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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랏말싸미’ 조철현 감독

“결과만을 보지 말고 과정에 집중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영화 나랏말싸미는 훈민정음 창제에 얽힌 과정에 대한 이야기
산스크리트어 기원설은 팔만대장경 등 학문적인 근거가 충분
세종의 위대한 점은 한글 창제 결과 아닌 역경을 이겨낸 과정 

김해라는 도시는 저와 영화적 인연이 깊습니다. 예전에 ‘달마야 놀자’라는 영화를 기획해서 만든 도시입니다. 당시 촬영 장소를 정하기 위해 전국 사찰을 많이 다녔는데 촬영허가를 받는 것이 무척 어려웠습니다. 다행히 신어산 아래 은하사에서 허락을 해주셔서 김해에 몇 달 동안 머물며 촬영했습니다. 절 풍광도 무척 좋았지만, 신어산이라는 은하사를 품은 산의 이름부터 가야 문명과 관계가 있어서 더욱 의미깊은 시간을 보낸 기억이 생생합니다. 영화 ‘나랏말싸미’의 자문을 맡아주셨던 동국대 정진원 교수님과 함께하는 이 자리가 김해에서 마련되어 감사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불가의 영향을 받고 자라서인지 역사에서도 불교적 소재에 관심을 가졌고 자주 다뤄왔습니다. 특히 사람은 죽기 직전 뇌에서 고통을 순간적으로 감경시키는 호르몬이 분수처럼 쏟아져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고 합니다. 저는 그것이야말로 한 편의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인생에서 한 편의 영화를 찍고 있습니다. 미리 그 영화를 볼 수 있다면 ‘이것이 나에게 중요한 순간이구나’ ‘저것이 나를 가슴 아프게 했던 순간이구나’, 이런 사실들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인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생을 떠날 때 잠깐 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수행하는 스님들을 뵈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스님들은 수행을 통해서 그것이 나에게 중요한 순간이었고 가슴 아픈 순간이었고 상처를 준 순간이었고 즐겁게 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아마 미리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자기 자신이 각본을 쓰고 출연도 하면서 미리 본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 미리 본 영화를 통해서 과거의 좋은 생각, 좋지 않은 생각을 청소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도 스님들의 수행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인물을 만들고 그 인물들의 관계를 설정하고 스토리를 설정해서 이야기를 짜서 찍고 편집을 하고 소리를 넣어서 한 편의 영화를 만듭니다. 수행하는 스님들이 한 인간의 과거 역사, 캐릭터, 성격으로 인해서 나오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미리 파악하고 영향받지 않는 삶, 극복할 수 있는 삶에 도달하고 많은 신도님을 제도한다는 것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과 비슷한 느낌이 있습니다. 

영화가 오늘날의 서사 방식 중 한 가지라고 한다면 고려시대 서사 방식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팔만대장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훈민정음의 음운적 기본 원리가 팔만대장경 안에 있다고 보는 견해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팔만대장경의 원리는 인도 산스크리트어, B.C 5세기 이전에 이미 정리되었던 것, 그것이 이미 불교 경전이 중국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삼장법사 현장 스님 같은 분들이 실제 산스크리트어를 배웠고 중국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인도의 문법체계와 언어체계가 전달되었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훈민정음은 단순히 한 천재가 어느 날 갑자기 쓴 책이 아니라 수천년에 걸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연기적으로 전달되었고 조선에 와서 꽃핀 하나의 위대한 작품이다, 이것을 영화 속에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역사는 1년 단위로 볼 수 있고, 10년 단위로 볼 수 있고, 100년 단위로 볼 수도 있습니다. ‘나랏말싸미’는 한 나라의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이라는 문화유산이 1000년 이상의 역사적 흐름을 가지고 전달된 과정을 세종 당대에 몇 년 사이 벌어진 일로 재구성한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관련된 많은 정보를 보게 됩니다. 산스크리트어에 관련된 연구, 가림토 연구에 관한 글, 가야 토기에서 나온 가야 문자 관련된 책도 보았습니다. 국내에서 나온 문자와 관련된 정사든 야사든 상상력을 동원한 서사 형식으로 만든 글이든 관련 자료는  모두 보다시피 했습니다. 

