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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지옥’ - 하

기자명 유응오

절대선 상정한 파시즘사회가 지옥

‘누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나’
법·정의 등 근본적 문제 제기
원효의 육정참회법 되새겨야

 

글을 쓴 연상호와 그림을 그린 최규식, 두 작가는 왜 작품의 제목을 ‘지옥’으로 정한 것일까? 작품 속 제법 비중 있는 인물인 배영재 PD는 새진리회 사제에게 이렇게 말한다.

“얼만 전에도 시연 대상자 부모가 자식의 죄를 말하지 않는다고 침입해서 노부부 구타하고 살림 다 부수고…. 아니, 10살짜리 애를 카메라 앞에 세워놓고 제 아빠 죄인이라고 지옥 가야 한다고 시키는 게 정상적인 세상입니까? 사람들 겁주고 벌줘서 좋은 세상 만들겠다. 그런 데가 있긴 있죠. 지옥이라고.”

배영재 PD의 말에서 상대성을 부정하고 절대성만을 강요하는 파시즘의 사회가 바로 지옥임을 깨닫게 된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역설적이게도 절대적인 선(善)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가장 참혹한 지옥이 펼쳐졌음을 알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게르만 우월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고, 일제는 대동아전쟁의 기치로 내걸고 난징대학살과 위안부 강제 동원을 자행했다. 중세사회에서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구현이라는 미명아래 마녀사냥이 수없이 자행됐다. 절대적인 선이 상정되면, 그 절대적인 선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모두 사회악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 불교의 선지식들이 왜 그토록 양변을 여읜 자리인 중도의 가르침을 설파했는지 이해가 간다. 승찬 스님의 ‘신심명’의 한 구절인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 단막증애(但莫憎愛) 통연명백(洞然明白)’, 즉,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나니 오직 간택함만 피하면 되고,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대단히 분명할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따랐다면 인류의 비극은 대부분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를 일이다.

‘지옥’에서 새진리회 정진수 의장과 진경훈 형사가 주고받는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진 형사는 “뜯겨 죽을까봐 무서워서 선하게 사는 걸 정의라고 할 수 있나요?”라고 묻자 정 의장은 “공포가 아니면 무엇이 인간을 참회하게 하나요?”라고 반문한다. 그러자 진 형사는 “그 신은 인간의 자율성을 믿지 않는 거군요”라고 응수한다. 이에 정 의장은 “아내 분을 살해한 그 사람은 지금 참회하고 있을까요? 아내분이 겪은 고통, 아니, 형사님과 아드님만큼이라도 아팠던 적은 있을까요? 이것은 정의입니까?”라고 말한다. 진 형사의 아내는 무고하게 살해되었으나, 살해범은 심신미약 상태라는 이유로 감형을 받았던 것이다.

정 의장과 진 형사의 대화는 이창동 감독의 ‘밀양’을 연상시킨다. 영화 속 주인공 신애는 아들이 유괴돼 살해당하는 참변을 겪는다. 그녀는 길을 걷다가 북받쳐 오르는 슬픔에 어쩌지 못하고 가슴을 움켜쥔다. 그러다 어느 건널목 앞에서 교회 부흥회를 알리는 현수막을 본다. 교회에 다니면서 신애는 아들을 죽인 살해범을 용서하기로 결심한다. 유리 칸막이를 두고 마주선 피해자와 가해자, 그런데 살인범은 아주 평온한 미소를 지으면서 “하나님께서 죄 많은 죄인을 용서해주셨다”고 말한다. 신애는 순간 당황한다. 누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이는 기독교가 타력신앙인 까닭에 발생하는 문제다. 원효대사는 참회의 방법으로 사참(事懺)을 제시하는데, 이는 부처님의 자비에 의지해 지성껏 참회하되 이미 지은 죄는 깊이 뉘우치고 아직 짓지 않은 죄는 앞으로도 짓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 것을 일컫는다. 원효대사는 이어 대승의 ‘육정참회법’을 강조했는데, 이는 육정(六情)이 마음이 지어낸 허깨비임을 깨닫는 데서 시작한다. 원효대사는 ‘물에 빠진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 물에 빠진 것이 꿈임을 깨닫고 완전히 꿈에서 깨어난다’는 ‘능가경’ 내용을 인용하면서 ‘인생이라는 꿈속에서 꿈이 꿈임을 깨닫는 여몽삼매(如夢三昧)를 이룰 때 모든 죄업은 사라지고 궁극의 목적인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게 된다’고 주장한다.

유응오 소설가 arche442@hanmail.net

 

[1551호 / 2020년 9월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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