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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네팔불교와 카트만두 축제음악

기자명 윤소희

관대 휘어 올려부는 나라싱하는 네팔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나팔

샤카집안 남자 샤카승가 구성원으로·바즈라짜리야집안은 금강승으로
신도에게는 허용되지 않고 스승 인가 받아야만 할 수 있는 만트라 많아
산이 깊은 지역적 특색만큼 음악 등 지역마다 확연히 다른 문화적 특징

카트만두 부다나트 스투파.

룸비니를 떠나 포카라 공항에서 카트만두로 올 때는 12명 정원의 경비행기를 탔다. 돛단배만 한 비행기다 보니 조종실과 객실이 한 공간이었는데, 조종사가 여성이었다. “와~ 멋진데!” 하는 감탄사도 잠시, 비행기에 내려 마주하는 일반인들의 삶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쓰레기가 산이 되도록 방치된 마을 길에서 한 블록만 나서면 카트만두 명품거리, 거기서 잠시만 내려가면 북한식당도 있다. 수일간 인도 음식만 먹다가 평양냉면과 김치가 몹시도 반가웠지만 그곳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종업원들의 모습에 왠지 모를 씁쓸한 여운이 남았다.

신성한 산 히말라야와 북인도가 만나는 지역에 있는 네팔은 서기전 249년 아쇼카왕의 순례 이후 5세기에는 중국의 법현, 7세기에는 현장이 다녀오며 기록을 남겼다. 네팔의 종교 분포를 보면 힌두교 80%, 이슬람 7%, 불교는 10% 정도다. ‘네’라는 힌두 성자가 세워 “네의 보호를 받는 곳”이라는 뜻의 네팔에 정착민 거주 흔적은 신석기시대부터 나타난다. 이후 마우리아왕조, 굽타왕조를 지나 불교와 힌두가 혼합된 네와르족에 의한 초기역사, 4~5세기 리츠차비왕조, 7세기 중엽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등 활발한 교류시대, 10~18세기의 카트만두 도성 이전과 말라왕조, 근대 영국식민지 이후 인도로부터의 분리 이후까지 불교가 힌두에 완전히 잠식되지는 않고 뚜렷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몽골계 티베탄의 역할이 컸다.   

부다나트 스투파에서 아침 꼬라를 돌고 있는 사람들.

네팔의 전 역사를 통틀어 모든 왕조가 카트만두 분지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오늘날 카트만두는 하누만 도카와 같은 옛 궁중 터를 비롯해 꾸마리 여신을 섬기는 사원 등 네팔 힌두문화의 중심이다. 이들 중 가장 긴 역사를 지닌 파슈파티사원은 10개의 사원군으로 이뤄져 있다. 이곳 화장터에서 화장되면 윤회의 고리를 끊게 된다는 믿음이 있다. 사망 후 24시간 이내에 화장하는 힌두관습으로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미리 와서 화장될 때를 기다린다는데 요즘도 그런 일이 있나 싶어 가 보았다. 말이 쉽지, 죽음을 앞둔 사람이 멀고 험한 길을 수레를 타고 온다니 “삶이 얼마나 고달팠으면 그런 마음을 냈을까?” 싶다가도 순진하고도 무모한 믿음이 어이없기도 했다. 화장터를 둘러보니 저만치 시체 타는 연기가 일고, 망자의 가족들은 쓰레기더미 속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데 그 모습이 몬도가네를 방불케 했다. 이러한 미신이 만연하던 세상에 샤카족의 왕자 붓다가 일구어 놓은 비상탈출구가 더없이 감사하게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오늘날 샤카집안에서 태어난 남자들은 비구계를 받아 샤카승가의 구성원이 되고, 바즈라짜리야 집안에서 태어난 남자들은 비구계를 받고 추가로 아사리계를 받아 바즈라짜리야(금강승)의 구성원이 된다. 그들은 영적인 지도자나 성직자로 인정받으며 종교적 사회적 의식을 수행한다. 이러한 가운데 몇몇 바하 승가는 샤카와 바즈라짜리야 모두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아무튼 네팔의 샤카족은 준사제로서 의례를 주재할 정도로 자긍심을 지니고 있다. 