그렇게 연구를 거듭한 뒤 훈민정음의 범자기원설을 영화적 소재로 잡았고, 영화 첫 장면에 자막으로도 표기했습니다. ‘이 영화는 여러 가지 훈민정음 창제설 중 한 가지를 극화한 것입니다.’ 역사를 공부하고 역사 영화를 만들면서 배우는 가장 큰 교훈은 늘 ‘틀릴 수 있다’입니다. 현실에서도 나의 주장이 아무리 사실과 고증과 연구를 통해서 어떤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말 자체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늘 새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산스크리트어 기원설을 이 영화의 기본 설정으로 썼는가, 그것은 구체적인 여러 가지 정황과 증거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팔만대장경 그리고 삼장법사 현장 스님의 산스크리트어에 대한 문자와 문법 설명, 인간의 구강 구조의 한 지점에서 나오는 소리의 음성학적 분류법 등이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고대 인도에서는 왜 그것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가, 그 당시 구송으로 베다 문학을 배우고 공부했던 것이 너무나 엄청난 규모로 오랫동안 전개되었기 때문에 사운드에 대한 감각과 학문 체계는 아주 강렬한 것이었습니다. 동국역경원에서는 팔만대장경을 다 우리말로 번역해서 디지털로 공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팔만대장경의 범어 음성이라고 검색해보면 다 나옵니다. 최소한 이것은 저의 상상 속에서만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학문적 근거가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훈민정음의 위대성은 그 디자인의 방식에 있습니다. 훈민정음은 문자를 쉽게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빨리 암기해서 적용할 수 있는, 지식이 많은 사람이든 적은 사람이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굉장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빨리 습득할 수 있는 디자인을 했다는 것입니다. 훈민정음의 가치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에서도 빛납니다. 그래서 훈민정음의 가치를 어떤 과정을 통해 디자인되었고 어떤 이유에서 디자인이 되었는지 알아보자고 영화를 만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왜 우리는 노벨상이 안 나올까,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가 나오지 않는 것인가,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발명품이 나오지 않는 것인가, 우리는 개발도상국이었습니다. 빨리 따라잡기 위해서 결과에만 집착했습니다. 결과라는 모델을 만들어놓고 과정에 대해서는 사실 이제 조금 관심을 갖는 정도입니다. 

‘나랏말싸미’라는 영화는 결과보다는 과정에 더 집중하기 위한 영화입니다. 인생의 어떤 스토리를 가진 사람이 이 과정에 함께했는가, 영화에 나온 사람은 세종을 비롯하여 다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왜 비밀리에 할 수밖에 없었는가. 훈민정음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그 나라의 문자를 만드는데 몰래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가 왜 그런가, 어떻게 했는가, 여기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말하는 그 결과만을 놓고 배울 것이 아니라 어떤 과정을 통해서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러한 진행 과정에 초점을 잡고 역사를 보았으면 합니다. 세종대왕은 몸에 병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왕이 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상처를 가장 많이 입은 사람입니다. 처가, 외가, 자신의 처, 형제들, 다 어떻게 보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다 꺾고 짓밟고 살육한 상황에서 왕이 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도 많았을 것 같고, 또 사대부 공신 세력들의 견제도 많았고, 그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한글 창제를 해내신 분입니다. 

세종은 왜 위대한가,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니까? 그 결과를 놓고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 결과만이 아닙니다. 그 많은 어려움을 통해서도 훈민정음을 만드는 과정이 위대한 분이셨습니다. 

21세기에 역사극을 만들 때 우리가 좀 더 과정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를 보고 반발심을 가졌던 분들은 이미 교과서의 인물로, 리더로, 자신의 마음에 상을 갖고 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굉장히 익숙하고 친숙하고 자랑스러운 상에 배반이 되는 것 같은 내용이 나오니까 괴로우셨던 분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다른 이유도 있겠습니다만 통념을 벗어난다는 것이 쉽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불교 수행에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상을 버린다, 상을 내려놓는다, ‘금강경’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표현합니다. 경부고속도로 누가 만들었습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초고속 인터넷 광케이블망 누가 깔았습니까? 김대중 대통령이 만들었습니다. 스마트폰 누가 만들었습니까? 스티브 잡스가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굴착기를 가져와서 땅을 파고, 케이블을 가져와서 설치하고, 반도체 칩을 조립하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리더가 일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인물, 그가 그 일을 다 했다고 모델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영웅적 역사관이라고 표현합니다. 역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던 20세기에는 이러한 역사관이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게 자부심을 가질만한 영웅이 있어서 힘든 시기를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역사관이나 위인 상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인생에 얼마나 어려움이 있었고 극복하는 과정은 어떠했는지 그 자체를 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문가 집단을 얼마나 잘 조직해서 효율적으로 이용하는가, 이런 분이 이 시대의 진정한 위대한 리더입니다. 그 위대한 리더의 서사, 결과보다는 과정을 향한 연구에 더 많은 분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강의는 7월15일 경남 김해 여여정사(주지 도명 스님)에서 개최된 ‘동국대 정진원 교수와 나랏말싸미 조철현 감독이 함께하는 북콘서트’에서 조 감독이 강의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547호 / 2020년 7월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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