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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재를 시작하며

기자명 이병두

한국불교 탄압 역사 살피는 건 미래를 위한 성찰

법난·훼불뿐 아니라 외부세력의 불교발전 저해 사례도 탄압
1911년 6월 총독부 사찰령 반포, 한국불교 근본 뒤흔든 법난
자율적인 산중공의 전통훼손·불교의 세속화 등 후유증 남겨

사찰령을 입안한 총독부 주임 와타나베 아키라.

2021년 신축년 새해부터 2주에 한 차례 ‘근현대 불교 탄압사’ 연재를 통해 법보신문 독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2017년부터 3년 동안 ‘사진으로 보는 불교이야기’를 연재하면서 “이토록 어려운 시기를 견디고 불교가 이만큼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다. 대견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던 기억이 새롭다. 불교뿐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가 ‘탄압 당한 역사’를 갖고 있다. 불교와 기독교, 이슬람은 그 탄압을 이겨내고 세계종교로 발전해갔지만, 크고 작은 탄압에 무너져간 종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한국불교도 온갖 억압을 버텨내고 살아남았다. 이제부터 근대 이후 한국 불교를 힘들게 했던 외부 세력의 압박과 탄압 사례를 찾아내, 이른바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일으켰고 불교계는 어떻게 대처했는지 살펴볼 계획이다. ‘왜 탄압의 역사를 돌아보아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더 이상 그런 억울한 일을 겪지 않기 위해서’이다. 탄압의 역사를 통해 자기 콤플렉스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성찰의 바탕을 다지기 위해서이다. 솔직히 근현대 한국불교는 살아남기만도 힘이 들어서 자신의 역사를 제대로 성찰해볼 엄두도 내지 못하지 않았던가.

탄압(彈壓)을 국어사전에서는 ‘어떤 행위나 사회적 활동을 권력이나 무력 따위로 억눌러 꼼짝 못하게 함’이라고 풀이한다.(‘동아새국어사전’) 우리에게 ‘탄압’과 비슷한 의미로 다가오는 법난(法難)을 같은 사전에서 찾아보면 ‘불교 교단이나 포교하는 사람이 받는 박해’라고 짧게 설명한다. 그러나 ‘가산불교대사림’에서는 “불교가 위정자나 이교도들과의 갈등으로 여러 가지 박해와 재난을 당하는 것. 불교에서 법난이라 함은 교단에 대한 박해뿐만 아니라 불·법· 승 삼보에 대한 모독까지 포함된다”는 개념 정의부터 시작하여, 인도와 중국, 한국의 법난 사례뿐 아니라 포르투갈·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 서구 제국주의 기독교 국가들이 스리랑카·베트남 등 아시아 불교국가에서 자행했던 여러 사례들을 소개한 뒤 마지막으로 1980년에 일어난 10‧27법난의 의의를 설명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불교 역사에서 일어난 특정 사건에 대하여 ‘탄압이다’ ‘법난이다’라고 경계선을 그어 구별하기는 어렵다. 중국 불교에서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이라고 하는 식으로 법난은 길게는 2000년이 훨씬 넘는 각국의 불교 역사에서 영향을 크게 미친 중요한 사건 또는 사태를 지칭하는 데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지만 탄압에는 작은 규모의 사건들도 포함시키고 있으므로, 법난보다 탄압이 훨씬 더 넓은 범위를 담아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연재에서는 그 동안 ‘법난’이나 ‘훼불’ 등의 이름으로 불교계에서 문제를 제기했던 사건과 사태뿐 아니라 외부 세력이 불교 발전을 크게 가로막고 특정 종교에만 특혜를 주었는데도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종교방송·군종장교’ 문제 등의 사례도 찾아내 그 발생 배경과 원인 그리고 그것이 미친 영향 등을 살펴볼 예정이다.

