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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드뷔시의 피아노 음악 ②

기자명 김준희

무한한 예술 영감 물에 비유해 집약적으로 표현

‘바다’ 소재로 인생의 위기와 기쁨을 내면까지 표현해내
시테르섬 바다 상상해 사랑의 시작과 여정 담아낸 곡도
경전서 물은 업장·번뇌 없애주는 신비한 존재로 비유해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가츠시카 호쿠사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떠올려 보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물’일 것이다. 물은 사람 몸무게의 70% 이상을 차지하기도 하지만, 생존의 절대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또한 강, 호수, 바다 등의 다양한 형태로 자연에 두루 존재하는 탓에 예술 작품에서 그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특히 인류역사와 함께 시작된 음악은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존재라 물과 더욱 더 가깝게 느껴진다. 

바로크 시대부터 혹은 그 이전 시대의 작품에서도 물은 작곡가에게 상당히 익숙한 소재였다. 헨델의 관현악곡인 ‘수상음악(Water Music)’은 대표적인 물과 관련된 작품이다. 슈만의 교향곡 제 3번은 일명 ‘라인 교향곡(Rheinish)’으로 불리는데, 슈만이 2악장에 ‘라인 강변의 아침’이라는 부제를 직접 붙인 것처럼, 작곡가가 작품 속에 라인 강의 풍경을 담고자 했다. 또한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 중 두 번째 곡인 ‘몰다우 강’은 작은 물줄기가 암석에 부딪히며 햇빛을 받아 반짝이다가 큰 강물로 변하며 프라하를 흘러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모네를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색채에 영향을 받은 클로드 드뷔시의 작품들은 상당히 묘사적이고 감각적이었다. 낭만주의 음악에서 추구했던 열정적 표현 대신 암시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음악을 만들어갔던 드뷔시의 음악은 불분명하고 모호한 화성과 자유로운 형식, 다양한 색채감 등이 느껴진다. 드뷔시는 ‘음악은 바람, 하늘, 바다처럼 무한한 것들이 용솟음쳐 나오는 자유로운 예술이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무한한 존재를 가장 집약적으로 그려낸 작품이 교향시 ‘바다(La Mer)’이다. 

시테르섬으로의 승선 (와투).

일본의 화가 호쿠사이(葛飾北斎)의 ‘후카쿠 36경: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를 보고 영감을 받은 작품이라는 일화가 있는 교향시 ‘바다’는 드뷔시가 그려내고자 했던 움직이고 변화하는 대상을 집약적으로 담고 있다. 드뷔시가 편지에서 “상기네르 섬들의 아름다운 바다, 파도의 유희, 바람이 바다를 춤추게 한다”고 이야기 했듯이 첫 곡 ‘바다의 새벽부터 한낮까지’에서는 출항하는 배의 모습이 연상되는 패시지들이 등장한다. 특히 두 번째 곡인 ‘파도의 유희’는 드뷔시의 기법이 가장 돋보이는 곡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와 물보라의 모습을 분주하게 오르내리는 선율들로 묘사한 화려한 스케르초는 드뷔시의 피아노 작품 ‘기쁨의 섬’과도 비슷한 느낌을 준다. 

드뷔시의 ‘바다’는 단순히 아름다운 바다와 햇살, 바람과 풍경을 묘사한 것만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바다의 다양한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드뷔시의 당시 삶에 존재하는 거센 파도와 바람을 담고 있었다. 이 작품이 초연된 2주 후에 드뷔시는 아내가 아닌 다른 여인 사이에서 딸을 얻었고, 사회적인 물의를 빚기도 했다. 하지만 자유로운 사랑 속에서 감각적인 오케스트레이션으로 풀어낸 그의 섬세함은 최고의 작품을 탄생시켰다. 혹시 드뷔시는 이 작품을 통해 때로는 조용하고 낭만적인, 때로는 격렬하게 움직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지 않았을까? 

