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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차이밍량의 ‘행자行者’(2012)

행자의 느린 걸음에 담긴 기억과 사유의 흐름

산책은 철학자의 사색, 작가의 상상력 키운 성장의 밑거름
생각 깊으면 발걸음 느려…속도는 사유의 양·질에 따라 변화
관객은 스님 걸음 시선 따라가며 스스로 인내와 성찰 깨달아

차이밍량의 ‘행자’는 25분 동안 느리게 걷는 한 스님의 모습을 담고 있다. 사진은 영화 ‘행자’ 스틸컷. 
차이밍량의 ‘행자’는 25분 동안 느리게 걷는 한 스님의 모습을 담고 있다. 사진은 영화 ‘행자’ 스틸컷. 
차이밍량의 ‘행자’는 25분 동안 느리게 걷는 한 스님의 모습을 담고 있다. 사진은 영화 ‘행자’ 스틸컷. 
차이밍량의 ‘행자’는 25분 동안 느리게 걷는 한 스님의 모습을 담고 있다. 사진은 영화 ‘행자’ 스틸컷. 

철학자는 산책을 생활화했다. 산책은 철학자들이 사유의 나무를 성장시킨 밑거름이었다. 칸트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산책을 하였으며 하이데거도 산책을 즐겼다고 한다. 산책은 철학자에게는 사색을, 작가에게는 창조적 상상력을 싹트게 한다. 가야산의 소리길은 산책의 명소이다. 가야산은 해인사가 1000년 전에 창건된 곳이며 문인이자 정치가 최치원이 세상을 등지고 몸을 의탁한 곳이다. 주말에 가야산 계곡을 따라 초입에서 해인사에 이르는 소리길을 천천히 걸었다. 소리길 초입은 마을 뒷산으로 난 길처럼 소박하다. 좁은 길은 마을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산 속의 채소밭을 가꿔 길을 낸 것처럼 순박하다. 동네 사람들은 계절마다 무럭무럭 자란 상추와 고추 그리고 잘 익은 오이를 따오는 발걸음으로 길을 낸 것 같다. 소리길은 계곡과 나란히 있어서 한옥 마당에 떨어지는 빗소리처럼 고즈넉한 물소리가 발길을 따라온다. 가끔 붉은 잎을 가득 달고 서 있는 단풍나무 부근이나 키 큰 나무들이 고개 숙이고 도열해 있는 깊은 산길에 당도하면 걸음걸이가 저절로 느려진다. 길이 아스팔트처럼 직선이 아니어서 구불거리고 경사로 인해 오르락내리락 걸음의 속도가 불규칙하지만 줄기가 엷은 노각나무를 만나거나 물줄기가 시원하게 뻗어 내려와 큰 웅덩이를 만드는 계곡의 풍경부근에서 걸음은 정지와 운동을 반복한다. 소리길은 입구와 출구가 정해진 길이지만 그 사이에는 가을의 이미지와 해인사의 기억들이 계곡 물소리를 따라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길을 걷는 것은 걷는 행위에 덧붙여진 수많은 기억과 사유의 흐름을 동반한다. 그 사유의 흐름은 생각의 하중이 많을수록 그 무게만큼 발걸음은 느리게 움직이고 생각이 가벼울수록 속도는 더 빨라진다. 걷는 속도는 분명 사유의 양과 질에 따라 달라진다.  

