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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상자속의 딱정벌레

깨침의 객관적 증명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수행자들 깨침 체험이 전적으로 달라도 차이 확인할 길 없어
깨친 수행자 체험 동일하다고 보는 건 제법개공 교리와 상반
“깨쳤다”는 수행자 있다면 따질 필요 없이 축하해주면 그만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적광, 비로, 구광, 보경, 그리고 적묵 다섯 수행자가 원탁에 둘러앉아 ‘깨침 게임’에 임한다. 그들은 각각 앞에 놓인 작은 상자 안에 스스로의 깨침을 상징하는 벌레를 한 마리씩 가져다 놓는다. 수행자는 자신의 상자 안 벌레만 볼 수 있고 다른 수행자의 것은 못 본다. 모두가 돌아가며 자신의 상자 안 벌레가 무엇인가를 말한다. 적광이 “제 상자 안에는 딱정벌레가 있습니다”라고 하자, 나머지 수행자들 모두 각각 “제 것도 딱정벌레입니다”고 답한다.

위는 20세기 초반 비트겐슈타인이 사용한 예를 법보종찰 해인사 환경에 적용해 본 시나리오다. 그가 제기한 문제는 게임 참가자들이 다른 이의 상자를 들여다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위에서 모든 수행자가 딱정벌레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적광이 실제로 딱정벌레를 가지고 있더라도 비로는 무당벌레, 구광은 방아깨비, 보경은 메뚜기를 가지고 있고, 적묵의 상자 안에는 아무 벌레도 없을 수 있다. 그렇지만 서로 다른 수행자의 상자를 들여다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벌레가 무엇인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위에서 벌레는 의식내용의 비유다. 예를 들어 다섯 수행자가 모두 치통을 겪는다고 호소할 때, 서로가 다른 수행자의 마음속에 들어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각자가 실제로 어떤 감각을 경험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적광이 치통을 앓을 때 구광은 (적광이 느끼는) 찌릿함을 겪으면서도 스스로 “치통”이 있다고 표현할 수 있고, 또 보경은 (적광의) 간지러움을 “치통”이라고 호소할 수도 있다. 수행자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광과 보경은 각각 태어나면서부터 찌릿하거나 간지러울 때마다 얼굴이 이글어지고 신음소리를 내며 이를 움켜잡는 등 치통과 관련된 모든 행위를 보여 왔다. 심지어 의식 속에 아무 감각경험도 없는 좀비 같은 적묵조차도 치통을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

이런 문제의 기원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같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서 겪는 감각경험이 모두 다르다는 데 있다. 불교에 맥락에서는 어떤 감각적 경험이나 체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깨침은 원칙적으로 그 내용을 언어나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객관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한 수행자의 깨침 체험이 다른 수행자의 체험과 전적으로 다르더라도 그 차이를 확인할 길이 없다. 그렇다고 이 다양한 체험 모두를 깨침의 체험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어떤 기준이 제시된 적도 없다.

한편 깨친 수행자가 실제로 모두 딱정벌레를 가지고 있다고, 즉 그들 모두의 체험 내용이 동일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불교적으로 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다. 모든 체험내용이 동일하다는 것은 깨침에 어떤 자성(自性)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제법개공(諸法皆空)을 가르치는 불교의 기본교리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또 위에서 ‘다른 체험들 모두를 깨침의 체험이라고 보아 줄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논했는데, 실은 만약 이런 기준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면 그것 또한 자성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되어 공(空)의 가르침에 위배될 수 있다. 특정 경험이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깨침에 대한 가르침은 이와 같은 문제들을 극복하기 어려운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은 “나는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안다”라는 말은 농담이 아니라면 쓸 수 없는 문장이라는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한다. 불교적 맥락에서라면 “나는 내가 깨쳤다는 것을 안다”라는 주장은 농담 이상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되는데, 이런 아리송한 논의로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는 요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통증과 같이 원칙적으로 소통이 불가능한 감각내용이나 체험에 대한 주장은 그 참 거짓을 가릴 객관적 기준이 없기 때문에, 정당화의 기준이 존재하고 또 그 기준을 객관적으로 따라야만 가능한 앎 또는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상자 속 딱정벌레 이야기와 치통과 간지러움의 예는 우리에게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감각경험 및 체험을 다른 사람과 소통하게 해 줄 객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개인적 체험에 대한 리포트는 이런 기준이 존재해야 가능한 앎과 지식의 차원으로 진입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안다”라는 말은 기껏해야 농담에 불과하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우리가 말을 제대로 하려면 ‘안다’고 하지 말고 그냥 ‘나는 아프다’라고만 해야 한다. “나는 아프다”는 자신의 감각경험에 대한 표현일 뿐이기 때문에 참 거짓을 가려야 할 앎이나 지식의 주장이 아니어서 철학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나는 아프다”는 문장은 근본적으로 “아파!”나 “아야!”와 같은 감탄사의 역할을 수행한다. “신난다!” “좋다!” “아뿔싸!” 그리고 “이럴 수가!”와 같은 감탄사로 된 문장들과 그 역할에 별 차이가 없다. 이런 문장들에 대해 우리는 참 거짓의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개인의 감정에 대한 객관적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실은 처음부터 그런 증명은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쁘다!”라는 말에는 “잘 됐네.” 정도로 답하고, “슬프다!”에는 “안 됐다”로 반응한다. 그 진위(眞僞)를 더 가리려 하지 않는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논의가 철학적으로 옳다고 보기 때문에 “나는 내가 깨쳤다는 것을 안다”와 같은 문장은 문법적으로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비한 경험이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깨침의 주장은 앎 또는 지식의 문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은 “나는 깨쳤다!” 또는 “깨쳤다!”와 같은 문장으로, 즉 감탄사와 그 역할이 동일한 문장으로 대체되어 평가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깨쳤어!” “아하!” “억!” 등과 같은 감탄의 문장들에 대해 더 이상 그 참 거짓의 증명을 요구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한다. 개인의 감각내용이나 체험에 대한 객관적 증명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나는 우리가 그런 증명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깨쳤다!”라는 수행자의 감탄문에 “축하합니다” 정도로만 대응해 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따질 필요가 없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60호 / 2020년 11월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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