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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건탑의 공덕과 불정골 사리 이야기

탑에 봉안된 사리는 모두 진신사리였을까?

수 양제, 아육왕 보탑 세우고자 장간사 탑사리를 일엄사로 옮겨
당시 승려들 “수 양제가 가져간 것은 아육왕이 봉안한 것 아냐”
최근 장간사지서 ‘금제사리’ 발견…1400여년 묻혔던 의혹 밝혀져

2008년 장간사 탑지에서 발견된 금제 사리기. 중국 오월의 왕 전홍숙이 전국에 봉안한 아육왕탑의 전형적 형태이다.

사리신앙과 경전은 중국이나 일본, 우리나라 모두 고대에 불교가 대중화하는데 중심이 되었던 두 축이었다. 특히 탑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으니, 사찰에 가면 누구나 석가모니 진신을 배관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신앙이 더욱 두터워졌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에야 누구나 탑이 무엇인지 잘 알지만, 불교가 처음 성립되기 시작할 무렵에는 탑의 의미나 기능을 모르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생전에 제자들에게 “사리가 있으면 탑이라고 하고, 사리가 없으면 지제(支提)라고 한다.”(‘법원주림’)라고 하여 탑에는 사리가 봉안돼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사실 이는 현재 시각으로 보더라도 탑에 대해 가장 명확하게 내린 정의이기도 하다. 지금도 이 기준으로 탑과 부도를 구별하니, 오늘날 미술사학자들이 감사히 여겨야 할 것 같다. 

석가모니는 더 나아가 제자들에게 탑을 왜 세워야 하는지 그 공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주기도 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태어난 곳과 법륜을 굴린 곳에 큰 탑을 세우고, 또 어떤 사람이 작은 돌을 가져다가 탑을 만든다면 그 복은 앞에서 큰 탑을 만든 것과 똑같다. 둘 다 존중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비바사론’)

이렇게 불교도들에게 탑은 경배와 존숭의 대상이 되었고, 나아가 어느 지역에서 불교가 훌륭히 전파됐는지 아닌지에 대한 상징 또는 불교 전법(傳法) 활동의 이정표와 같은 존재가 됐다.

중국에서 불교 발전 초기에 인도에 갔던 스님들은 특히 불탑들을 예의주시해서 보았고, 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예를 들어 중국 동진(東晉)의 고승 법현(法顯, 337~422)도 그랬다. 그는 장안을 출발해 호탄 왕국을 거쳐 6년 만에 굽타시대 인도에 닿은 뒤, 다시 8년 동안 왕사성 등 숱한 불교 유적을 답사하고 돌아와서 이 대여정을 ‘불국기’에 기록했다. 여기서 그는 “카필라성에는 석가모니의 아버지 백정반왕(白淨飯王)이 살던 고궁(故宮)이 있는데, 후대 사람들이 석가모니가 출가한 곳, 출가 후 돌아와 부왕을 알현하던 곳 등에 각각 탑을 세워 그 사실을 표시하였다. (중략) 또 석가모니가 열반한 이후로 오직 사대탑(四大塔)을 세운 곳에만 불법(佛法)이 이어졌다. 사대탑이란 부처님이 태어난 곳[佛生處], 도를 깨친 곳[得道處], 교법을 설하던 곳[轉法輪處], 열반한 곳[泥洹處] 등에 세워진 탑이다”라고 특필하였다. 법현은 불탑이 있어야 부처님의 법과 가르침이 제대로 전하는 곳이라고 여긴 것이다.
 

장간사 탑지 금제 사리기에 봉안된 불정골 사리. 2010년 중국 난징박물관에서 공개되었다.

중국 사람들이 인도 탑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건 이런 건탑(建塔)의 의미를 소중하게 여겨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탑을 세우는 일 자체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불상이나 불화를 조성하는 것도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거대한 탑을 세우고 또 그 안에 귀하디 귀한 불사리를 넣는 건 보통의 원력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수량이 한정된 데다가 구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불사리이기에 모든 탑마다 불사리가 넣어지는 데에 대해 의구심이 일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탑에 봉안된 사리가 진짜 불사리인지 아닌지 궁금해하는 건 어쩌면 인지상정일 수 있다. 옛날 중국에 그에 관한 흥미로운 고사가 전한다. 

