 그의 실력을 인정해준 당시 화단에 대한 보은이 그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을 심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불교계와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 결과 해인사 말사였던 진주 의곡사의 괘불을 그렸던 것이 1938년이었다. 이 괘불은 당시 의곡사의 주지였던 제봉 동률 (濟峯 東律, 서예가 청남 오제봉 선생) 스님의 부탁으로 그려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제 한참 본격적으로 미술을 시작한 대학생에게, 그것도 불화승도 아닌 작가에게 사찰의 중요한 불사인 대형의 괘불을 맡겼다는 것이 놀랍다. 아마 유학 떠나기 전부터 그의 실력을 알아보고 있었고, 또한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읽어낸 혜안을 지니셨던 것 같다. 스님은 이후 파계하여 본격적으로 서예가로서 활동하셨으니 본인 스스로도 예술적 욕구가 넘치는 분이었는가 보다. 여하간 덕분에 우리는 아주 특별한 불화 한 점을 불교미술사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그려진 젊은 화가 정종여의 괘불은 전통 불화의 입장에서는 매우 낯설다. 일반적으로 불화는 진한 채색으로 그려지는데, 이 불화는 수채화처럼 담박한 담채로 그려졌다. 또한 본존 부처님 주변으로 협시보살이나 혹은 가섭·아난존자와 같은 제자가 시립한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반해 여기선 부처님 단독으로 그려졌고, 그 주변은 구름과 하늘로 가득 채워졌다. 때문에 뭔가 허전하고 빠진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불화에서 중요한 표현 요소이기도 한 가사의 화려한 금색 장엄문양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붉은 색의 단색 가사를 걸치고 있는 모습일 뿐이다. 거기다 부처님얼굴도 낯설다. 마치 분을 바른 듯한 얼굴은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 보면 평범한 사람,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부끄럼 많고 내성적인 사람의 모습처럼 다가온다. 사진으로 볼 때는 특히나 너무나 여리고 힘없는 그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막상 전시회장에서 만난 이 괘불은 알 수 없는 강인한 힘으로 다가왔다. 크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불화가 아닌 것 같은데 불화라고 주장하는 그 당돌함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이렇게 섬세하고 여린 부처님의 모습임에도 유난히 바람에 휘날리는 옷자락, 대범하게 꿈틀거리는 구름, 그리고 스스럼없이 우리를 내려다보는 압도적인 시선에 매혹되며 결국은 “아, 불화가 이렇게 변할 수도 있었구나”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석가탄신일에 진주 의곡사에 걸린 정종여의 괘불도, 2015년. 청계정종여기념사업회 사진.

그가 이렇게 담박한 괘불을 그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김복진을 존경하며 줄기차게 참여해왔던 사회주의 예술가 운동은 결국 사회주의 리얼리즘(그는 이것을 “사회주의 현실주의”라고 했다)을 추구해 왔다. 그에게 너무 화려하고 번잡한 부처님의 모습은 오히려 부르주아 미술로 비추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대신 그는 만약 진정 부처님이 우리 앞에 강림하신다면 어떤 모습일까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이 아닐까? 전시장이 아닌 야외, 즉 의곡사 법당 뜰에 걸린 이 괘불을 보면 그가 바탕을 단순하게 하늘로 처리한 이유를 알 듯하다. 실제의 하늘과 괘불 속 하늘이 겹쳐 보이면서 그림과 실제 공간을 하나로 만들어 버리는 대신, 마치 부처가 실제 공간에 튀어 나오신 것처럼 돋보이게 만드는 효과를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바람에 옷이 휘날리는 모습까지 실감나게 강조했으니 이 앞에 서면 지금, 바로 내 앞에 부처님이 구름을 타고 막 강림하셨다는 느낌이 절로 들게 된다.

정종여는 어떻게 보면 딱딱한 틀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불교도상 속의 부처님이 아니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부처님을 통해 그가 추구했던 무엇인가를 표현하려고 한 것 같다. 또한 영웅적 이미지의 붓다가 아니라, 평범한 얼굴의 붓다, 중생을 닮은 붓다를 통해 부처님이 우리로부터 그리 먼 곳에 계신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고 했음을 느낀다. 이 쑥스러운 듯 당당한 부처님을 보고 있자면 작품은 한없이 혁명적이고 치열했지만, 스스로는 시류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정종여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542호 / 2020년 6월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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