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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중도 ③

기자명 박희택

양변을 여의는 동시에 양변을 융합

중도는 정도라는 관점 내재
중도 수행의 도가 곧 팔정도
성철 스님 “쌍차쌍조 없기에
중용은 불교에 비할바 못돼”

사성제의 도성제로 팔정도를 설하신 붓다 가르침에는 ‘중도(中道)=정도(正道)’라는 관점이 내재해 있다. 붓다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양극단을 넘어선 중도[中]의 여덟 가지 바른[正] 도를 제시하면서 팔정도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중정(中正)’의 철학이다.

중도는 중간이 아니며, 양극단의 대극성(對極性)을 합일하는 전일성(全一性, Einheit)이다. 대극성의 합일로서의 ‘중도[中]’는 ‘가장 적확(的確)한 상태[正]’로의 통일이다. 그래서 ‘중정’이다. 중정(중도)을 ‘숫타니파타’ 피안도품에서는 “양극단을 떠났으면서도 중간이 아니고, 중간이 아니면서도 양극단을 떠남”이라 표현하고 있다.

신라의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에서 “이변이비중(離邊而非中), 비중이이변(非中而離邊)”으로 표현했다. 원효의 화쟁(和諍) 또한 일심중도(一心中道)의 다른 표현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성철 스님은 ‘백일법문’에서 쌍차쌍조(雙遮雙照)로 설명했다. 이 용어는 원래 ‘보살영락본업경’에 나오는 것인데, 양변을 여의는 동시에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중도의 경지를 지칭한 것이다. 그러면서 유가의 중용(中庸)에는 쌍차쌍조가 없기에 불교의 중도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단언했다. “유교의 중용과 불교의 중도가 같은 것이 아니냐고 흔히들 말하는데, 전혀 틀린 사상입니다. ‘중용’이란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지은 책인데, 그 책 속에서 희로애락이 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 하고, 희로애락이 나서 적당하게 사용되는 것을 화(和)라고 말합니다.”(백일법문上, 1992) 스님의 법문은 이어진다.

“여기서 인용한바 ‘희로애락이 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 한다’고 하니, 이것이 중도가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누누이 설명해 왔지만 중도란 양변을 여의는 동시에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이므로 중용과는 틀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쌍차쌍조를 내용으로 하는 중도를 바로 알게 되면, 동서양의 모든 종교나 철학이 불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스님의 확신에 찬 법설을 존중하면서도 유가의 중용에 대한 이해도 심화해 나갈 필요가 있다. 중용의 ‘중’은 ‘적중(的中)’을, ‘용’은 ‘범용(凡庸)’을 지칭한다. 범용은 일상성(commonality)으로서 변함이 없음[不易]을 뜻한다. 우리가 날마다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변함없는 삶의 모습이다. 이것은 변함이 없이 지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용’은 ‘지속(持續)’의 의미가 된다.

그러니까 중용은 적중해서 지속하는 지극한 경지이다. 공자는 이것이 참으로 어려워서 자신은 한 달도 지키지 못한다(擇乎中庸 而不能期月守也, 중용7)고 진솔하게 토로한 바 있다. 적중이 ‘중(中)’이라면, 범용은 ‘정(正)’이다. 정(正, 貞)하니까 지속되는 것이다. 이를 ‘주역’ 제31괘인 함괘(咸卦) 효사(爻辭)에서는 정하면 길하고 뉘우침이 없다(貞吉悔亡)고 하였으며, 제25괘인 무망괘(无妄卦) 단전(彖傳)에서는 바르지 않으면 재앙이 있다(其匪正有眚)고 하였다.

중용은 본성과 칠정의 관계를 말할 때는 중화(中和)로 표현되고(중용1), 주체와 상황의 관계를 말할 때는 시중(時中)으로 지칭된다(중용2). 중화의 ‘중(中)’은 희노애락애오욕의 칠정이 발하지 않고 본성에 부합 적중[中]되어 있음을, ‘화(和)’는 칠정이 발하여도 절도에 맞게 조화[和]됨을 뜻한다. 시중은 그 상황[時]에서 가장 적중[中]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화와 시중의 중용을 중정(中正, 중용31)이라 표현하고 있다.

엄밀하게 고찰하면 중화와 시중에는 양변을 여의는 동시에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쌍차쌍조가 없기에 중용은 중도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으나, 중화와 시중에는 적중과 지속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므로 넓게 보면 중용이 쌍차쌍조와 전혀 거리가 먼 것이라 하는 것은 야박하다고 할 것이다. 칠정이 발하든 발하지 않든 중화가 지속되고, 상황이 바뀌어도 그때마다 적중해나간다면 융합적 집중(執中, 맹자 이루하20)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박희택 열린행복아카데미 원장 yebak26@naver.com

 

[1560호 / 2020년 11월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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