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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나의 경계선은 어디인가

경계선 못 긋는 몸과 마음…애초 나는 없었다

큰 모래더미라도 하나씩 계속 빼다보면 모래더미 성립 안돼
내 몸과 마음도 유사…최소한 경계도 그을 수 없는 게 실상
서양에선 심각한 문제지만 ‘무자성’ 표방하는 불교에선 당연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경전에 항하(恒河)라고 표기된 갠지스강가의 모래를 모두 한 곳에 모아 모래더미를 만든다고 상상해 보자. 엄청나게 큰 모래더미가 되겠지만 그 모래의 수는 유한수 n이라고 표기할 수 있다. 여기서 모래 한 알을 빼어 그 숫자가 (n-1)개가 되어도 그것은 여전히 모래더미로 남는다. 이 항하사(恒河沙)를 하나씩 빼내는 작업을 무수히 많은 겁(劫) 동안 계속하여 결국 모래가 한 알만 남게 된다고 가정하자. 모래 한 알만으로는 더미가 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 더 이상 모래더미는 없다. 우리는 위에서 모래더미가 n개의 모래로 이루어져 있으면 (n-1)개의 모래로도 모래더미가 된다고 결론지었다. 이치에 맞는 결론이었는데, 많은 겁이 지난 후 이에 상충되는 결과가 나왔다. 언제부터 이것이 모래더미가 아니게 되었을까? 그 모래의 정확한 수를 알 수 있을까? 아무도 답변할 수 없다. 철학은 이런 문제를 ‘모래더미의 패러독스’라고 부른다. 물론 처음부터 모래더미가 자성을 가지고 실재한다고 보지도 않는 불교에서는 존재할 이유가 없는 문제다.

이제 질문을 ‘나’에게로 돌려보자. 내 몸의 경계 또는 테두리는 어디까지일까? 예를 들어, 머리카락은 나의 일부인가 아닌가? 이발할 때마다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에 개의치 않는 것을 보면 머리카락이나 몸에 난 털이 나의 일부인 것 같지는 않다. 코나 귀는 어떤가? 코나 귀가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참으로 고통스럽겠지만, 이 둘도 나의 진정한 일부가 아님은 분명하다. 코나 귀가 없어도 나는 나이니까 그렇다. 팔이나 다리를 다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신체의 얼마만큼이 진정한 내 몸일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부분이 나일까? 일견 그럴 듯한 이 답변도 문제가 있다. 앞으로 인공장기가 우리 몸의 손상된 부분을 점점 더 많이 대체할 수 있어서 우리가 그 최소한의 경계를 정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정신작용을 담당한다고 믿어지는 뇌도 예외는 아니다. 뇌세포 하나하나를 그것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실리콘으로 된 부분으로 대체해 나가는 것이 원칙적으로 가능한데, 언젠가는 뇌의 모든 부분을 실리콘으로 대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모두 고려하면 이 몸에서 나의 경계선을 정하기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몸은 따지고 보면 결국 소화된 음식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몸의 그 어느 부분도 밖으로부터 온 것이지 나로부터 비롯된 나의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내 몸의 경계선을 그을 도리가 없다.

이 모든 문제를 피하기 위해 일단 현재 내 몸에 연결되어 있는 모든 부분이 나의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래서 내 몸 전체가 바로 나이고 그 테두리가 나의 경계라고 해 보자. 이때 내 몸에서 머리카락이 하나 없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 머리카락이 없더라도 그 몸은 몸이다. 다른 머리카락이 하나 없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는데, 그 몸도 몸이다. 이렇게 보면 내 머리카락의 숫자만큼 다른 많은 몸이 내 몸 안에 존재한다. 머리카락 둘이 없어도, 셋이나 넷이 없어도, 귀가 조금 찌그러져도, 팔이 조금 길어도…. 이 모든 무수히 많은 경우의 몸이 모두 내 몸 속에 있다. 나는 이렇게 수없이 많은 몸을 끌고 다녀야 하게 된다. 이는 수용할 수 없는 황당한 결론이지만 만물의 실재를 믿는 서양철학자들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한 몸도 자성이 없어 공하여 실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불교에서는 이런 문제가 처음부터 생겨나지도 않는다.

이제 마음의 경계를 정할 수 있느냐는 문제를 살펴보자. 현대인은 거의 모두 의식이 몸의 물질적 기반인 뇌의 기능에 의존한다고 믿는다. 여기서 불자라면 뇌 또한 소화된 음식물이기 때문에 내 몸 밖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에 먼저 주목할 만하다. 그래서 뇌에 의존하는 모든 의식상태도 물질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조건이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생멸한다. 그런데 내가 가진 의식상태 가운데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 예를 들어, 내 사유(思惟)를 구성하는 개념들 가운데 단 하나라도 나로부터 생겨난 것이 있는가? 그런 것은 없다. 내 의식 속의 모든 개념은 모두 자라면서 듣고 배운 말로부터 형성되었지, 그 어느 하나도 의식 속에서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다. 사유 내용 가운데도 진정한 의미에서 내 것은 하나도 없다. 내 것이 없다면 내 마음의 경계선을 그을 수도 없다.

심리철학은 마음의 경계가 주변 환경과 공동체로까지 연장되어 있다고 본다. 사람들은 느릅나무와 너도밤나무를 잘 구별할 줄 모르지만 두 단어를 문제없이 사용한다. 필요하다면 우리 사회 식물학자의 도움으로 두 나무를 구분하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쓰는 단어 가운데 스스로 엄밀한 정의(定義)를 알면서 사용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정의(正義)’ ‘가상화폐’ ‘진리’ ‘깨달음’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래도 우리의 사유와 언어생활은 각 분야의 전문가가 있는 우리 사회와 연결되어 진행되기에 무리가 없다. 물론 이런 연결성 때문에 마음의 경계선을 명확히 그을 수는 없다. 한편 과학철학자들은 우리의 지식내용이 배경이론에 의해 결정된다고 판단한다. 예를 들어 상대성이론을 아는 사람이 이해하는 질량, 시간 및 공간은 고전역학만 배운 사람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갖는다. 우리 마음은 배경이론으로까지 연장되어 있다. 그 경계를 정하기가 불가능하다.

위에서 살펴본 머리카락 하나 없는 몸의 예와 비교하며 내 마음속에 있는 마음들의 개수를 생각해 보아도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단어 하나 더 또는 덜 알고 있는 마음, 수학 문제 하나 더 또는 덜 풀 줄 아는 마음, 기억 한 조각만 다른 마음… 등을 모두 고려한다면 내 마음속에는 수없이 많은 마음이 있다는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다. 한 마음조차 자성이 없고 공하여 실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불교에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지만, 만물 특히 마음의 실재를 굳게 믿는 서양철학에서는 심각한 문제로 될 수 있다.

몸도 마음도 그 경계선을 그을 수 없다. 내가 존재한다면 몸 또는 마음으로 아니면 몸과 마음의 복합체로 존재할 텐데, 이 둘 다 경계선을 정할 수 없다. 나의 경계선을 그을 수 없다. 그런데 경계선도 없으면서 ‘나’가 자성을 가지고 실재한다고 주장한다면 억지겠다. 깨달음과 열반으로 대자유의 길에 나서려면 먼저 나를 내려놓아야 하겠는데, 알고 보니 처음부터 내려놓을 ‘나’가 없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46호 / 2020년 7월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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