차이밍량의 ‘행자’는 느리게 걷는 한 승려의 모습을 25분 동안 카메라에 담아냈다. 느린 영화는 사유의 이미지를 길게 늘어뜨린다. 영화평론가 유운성은 ‘영화가 빠져나간 자리를 인간의 물리적인 노동으로 대체하는 것처럼 느린 영화는 영화의 부재를 통해 본질을 직시한다’는 역설을 보여준다고 했다. 느림은 영화의 본질을 사유하게 하는 시간의 속도다. 느리게 걷는 것은 느리게 걷는 시간이 만든 여백에 더 많은 기억과 사색을 기입하게 하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행자’는 법복을 입은 수행자가 거리를 걷는다. 그는 계단에서 내려와 거리를 느리게 걷고 결국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먹는다. 이 단순한 서사로 이루어진 영화는 중국 동영상 사이트 요우쿠(Youku)가 제작한 ‘뷰티풀 2012’의 단편으로 제작되었다. 차이밍량은 ‘애정 만세’를 통해 주목받은 감독이 되었으며 현장 법사가 서역 기행을 통해 불경을 구해 당나라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담은 ‘서유기’ 시리즈를 기획했다. 차이밍량은 현장 법사의 서역 순례를 모티프로 ‘행자’(2012)에서부터 ‘금강경’(2012), ‘몽유’(2012), ‘서유’(2014), ‘모래’(2018) 등 수 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감독은 현장 법사의 서역 순례를 염두에 두면서 ‘느리게 걷는 긴 여정’이라는 만주장정(慢走長征)으로 이름 붙였다. 

‘서유기’는 현장 법사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과 함께 서역에 가서 불경을 구해서 당나라로 돌아오는 과정을 100회로 구성한 역저이다. 삼장법사로 등장하는 현장은 19년 동안 서역을 순례하고 불경을 구해 당나라 수도 장안에 돌아와 불경 번역에 힘쓴 중국 불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고승이다. 현장의 속명은 진위이며 법명이 현장이다. 그는 19년 동안 10만리가 넘는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해 ‘대당 서역기’를 집필하고 불경 번역 작업을 수행했다. 현장은 청년 시절부터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승과에 참여해 정선과에게 “바라건대 멀리는 여래부처님의 가르침을 잇고, 가까이는 선현께서 남기신 불법을 빛내고 싶습니다”라고 깊은 자신의 의지를 보여준다. 또한 서역으로 떠나는 길에 위험함을 이유로 그의 서역행을 만류하는 늙은 호인에게 자신의 결의를 다시 보여준다. 현장은 “빈도는 위대한 법을 구하기 위해 서역 땅에 뜻을 두었습니다. 만일 바라문국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끝끝내 동녘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도중에 죽는다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서역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와 같은 현장의 굳은 결의가 서역행이라는 행(行)의 취지이다.

‘행자’는 현장의 서역행 목적보다는 수행자의 행을 인물의 움직임으로 담아낸다. ‘행자’에 대한 평가는 대체적으로 느린 영화의 개념으로 해석하였다. 하지만 현장 스님의 서역행이 모티프이므로 만행의 시각으로 그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차이밍량은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보를 얻으려고만 하는 일반 관객에게 인내를 요구하는 방식’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연출의도를 피력했다. 그는 관객이 원하는 이야기와 속도를 친절하게 제시하는 것 보다 느리게 걷는 스님의 행위에 대한 질문을 유도한다. 질문은 관객의 인내와 성찰이라는 매개를 통해 제출된다. 법복을 입은 승려는 계단에서 천천히 내려와서 부동산 홍보물이 부착된 거리를 느리게 걸어간다. 걷는 행위는 행위 일치로 연결되어 고가 도로를 걷고 넓은 거리를 걸어가고 아이스크림 판매차량을 지나가고 신문이 쌓여있는 문이 닫힌 출구를 지나간다. 법복을 입은 승려는 걷고 있지만 길이 넓은 거리에서 사람들은 걷는 승려와 카메라를 바라본다. 이 시선은 걷는 승려와 걷는 모습을 촬영하는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소실점은 걷는다는 의미이다. 걷는 것은 관(觀)하는 것이다. 바로 앞의 현상을 눈에 보이는 대로 보거나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바라보면서 걷는다는 행위의 깊은 의미의 바닥을 바라보게 한다. ‘행자’는 승려의 걷는 행위를 통해 ‘걷는다는 의미’ 혹은 수행 자체를 바라보게 된다. 보이는 것은 관객 각자의 마음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자 그림자이다.  

문학산 영화평론가·부산대 교수

 

[1561호 / 2020년 11월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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