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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제27칙 소산 광인답불(踈山匡仁答佛)

“고목이 꽃피우는 경지 올라서라”

부처란 뭔지 묻는 제자 향해
소산노인에 물으라고 한 소산
제자와 스승의 관계를 떠나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란 일침

한 승이 소산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소산이 말했다. “어째서 소산노인에게 묻지 않는가.”

소산광인(踈山匡仁)은 동산의 제자이다. 상당하여 말했다. “깨침의 인연을 알고자 하면 반드시 고목이 꽃을 피우는 경지가 되어야 바야흐로 깨침에 계합할 수가 있다.” 그러자 한 승이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어째서 소산노인에게 묻지 않는가.”

이 문답은 일반상식을 초월하는 듯이 보인다. 소산에게 물었는데 소산노인에게 묻지 않느냐고 되묻는 것이 그렇다. 승이 질문한 대상인 소산은 제자와 스승으로 설정된 소산일 뿐이다. 그 이면에는 제자와 스승이라는 형식과 예의를 벗어난 본래인으로 살아가는 제자가 있고 본래인으로 살아가는 스승이 있다. 그러나 지금 한 승이 묻고 있는 대상은 본래인이 아닌 스승의 권위 내지 자기와 구별되는 타인으로 등장해 있는 소산이었다. 때문에 소산은 제자의 생각을 송두리째 바꾸어주는 치열한 법문으로 대치해주고 있다. 소산은 일찍이 자신을 긍정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말해줄 수 없다는 동산의 가르침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자신의 긍정은 본래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이다. 곧 질문을 하는 승의 본래자기를 향해서 추구할 것을 다그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다름 아닌 부처라는 것이다. 승이 묻고 있는 부처는 자기 이외에 어떤 것도 아닌 자성불(自性佛)이어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 문답에서 소산이 보여준 답변은 사람들에게 직지인심의 경우처럼 직설적이고 요긴한 점을 들어서 지시해준 것이었다. 동산의 삼형제 법어가 있다.

“깨침의 도리를 알고자 하는가. 그러려면 마치 여염집에서 삼형제를 키우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하나는 주(州)에서 키워야 하고, 하나는 현(縣)에서 키워야 하며, 하나는 촌(村)에서 키워야 한다. 하나는 집안에서 재물로 활용할 용도이고, 하나는 밖에서 재물로 활용할 용도이며, 하나는 밖에서 재물로 활용할 용도도 아니고 또한 집안에서 재물로 활용할 용도도 아니다. 자, 그렇다면 어떤 아들이 주(州)에서 키워내야 할 경우이고, 어떤 아들이 현(縣)에서, 어떤 아들이 촌(村)에서 키워내야 할 경우인가.”

한 승이 물었다. “삼형제의 경우에 그 경중(輕重)에 대해 설명해주십시오.” “그렇다.” “그 사람의 출신처는 무엇입니까.” “유(有)를 안다는 것은 도리어 유(有)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그 사람의 출신처이다.” “궁금합니다. 그 사람은 오늘부터 그렇게 된 것입니까 이전부터 그런 것입니까.” “그도 역시 오늘부터 그렇게 되었다.” “그렇다면 곧 공훈(功勳)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 “그런 경우를 어째서 공훈이라 부르는 것입니까.” “그런 경우를 무공훈(無功勳)의 공훈이라고 부른다.” “그 사람은 주(州) 가운데 있는 사람으로서 유(有)를 알고 있는 것입니까.” “유를 알아야 비로소 일체의 대상에 대해 소중하게 받들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다면 촌에 있는 사람은 온전히 허물을 드러낸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 “촌에 있는 사람의 허물이란 무엇입니까.” “유를 알지 못하면서도 깨침을 얻은 사람[閑人]이라 말하였데, 그것이 바로 그의 허물이다.”

여기에서 동산이 세 차례에 걸쳐 ‘그렇다’고 긍정한 뜻은 무엇인가를 알아차려야 한다. 한 사람은 똑바르게 모든 규범을 잘 준수할 줄 알아서 안으로는 곧 엄격하고 청정했고, 어떤 한 사람은 선기를 잘 활용할 줄 알아서 밖으로는 곧 미묘하게 상응했으며, 어떤 한 사람은 한 걸음 물러나서는 집안에 있는 사람과 함께 하고 한 걸음 나아가서는 바깥의 사람들과 더불어 합치돼 바야흐로 유를 한다는 것은 도리어 유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도리를 체득해 명칭의 공훈을 통해서 진정한 공훈에 나아간 것이다.

소산이 만약 한 승의 질문에 대하여 부처란 이런 것이고 저런 것이라고 미주알고주알 이해시켜주려는 설명으로 이끌어주었다면 오히려 질문한 당사자가 빠져 있는 미혹한 세계를 향해서 더 깊이 밀어 넣어버린 꼴이 되었을 것이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547호 / 2020년 7월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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