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3살 정동원의 보릿고개

순전히 우연이었다. ‘미스터트롯’에서 초등학생 정동원이 가수 진성의 ‘보릿고개’를 구성지게 부르는 것을 보게 된 것은. 처음엔 좀 거북했다. 보릿고개란 말의 뜻도 모를 앳된 얼굴의 13살 소년이 굳이 저런 가사의 노래까지 불러야 하나 싶어서였다. 정동원이 노래하는 동안 화면에는 원곡자 진성의 붉게 충혈된 두 눈이 클로즈업되었다. 그와 나는 베이비부머 시대에 태어났고 나이도 엇비슷한 것으로 안다. 내가 노래 속의 가사에 훅하고 감정이입(感情移入)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보릿고개의 첫 소절인 ‘아야 뛰지마라 배 꺼질라’는 어머니가 자주 하던 말이었다. 처음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다리가 풀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갑자기 9남매의 끝둥이에게 아랫목 이불 속에 숨겨놨던 홍시를 꺼내주던 울 엄마가 생각났다. 그래서일까. 진성의 보릿고개는 차마 끝까지 듣지 못하는 날이 많다. 무슨 말인지 알기 때문이다. 정동원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한숨이었소. 어머님의 통곡이었소’라는 말로 천연덕스럽게 노래를 마무리했다. 박수가 나오니 더 눈물이 났다. 얼굴은 눈물 반 콧물 반이 되어있었고. 무안했던가 보다. 옆에 있던 아내에게 뜬금없이 보릿고개라는 말을 들어봤냐고 물었다. 서울 토박이인 아내는 ‘정말 그렇게 살았어’라고 되묻는 듯한 표정을 지었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임영웅이 빨리 무대에 오르기만 기다리고 있다는 눈치였다. 

어디서 ‘라떼는 말이야’가 또 나타났어라고 한숨 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보릿고개 속에는 ‘초근목피의 그 시절’이란 가사도 나온다. 1960년대의 어느 지역 언어로 통역하자면 초근(草根)은 겨울 끝 무렵의 칡뿌리였고, 목피(木皮)는 이른 봄 물오르기 시작한 나이 어린 소나무의 속살이었다. 하나는 쌉싸름하고 다른 하나는 달짝지근했던, 가슴 아픈 추억의 맛으로 기억한다. 보릿고개는 이때부터 올해의 첫 양식이 될 보리를 수확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더디게 너무나 더디게 지나갔을 시간일 것 같지 않은가. 그래도 우리 세대의 보릿고개는 초근목피를 주식(主食)으로 삼을 정도는 아니었다. 간식인 듯 간식이 아닌 듯 헷갈리긴 했지만. 

그러나 동네에서 제대로 된 밥을 지어 먹는 집은 겨우 손꼽을 정도였고 대부분 보리밥이나 잡곡밥 혹은 씨레기죽을 먹고 살았다. 어쩌다 고구마와 감자 같은 구황작물(救荒作物)로 끼니를 때우는 날도 있었고. 보릿고개를 부른 진성씨와 나는 보릿고개란 말을 듣고 자란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싶다. 그 유명한 ‘통일벼’가 나오고 불과 4~5년 사이에 시골에서도 밥 굶는 집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부드러운 모래를 쪄놓은 것 같았던 통일벼의 특별한 밥맛을. 정동원은 마치 추체험(追體驗)이라도 한 듯 처연한 눈빛과 때 묻지 않은 목소리로 보릿고개 세대의 해묵은 감성을 뭉클하게 자극했다. 사는 동안 상처받은 일이 있었다면 가끔은 트롯음악을 들어 볼 일이다. 

여름이 서산에 걸린 해처럼 기울었다. 하늘은 드높고 바람은 서늘하다. 유난히 난폭했던 장마도 밤잠을 설치게 했던 열대야도 이제 더는 우리를 괴롭히지 못한다. 장마와 더위 그리고 무엇보다도 코로나19에 지친 심신(心身)을 가을 햇살에 담요 털듯 훌훌 털어버리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6개월째 세상을 휘젓고 있는 코로나19가 여전히 불특정 다수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어 걱정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도 한층 더 강화될 것이란 소식이 들리고. 우울해진다. 본성상 사회적 동물로 규정되는 인간종 호모사피엔스가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과 사회적 거리 두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존재론적 역설이다. 하루빨리 코로나바이러스가 종식되고 일상의 평온함이 회복될 수 있기를…. 다시 정동원의 보릿고개를 찾아 듣는다. 어쩐지 답답한 세상을 벗어나고 싶은 우리들의 비원(悲願)처럼 들렸다.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552호 / 2020년 9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