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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박봉수의 반가상 : 오래된 사유

기자명 주수완

자신과의 대화, 사유 넘어 무애의 반가상으로

1935년 중국으로 유학…일본이나 유럽 향하지 않은 드문 경우
서양미술이 혁신상징인 시대에 동양화 본질과 파격 동시 추구
세월 간격을 둔 세 작품…화가의 본질적인 사색의 변화 보여줘

반가상, 마지에 수묵 41x26.7, 1931.

지홍 박봉수(智弘 朴奉洙, 1916~1991) 화백을 언급할 때면 항상 ‘경주출신’이라는 말이 따라 붙는다. 경주출신, 그러니까 경주에서 태어난 사람이야 많겠지만, 누구 앞에 “경주출신”이라는 칭호가 붙는다는 것은 그만큼 경주를 빛낸 인물이라는 뜻으로서 일종의 훈장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경주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었다고 하는데, 그때의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일찍부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경주공립보통학교에 진학하여서는 어린 나이에도 본격적으로 그림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1929년, 그러니까 그의 13세 때 그린 <연화에 앉은 소녀>만 봐도 소위 말하는 천재화가란 이런 사람인가 싶은 작품이다. 이미 이 작품에서 그의 추상과 구상을 겸비한 예술성향을 읽어볼 수 있다. 당시 경주공립보통학교 교장은 일본인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 1877~1974)였는데, 경주 문화재와 유적에 많은 애착을 가지고 연구에 매진하여 ‘취미의 경주’라는 책도 출간한 바 있었다. 특히 경주의 수많은 폐사지의 이름을 추적하여 고증하는가 하면, 해방 후 일본에 가있던 유명한 경주박물관의 ‘인면문와당’이 다시금 한국에 기증될 수 있도록 주선하는데도 노력한 인물이었다. 박봉수의 그림 실력은 곧바로 이 오사카 긴타로의 눈에 들어오게 되었고, 이윽고 1930년 박봉수를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했다. 일본에서는 고다마 키보(児玉希望, 1898~1971) 등으로부터 수묵과 유화를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박봉수는 일본의 다소 정형화된 화풍에 만족하지 못하고 1년 만에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여기까지는 다른 근대기 미술가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1935년 그가 중국 북경미술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는 점이다. 일본이나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는 미술가는 있었어도 중국으로 유학을 간 사례는 매우 드문 경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여하간 당시 북경미술학원은 상하이의 상해미술전문학교와 더불어 중국 근대미술을 이끈 쟁쟁한 요람이었고, 저명한 교육자 채원배 선생을 비롯하여 서비홍, 오작인 등의 화가들이 가르치고 원장을 맡았으니, 박봉수 화백에게 그 영향이 컸으리라 생각된다. 그는 아무래도 동양화 분야에서는 우리나라 전통회화에 큰 영향을 미친 중국화단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특히 서비홍 같은 경우는 서양미술의 양향을 받으면서도 오로지 고전주의 미술을 모델로 삼고, 거기에 중국 전통회화를 결합하는 방식을 추구했는데, 이러한 점 역시 박봉수 화백의 그림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반가상, 마지에 수채 63.3x36, 1956.

1937년부터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1939년까지 금강산의 유점사, 신계사 등에 머물며 수행도 하고 창작도 하며 불화도 그렸다고 하니, 이때부터 불교와의 깊은 인연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1939년부터는 지속적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여러 번 입선하는 등 매우 열정적으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해방 후에는 다시 경주에 정착하며 시인 구상, 마지막 신라인으로 불렸던 향토사학자 윤경렬 등과 교류하며 경주의 신라 문화에 대해 깊이 공부하게 되었고, 경주 근화여자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박봉수 화백은 동양화를 전위적인 현대미술의 개념으로까지 끌어올린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사실적 표현이나 외형적인 것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정신을 펼치는 것이야말로 동양화의 특징이라고 해왔지만, 근대기에 있어 동양화는 어느새 진부한 표현이 되어버렸다. 대신 서양의 미술이야말로 혁신적이고 자유로운 표현의 상징이 되어버렸던 시대에 박봉수 화백은 다시금 동양화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디까지 파격적일 수 있는지를 실험하고 보여준 화가였다.
 

청태반가사유상, 마지에 유채, 73.5×54, 1990.

특히 김환기에게 달항아리가 있었다면, 박봉수에게는 반가사유상이 있었다. 1931년 그려진 <반가상>은 그가 일본 유학 중이거나 혹은 정리하고 귀국했을 무렵부터 이미 반가사유상이 그의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속 반가사유상 자체는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옮겨 그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주변으로는 먹의 번짐을 이용하여 한편으로는 광배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얼룩 같기도 한 형태가 펼쳐져 있다. 비록 평온한 사유의 자세이지만, 보살의 정신세계는 자신과의 끊임없는 대화로 치열하게 답을 찾고 있음을 보다 설명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1956년의 <반가상>은 국보78호 반가사유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하면서도 마치 반가상 자체에 푸른 녹이 슨 것처럼 묘사했다. 이 녹은 우리에게 시간을 느끼게 한다. 마치 보살의 사유가 석가모니의 깨달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지는 동안 이렇게 퍼렇게 녹이 슬 정도가 된 것처럼 묘사하여 보살의 사유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결국 사유는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사유는 현재진행형이 된다. 나아가 더 어지럽게 얼룩진 배경은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도 보이며, 이를 통해 보살의 사유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렇게 더욱 치열하게 얼룩진 배경은 이제는 무한한 우주처럼 변해가고 있다. 추상적 형태란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동시에 지닐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어떤 틀에 구속되지 않기 때문이며, 그러한 구속되지 않음, 즉 ‘무애’는 혼돈의 이 세상이기도 하고, 질서의 저 우주이기도 하다. 사유상 속 보살은 처음에는 이 문제를 위해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박봉수의 반가상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이 이중적인 형태의 세상을 그저 관조하고 있을 뿐이다. 

말년인 1990년 작품 속에서 반가사유상은 완전히 파랗게 녹이 슬었다. 제목도 <청태반가사유상>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녹이 칙칙하고 부스러지는 녹이라면, 박봉수 화백의 시간의 녹은 시간이 지나면서 빛나는 녹색이 되었다. 이제는 반가상만 푸르게 된 것이 아니라 그 배경까지 완연한 녹색이 되었다. 그것은 생명이기도 하고, 깨달음이기도 하고, 박봉수 화백에게는 아마도 무애이기도 했을 것이다. 

한국의 반가상이 개성적이고 아름다운 만큼 많은 오마쥬가 있었지만, 반가상을 조각이나 문화재로서가 아니라 박봉수 화백처럼 사유 자체를 드러내기 위한 본질적인 도구로 등장시킨 예도 드물 것이다.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562호 / 2020년 11월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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