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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사문의 의미를 묻는자에게 답하다

사문은 어떤 존재와도 싸우지 않는다

자기생각 빠지지 않는 이가
참 사문이며 올바른 수행자
상대말 듣지 않고 다투는 자
나와 세상 태우는 분노 화신

부처님 당시, 바라문교를 비판하는 일군의 수행자를 ‘사문(samaṇa, 沙門)’이라고 불렀다. 사문은 쉽게 표현하면 ‘자유사상가’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기원전 6~5세기 북인도는 사상적으로 자유롭고 활기찬 시대였다. 그때 등장한 사문에는 부처님도 포함된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사문 고따마(samaṇo Gotamo)’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사문이란 말에는 기본적으로 ‘출가하여 수행에 전념하는 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사문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은 ‘수행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께서 모국인 까삘라왓뚜에 머물고 계실 때였다. 탁발을 마치고 마하 숲에서 대낮을 보내기 위해 어린 벨루바 나무 아래에 앉아 계실 때, 사끼야 족의 단다빠닌(Daṇḍapānin)이 부처님을 뵙고 질문을 던지게 된다.

[단다빠닌] 사문은 무엇을 주장하는 자이고, 무엇을 선언하는 자입니까?

[붓다] 벗이여, 사문은 신들의 세계, 악마들의 세계, 범천[하느님]들의 세계, 바라문과 사문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어떠한 자와도 싸우지 않는다는 사실과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의혹을 벗어나, 회한을 끊고,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갈애를 끊은 그 바라문에게 지각이 경향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선언합니다.

단다빠닌의 질문은 ‘사문은 어떠한 존재입니까?’를 묻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사문은 그 어떠한 존재와도 싸우지 않는 존재’임을 먼저 천명하고 있다. 이는 “상윳따 니까야” ‘뿟빠숫따(Puppha sutta)’에서 “비구들이여,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다툰다”라는 말씀을 상기시킨다. 결국 출가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세상과 다투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것을 전제로 상대를 굴복시키려할 때 다투게 된다. 다툼을 멈추고 수행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좇는 욕망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 수행이란 욕망의 위험을 속속들이 알아 그것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거나 제압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쓸데없는 의심에서 벗어나고 후회할 일을 하지 않는 것, 자기 생각에 빠져 자신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독단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이것이 수행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출가수행자는 어떤 사람이며 성직자란 무엇을 주장하는 사람이냐는 질문에 위와 같이 대답하면 어떨까? 사람들이 이 말에 수긍할까? 아니 실제 당사자(출가자나 성직자)들은 어떤 생각을 갖게 될까? 

부처님의 이러한 가르침에 질문을 했던 단다빠닌은 머리를 흔들고 혀를 삐쭉거리고 이마를 찌푸리며 지팡이를 짚고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며, 답변에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경전에 보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기뻐하며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지만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본다. 이는 자기 생각을 돌이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에 빠진 사람들은 대화를 한다고 해도 이미 결론을 갖고 상대를 설득시키거나 굴복시키려 하지 상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자기 생각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바로 바라문(바라문에게는 지각이 경향을 갖지 않는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바라문은 올바른 수행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붓다] 사람에게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나는데, 그것에 대해 환희하지 않고 주장하지 않고 탐착하지 않으면 그것이 탐욕과 성냄과 견해와 의혹과 자만, 존재에 대한 탐욕, 무지의 경향을 끝내는 것이다.

자기 생각에 빠지지 않고, 그 생각을 즐기지 않으면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 자유로운 상태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나와 세상을 이롭게 하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나게 된다. 자기 생각에 빠져 세상과 다투기를 즐기는 사람은 자신과 세상을 불태우는 분노의 화신일 뿐 수행자가 될 수 없다는 가르침이 이 안에 담겨 있다.

이필원 동국대 경주캠퍼스 교수 nikaya@naver.com

 

[1553호 / 2020년 9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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