네팔 곳곳에는 엄격한 구분이 되지 않는 힌두사원과 불교사원이 2500여 개에 달한다. 힌두사원에 가면 인도에 온 것 같고, 불교사원에 가면 티베트에 온 것 같다. 이렇다 보니 네팔불교에 대한 예비지식이 없는 순례자들은 힌두의 신상을 관세음보살상이라고 참배하기도 한다. 네팔의 문화적 양상은 체뜨리, 브라만, 마가르, 타루, 타망, 네왈과 그 외의 소수민족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크게 보면 인도 아리안계의 힌두와 몽골리안계 티베트족의 불교문화로 구분되고 이들의 음악도 인디 스타일과 티베탄 스타일이 큰 갈래이다.

입구 계단에서 올려다본 스와얌부나트.

말라시대에 건설된 300여개의 불교사원은 아직도 카트만두 분지에 남아있다. 각각의 승가 구성원들은 날마다 대승불교 경전과 게송, 매주 하는 기도, 매달 8일과 보름에 하는 의례가 신행의 리듬을 형성한다. ‘반야심경’, 육자진언, 아바로키테스와라(관세음보살) 명호를 비롯한 몇몇 진언과 다라니는 일반 신도들에게도 허용되지만 허용되지 않는 만트라도 많다. 이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의 밀교 전법에 의한 것으로, 승려들 간에도 스승의 인가를 받아야만 할 수 있는 작법이 따로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고대시대부터 고도의 밀교 딴뜨라 수계식이 진행되어온 전통이 있다. 

네팔 승가에서는 수사학, 범어 훈련, 스토리텔러(口傳) 양성, 모래만다라 작단, 공양수행법, 짜르야 찬팅(범패), 짜르야 춤(작법무), 점성술, 마지막으로 학술연구를 위한 장학금 지원에 관한 아홉 분야가 구축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네팔은 산스크리트 문학의 보존과 이로 인한 대승경전의 수많은 아사리를 배출해온 저력이 있다. 예를 들면, 마기스바라끼르띠와 팜틴빠와 같은 아사리는 나로빠(988~1026) 예하에서 9년간 짜크라삼바라(胜樂金剛), 헤바즈라(喜金剛)를 연마했고, 구혜삼마자(袐密集會) 딴뜨라, 깔라짜크라(時輪) 딴뜨라의 궤적이 그것이다. 하지만 근세기 정치적·사회적 혼란 상황 속에서 전통적 교육방법과 승가전통이 원활하게 진행되기에는 여러 문제가 산적해 있다.   

올라가서 본 스와얌부나트.

오늘날 네팔 사람들의 불교 신행과 풍속은 스와얌브나트 스투파 주변에서 일어나는 네팔 사람들의 신행을 통해 느껴볼 수 있다. 3세기경 아쇼카왕이 카트만두 일대를 순례한 후 세운 것으로 전해지는 이 탑은 14세기 이슬람 침략자들에 의해 파괴됐다가 말라왕조에 의해 재건됐다. 이 건축물은 카트만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불탑이기도 하지만, 이 도시를 지켜주는 것으로 숭배 받음으로 불교도와 힌두교도들이 뒤섞여 참배하는 이색적인 풍경이 연출된다. 후기 인도불교의 성격을 압축해 놓은 스와얌브나트 스투파(塔) 건축양식이 말해 주듯 이 탑 일대의 불교음악도 후기 인도불교의 찬팅 율조를 느끼게 한다.  