불교사에서는 조선 초기 이래 스님들이 서울에 들어오는 것을 금하던 ‘승니도성(僧尼都城)출입금지’를 완화시킨 1895년을 근대불교의 시작 지점으로 보는 데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으나, 이 연재에서는 편의상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1900년대 초반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의 120년을 시간 범위로 할 것이다.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제의 침략이 더욱 노골해지고 주요 거점에 군대를 주둔시키자 지방 곳곳에서 의병들이 궐기하여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찰이 의병 주둔지가 되었고 그 근거지를 초토화시키려는 일본군이 1907년 9월과 10월에 ‘의병 주둔’을 이유로 경기 화성 용주사, 전남 나주 신륵사, 강원 철원 심원사 등에 불을 질러서 일부는 완전히 소실되기도 했었다.

조선 중기 이래 ‘8도도총섭’이 주석하던 북한산성 안의 중흥사에는 의병전쟁이 한창이던 1907년 이래로 일본군 헌병파견대가 배치되어 ‘사찰 본연의 모습’을 상실한 채 명목만 이어가다가 1909년에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는데, 이 불도 이곳이 의병의 재집결 주둔지가 되는 것을 막으려는 일본군의 방화일 가능성이 높다.

의병 주둔을 이유로 내세운 일본군의 사찰 방화가 겉으로 드러나는 일제의 불교 탄압이었다면, 물리적 압박이 없이 한국불교의 전통을 무너뜨리고, 교단이 자율성을 상실한 채 제도적으로 총독부에 종속돼 버린 1911년 6월의 ‘사찰령’ 반포와 시행은 한국불교의 기본을 흔들어놓은 법난이었으며, 민족이 해방되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까지도 불교재산관리법 등을 통해 계속 영향을 미치는 등 후유증이 오래 이어졌다.

총독부 내무국 사사계(寺社係) 주임 와타나베 아키라(渡邊彰)가 입안·실행한 사찰령의 일곱 조문 중 ‘사찰의 병합·이전·폐지’와 ‘사찰 재산 처분’에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한 것도 문제이지만 1600년 한국불교 역사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본산(本山)제를 시행하게 하면서 주지가 모든 권한을 가지고 전횡할 수 있게 한 것은 산중공의(山中公議)에 바탕해 자율적으로 운영되어온 한국불교의 전통을 완전히 끊어놓았다. 게다가 본산 주지 임명권이 총독에게 있어서 주지는 총독부 지배를 받는 관료와 다름없는 처지가 되어 일제가 요구하는 대로 일본 국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법회를 정기적으로 열게 하는 등 전국 사찰을 일제의 하수인처럼 만들었고, 결국 정치권력의 예속과 한국불교의 세속화를 부추기고 민족해방 이후에도 그것이 이어지는 나쁜 씨앗을 심어 자라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사찰령과 그 시행규칙에 따라 잉태된 ‘주지, 사판(事判) 행정 중심’ 체제가 해방 이후 계속된 분규의 원인이 되었으므로, 사찰령 반포와 강제 시행은 한국불교 탄압 역사에서도 가장 큰 악영향을 끼치고 그 후유증이 어느 법난보다 오래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22년 본산제 폐지를 논의한 30본산주지회의.

일제의 강제 시행에 맞서 1921년에는 선학원을 창설해 사찰령에 영향을 받지 않는 조선불교 확립을 기도하고, 1922년에 열린 30본산주지회의에서는 사찰령에 따른 ‘본산제’를 폐지하는 결의를 하는 등 저항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지만, 총독부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막힐 수밖에 없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에서 최근 ‘교구본사 중심제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 자주 나오고 있는데, “사찰령에 따라 시작된 본산제가 과연 한국불교의 전통에 맞는지, 시대의 변화에 따른 최적의 방안인지?” 등에 대한 진지한 논의 없이 주장만 이어지고 있어서 안타깝다.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beneditto@hanmail.net

 

[1568호 / 2021년 1월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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