‘논어’에서 “가는 것이 이 물과 같아서 밤에도 낮에도 멈추지 않는다(逝者如斯夫 不舍晝夜)”로 자연의 무궁함과 영원불변함에 고개 숙이는 공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파스칼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물 한 방울이라면, 앞으로 알아야 할 것들은 대양(大洋)과 같다”고도 했다. ‘금광명경’ 제 1권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나의 번뇌 업장의 때를 원컨대 이 세상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대비의 물로써 씻어 깨끗하게 해 주소서.’ 물에 대한 경이로움에 대해 언급한 고전의 문장들 역시 이 부분과 결을 같이 하고 있는 것 같다.  

드뷔시의 피아노 작품에서 ‘물’에 관한 이미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세 개의 작은 곡들로 이루어진 ‘판화(Estampes)’ 의 마지막 곡인 ‘비오는 날의 정원(Jardins sous la pluie)’은 무더운 여름날 정원에 쏟아진 소나기를 그린 작품이다. 가벼운 터치로 시작되는 이 곡은 조성과 다이나믹을 바꿔가면서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묘사한다. 앞의 두 곡은 다분히 동양적이지만 이 곡에서는 드뷔시는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듯 프랑스의 유명한 동요의 선율을 차용했다. 영상(Iamge) 제 1권의 첫 곡인 ‘물의 반영(Reflets dans l’Eau)은 앞의 두 곡과는 사뭇 다른 정적인 곡이다. 반짝이면서 흔들리는 시적인 정서를 담고 있는 이 곡은 아르페지오의 아름다움으로 회화적인 빛과 그림자, 잔물결의 흔들림 등을 묘사하고 있다.  

드뷔시는 자신의 음악 어법을 설명하면서 “음악은 색과 리듬을 가진 시간으로 되어있다”라고 이야기했다. 드뷔시에게 자연 현상을 상상력을 발휘해 표현하는 것은 ‘자연과 상상력 간의 대화’로 풀어내는 것이었고, 그것은 음을 빌려 색채와 리듬으로 ‘물’이라는 주제를 세련되게 표현했다. 프렐류드 제 2권에서는 물의 요정인 ‘Ondine’을 묘사하기도 했다. 호수, 강, 연못의 웅덩이에 수정궁을 지어놓고 항해사나 낚시꾼들이 졸기만을 기다리는 다소 장난스러운 ‘물의 요정’을 다양한 선법과 겹겹이 쌓인 선율과 독특한 리듬으로 그려 냈다. 

‘기쁨의 섬(L'isle joyeuse)’은 드뷔시의 피아노 작품 중 가장 비르투오소적이면서도 인상주의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곡은 프랑스 화가 와토의 그림인 ‘시테르섬으로의 승선(Embarque ment pour Cythere)’에서 착안한 것인데, 시테르섬은 그리스의 크레타섬 북서쪽에 위치한 사랑의 여신 비너스의 섬으로, 연인들이 그들의 사랑의 영원함을 위하여 여행을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교향시 ‘바다’를 작곡할 무렵 작곡된 곡으로, 드뷔시는 사랑의 결실을 위한 항해의 시작과 여정, 섬에서 느끼는 바다의 정취들을 상상을 통해 표현했다.  

‘대방광불 화엄경’ 제 43권에도 비와 물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네 가지 변재로 법비를 쏟고, / 여덟 가지 바른 도의 감로의 물로 / 갖가지 번뇌불을 다 꺼버리고 / 일체의 이치에 편히 머무네. / 한량이 없는 그 방편으로 /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고 / 맑고 시원한 자비의 물로 / 불붙는 온갖 번뇌를 없애 버리네.”     

이렇게 물이 예술작품의 소재와 주제가 되는 것은 신체적·정신적·사회적 측면에서 인간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물은 업장과 번뇌를 없애주는 신비한 존재의 비유로 등장한다. 음악과 물, 뗄 수 없는 두 가지, 그리고 경전과 함께 하며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심성에 대해 생각해보면 어떨까. 특별히 독특한 이국적 정취와 사색적인 음악을 남긴 드뷔시와 함께. 

김준희 피아니스트 pianistjk@naver.com

 

[1542호 / 2020년 6월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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