대부분의 순례객은 동쪽 입구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돌아 내려온다. 이들을 따라 동쪽 입구에서 약 100m의 계단을 오르면 스투파 정상에 도르제(金剛杵)가 압도하듯 맞이한다. 도르제 뒤편으로는 거대한 반구형의 스와얌브나트가 있는데, 돔 형태의 상단에는 네팔식 불탑이 올려져 있다. 불탑 중앙에는 동서남북 사방을 응시하는 붓다의 눈이 새겨져 있고, 그 가운데는 물음표같이 생긴 코가 있는데, 이는 네팔의 숫자 1을 상징하며 ‘모든 진리는 하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미간에 그려진 눈은 티베트 참 의식에서 호법 다키니의 놋쇠가면에 새겨져 있던 삼지안을 떠올리게 했다. 탑신 위로는 13개의 둥근 원이 차곡차곡 포개져 있어 해탈을 위해 거쳐야 하는 13개의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카트만두 계곡은 호수였고, 스와얌브나트는 호수 한가운데 섬처럼 떠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신화로만 알고 있던 카트만두 호수설이 최근 지질학자들에 의해 사실로 밝혀졌다. 부탑의 정상에 올라서니 카트만두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맑은 날이면 히말라야의 봉우리들이 훤히 보인다는데, 필자가 방문한 그 시절의 하늘은 매연과 먼지로 가득해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요즈음은 코로나로 카트만두의 공기도 맑아 졌을테니 스와얌브나트에서 히말라야 산을 볼 수 있지 않을 까 싶다.  

카트만두 파슈파티 힌두사원.

힌두교도와 불교도가 뒤섞여 있는 스와얌브나트와 달리 부다나트는 티베트계 불자들의 영역임을 확연히 느끼게 했다. 티베트 불교의 총본산이자 네팔에서 가장 큰 규모의 부다나트의 건립에 관한 설은 여러 가지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티베트 통일 군주 송첸 깜보가 지었다는 것이다. 주변에는 닝마, 까규, 샤카, 겔룩에 속하는 크고 작은 20여개의 사원이 있어 티베트불교의 면면을 한 지역에서 만날 수 있다. 라싸의 조캉사원에 아침마다 꼬라를 도는 사람들이 몰려오듯 이곳에도 아침이면 몽골계 티베탄들이 왼손으로 염주를 굴리고 오른손으로 마니차를 돌리며 진언과 다리니를 외며 모여들었다. 네팔불교 의례와 음악을 보면 모두가 티베트방식이어서 룸비니 독일사원이 왜 티베트사원 같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네팔불교는 티베트불교라고만 할 수 없으니 네와르족부터 말라왕조로 이어져 온 기층 불교도의 바탕이 있기 때문이다.

카트만두에는 힌두축제와 불교 다나축제 등 끊임없이 축제가 열린다. 이때 각양각색 악대들의 악기 중에 긴 관대를 휘여 올려 부는 나라싱하는 네팔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나팔이다. 서양에서 악기개발이 활발해지면서 긴 관대를 말아서 겹친 호른이나 튜바는 있어도 관대를 휘여 올려서 부는 경우는 없다. 히말라야의 가파른 골짜기에서 양들을 부르고 신호를 보내야 하다 보니 관대를 휘어 올린 것일까? 한국의 태평소, 인도의 쉐나이와 같은 계열의 ‘사하나이’도 관대가 휘어진 것이 있다.

전반적으로 보면 인도나 티베트와 똑같은 악기를 쓰는 악단이 있는가 하면 깊은 산골에서 온 사람들은 그 지역 특유의 악기를 쓴다. 평야와 해안가 등 교통이 원활한 지역은 음악에 있어 지역적 차이가 그다지 없는데 비해 산악지역 사람들은 골짜기 마다 확연히 다른 그들만의 문화가 있다. 그래서 배로 사방을 다니는 일본은 지역 민요토리의 구분이 그다지 없는데 반해 태백산맥에 의해 좌우로 나누이는 한국 민요는 메나리토리와 육자배기토리의 구분이 선명하다. 한국보다 산정과 골짜기가 더 가파른 네팔은 궁중, 민속, 힌두, 불교, 이슬람, 무속, 전통, 파퓰러 등 계열에 따라 고유한 음악이 있듯이 종교문화도 마찬가지다.

윤소희 음악인류학 박사·위덕대 연구교수 ysh3586@hanmail.net

 

[1553호 / 2020년 9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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