지금의 산시성 시안(西安)은 옛날에 서경(西京)이었는데, 이곳 곡지(曲池) 부근에 수(隋)나라 양제(煬帝, 569~618)가 지은 일엄사(日嚴寺)가 있었다. 양제가 아직 천하를 통일하기 전 한창 세력을 뻗치고 있을 때 사람들의 존경도 얻고 자신의 위세도 과시하고자 불사리를 봉안했다. 그래서 난징의 장간사(長干寺) 탑 밑을 파고 사리를 꺼내와 일엄사의 탑 밑에 묻었다. 그런데 장간사가 자리한 강남(지금의 장쑤성) 지역의 쉰 명이 넘는 스님들이 이구동성으로 양제가 가져간 사리는 아육왕이 봉안했던 그 불사리가 아니라고 했다. 사백 년 전 아육왕은 불사리를 탑 아래가 아니라 장간사 본사에 별도로 봉안했었으니 지금 가져간 것은 진짜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자 강남은 물론이고 서경 일대까지 의혹의 얘기가 퍼지며 술렁거렸다. 하지만 진실 여부는 가려진 채 세월이 지나면서 그대로 잊혔다.

7세기에 편찬된 불교 백과전서인 ‘법원주림’에 전하는 이 이야기는 흥미롭다. 양제가 소중한 진신사리를 옮기면서 제대로 사실 확인도 안 하고 이운했을 리 없는데, 한편으로는 스님들이 괜한 소리 할 까닭도 없어 보여서다. 그저 장간사 처지에서 지역의 지엄한 보배가 다른 자리로 옮겨진 데 대해 늘어놓은 불만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런데 그로부터 1400년이 지나 최근에 어느 정도 진실이 밝혀졌다. 2008년 난징박물관이 대보은사 발굴을 하다 옛 장간사 탑지로 추정되는 유적에 닿았고, 여기서 칠보탑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탑 안에 관 형태의 은제 상자에 넣어진 금제 사리함이 있고, 그 안에서 어른 엄지손톱 2~3배 크기의 사리가 나왔다. 사리함에 ‘佛頂眞骨’ ‘感應舍利十顆’ 글자들이 새겨져 있어서 이것이 바로 아육왕이 봉안했던 불정골 사리임이 분명해졌다. 옛날 양제가 일엄사로 갖고 간 것은 적어도 아육왕이 봉안했던 불사리는 아니었으니, 그때 의심했던 사람들의 말이 옳았다.

이 불사리와 사리장엄은 2010년 난징박물관에서 공개되었는데, 당시 ‘신화통신’ 등 중국 언론에서 역사상 유일한 불정골 사리라고 보도했다. 과연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조선 후기 저명한 학자이며 서예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불정골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불사리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까지 온 것은 제불(諸佛)의 사리가 많았기 때문이나, 모두 석가의 사리만은 아닐 것이다. 불정골도 중국에 흘러가서 우리나라에까지 들어왔다. 오천축 안에 불정골이 한둘이 아닐진대, 어찌 석가의 정골만 있다고 할 것인가? 그리고 진신(眞身)은 부서지지 않는데, 또 어떻게 정골만 따로 전해질 수 있단 말인가?”(“완당집” ‘천축고’)

추사는 불정골이 하나뿐이 아니며 우리나라에도 들어왔었다고 명쾌히 말했다. 확실만 근거는 대지 않았지만, 금석학 및 훈고학 등에 조예가 깊었던 그였기에 그의 말에 믿음이 간다. 우리의 의문을 추사가 다 알고 미리 대답해준 것 같다.

신대현 능인대학원대학 불교학과 교수 buam0915@hanmail.net

 

[1561호 / 2020년 11월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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