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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재를 시작하면서 - 상

“박제된 불교, 기복불교 폐해보다 결코 적지 않아”

사실·지식만 중시한 유럽 불교학 영향으로 ‘불교 교리화’ 초래
‘종교적 감성’ 사라진 불교 신행은 누구에게도 감동 줄 수 없어
부처님 가르침 재생하지 말고 내 이야기로 재현해낼 줄 알아야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는 “꽃에 관한 지식이 감동을 줄 수 없듯, 불교에 대한 지식이 감동을 주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오늘을 시작으로 앞으로 일년 간 법보신문 독자 여러분과 불교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제가 굳이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불교에 대한 이해방식을 반성하고자 함입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불교 신행문화의 한 문제점은 불교를 ‘교리’ 중심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신행에 있어 교리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지만 이것이 지나쳐 불교를 일종의 지식으로 이해하고 있음은 심각히 생각해봐야할 문제입니다.

불교 교리화가 초래한 다른 문제는 ‘종교적 감성의 부재’입니다. 이 감성에 의해 우리는 감동을 주기도 받기도 합니다. 초기불교 이래 불교 전통 대부분에서 강조돼 온 사무량심(자․비․희․사)과 대승보살 사섭법(보시․애어․이행․동사섭)은 불교적 감성에 기초한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출가동기가 그랬고, “중생이 아프니 보살이 아프다”라는 유마거사 언급 또한 일차적으로는 감성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유마의 이러한 언급을 흔히 불이법(不二法)이라고 언급하지만 이런 개념적 이해가 우리 인격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건 아닙니다.

이해를 돕고자 ‘꽃’으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백과사전에서 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됩니다.

“식물의 생식 기관으로 꽃잎, 꽃받침, 암술, 수술로 이루어져 있다.…구조 상으로는 필수기관인 꽃술과 보조기관인 화피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꽃술은 수술과 암술이 있는 데 이를 모두 가진 것을 양성화(兩性花), 하나만 가진 것을 단성화(單性花)라 한다.”

다음은 잘 알려진 김춘수 시인의 시 ‘꽃’ 그리고 ‘꽃 1’의 일부 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꽃”
“그는 웃고 있다. 개인 하늘에 그의 미소는 잔잔한 물살을 이룬다. -꽃 1”

사전에서 꽃은 과학적·논리적으로 우리에게 지식을 전달합니다. 반면 시인은 우리에게 꽃에 대한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꽃은 시인에게 사물화(事物化)된 지식의 대상이 아닙니다. 꽃은 시인의 ‘이야기’로 의미를 발생시키는 매개체이자 의미 그 자체가 됩니다. 그 의미의 세계에서 꽃은 다시 우리 삶의 일부가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으로 돌아와봅니다. 지금 우린 부처님 가르침을 어떻게 전달하고 배우고 있습니까? 조계종에서 발행한 ‘불교개론’은 고성제를 아래와 같이 설명합니다.

“인간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다. ‘색’이란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 일반을 말한다. … 그런데 우리들은 이러한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고 실체화하며 고정화 시킨다. 그럼으로써 고통이 발생한다. 그것이 오취온고의 의미다.”

물론 개론서 목적은 불교역사와 교리를 지식으로 전달하는데 있습니다. 그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지식을 중점에 두고 불교공부를 하며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지식불교의 폐해는 흔히 비판하는 기복불교의 폐해보다 결코 적지 않습니다. 지식불교의 관념성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불교가 가진 근원적 종교성을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지식 불교는 조선 500년 ‘산중불교’를 극복하고자 한 근대 선각자들 의지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근대 식민주의의 한 부산물인 유럽 근대불교학의 영향 탓이기도 합니다. 근대불교학은 불교 역사의 ‘사실’과 객관적 ‘지식’을 중시했습니다.

그 사이 불교는 지식으로 박제됐고 관념적 철학 체계로 변질돼 갔으나 당시 우리나라와 일본의 근대불교 선각자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반겼습니다. 막 밀려들기 시작한 기독교 교세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지식’으로서 불교, ‘철학’으로서 불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동양 근대불교인에게 기독교는 지식이 아니라 신앙을, 역사가 아니라 신화를 내세운 전근대적 종교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은 바로 기독교가 가진 ‘이야기’의 힘이었습니다. 유대 민족종교에서 등장한 예수를 전 인류를 구원하는 그리스도로 전환케 한 것은 신학이 아니라 예수 삶을 인류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로 전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학은 ‘이야기’에 대한 체계적 설명일 뿐입니다.

예수 이후 2000년이 넘는 역사에서 해방·사랑·구원·용서 등 모든 것이 이야기를 통해 전달되고 있으며 다양하게 변용되고 활용돼 왔습니다. 우리 국민에게도 많은 감동을 줬던 영화 ‘레미제라블’이 한 예입니다. 아시다시피 ‘레미제라블’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그 바탕엔 기독교적 의미와 사랑 그리고 구원의 메시지가 깔려 있습니다.

반면 오늘날 우리 불교는 관념적 교리와 역사로 구성된 ‘과거 전통’으로만 이해되고 있습니다. 불교경전에 산재돼 있는 다양한 이야기는 꾸며낸 혹은 방편적 장치로만 이해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불자들은 역사·교리에 대한 수준 높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꽃에 관한 지식이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 없듯, 불교에 대한 지식으로는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김춘수 시인에게 그랬듯, 꽃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김춘수 시인의 시가 그랬듯 새로운 의미로서 우리에게 다가올 때 입니다.

불교지식은 과거의 전통을 ‘재생’할 뿐이지만, 이야기는 ‘재현’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재생과 재현은 과거와 현재의 차이이자 지식과 의미의 차이입니다. 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재생은 삼인칭의 일이지만, 재현은 바로 ‘나’, 1인칭을 통해서만 가능하단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불교인으로 살고자 하는 것은 ‘부처님 삶’을 모방(mimesis)하고자 함이며, 부처님 가르침을 ‘나의 이야기’로 재현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568호 / 2021년 1월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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