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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찢고 마음을 열고

기자명 성원 스님

승가에 도입된 선거 제도로
전통의 합의정신 훼손된 듯
가슴 열어젖혀 속 꺼내보인
대상존자처럼 당당해지길

어릴적 ‘백설이 만건곤 할제 독야청청하리라’는 문구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외운 적이 있다. 

언어란 신기해서 사전적 의미를 알지 못해도 어감이라는 것이 있어 그냥 아는 듯한데 실제 의미도 그렇다. 한자를 알면 바로 뜻을 알지만 어릴 때 한문을 모르고도 어감으로 단어를 익힌 것 같다. 

며칠 전부터 눈이 내리고 또 내린다. 보통 제주는 영상의 온도에서 눈이 내리는데 갑자기 몰아닥친 북극 한파로 오랜만에 영하의 날씨에 눈이 내려 수북이 쌓인 눈길을 걸으며 즐거움을 나눌 수 있어 좋다. 사방에 가득 찬 눈을 보니 어릴적 시조 구절이 분명한 뜻으로 읊어졌다. ‘白雪이 滿乾坤할제 獨也靑靑하리라.’ 한문을 떠올리면서 시를 읊으니 그 풍미가 더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흰 눈이 하늘 땅에 가득할 때 홀로 푸르리라’ 노래하며 생을 마감한 성삼문의 비장함보다는 세월이 평화로워서인지 훨씬 서정적으로 느껴진다.

누구나 외로움 앞에서 스스로 초라하지 않은 삶을 살고자 한다. 흰눈으로 본 모습을 감춰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듯한 눈밭에 홀로 나서니 엉뚱하게도 ‘모든 사람들이 사라져버리는 저승의 길에서 나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힘주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관계지어진 존재로 그 자존을 떠벌리고 있었던 것만 같아서 부끄럽다. 정말 백설이 만건곤 할 때 혼자 푸르름을 지키고 서서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삶을 일구고 싶어진다.

천하가 눈에 싸여 홀로 있어도 당당한 삶을 살고자 출가의 길을 나서 승가 구성원이 되었는데 언제부턴가 도입된 선거제도로 인해 여러 가지 병폐가 생기고 승가는 전통의 합의체 정신이 훼손된 것 같아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선거의 표를 구하기 위해 법랍도 법계도 없이 애걸하기도 하고 때로는 거드름을 피우기도 하는 현실의 모습이 자꾸 출가 본연의 모습 같지 않아 가슴 허전하다.

이 혹한기 코로나 시국에도 은해사 교구장 선거일이 잡히자 3선을 역임한 스님께서 한 번 더 할 뜻을 내비쳤다. 여러 대중들이 만류하는 가운데 나도 스님께 간곡히 불출마를 건의하면서 종단과 불교를 위해 큰 걸음을 걸어가시면 좋겠다고 요청했었다. 스님께서 깊이 사려하시고 출마의 뜻을 접으셔서 참 좋아 보였다. 처음 출가했을 때 “우리 동곡 문중은 예전 고경(古鏡) 노사께서 통도사 대중스님들이 주지 소임을 맡기시자 그날로 통도사를 나가 몸을 숨기셨다”면서 “소임자는 대중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큰 원력이 아니면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일러주시곤 했다.
처음 은해사를 개혁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시작한 본사 주지 소임을 이제는 스스로 물러나시니 내가 너무 심하게 말했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문중의 가치를 잃지 않은 것 같아 아쉬움이 덜 하다.

지금 몇몇 후보 스님들이 이 가득한 눈보라에도 선거운동에 매진하고 있다. 맘 같아서는 서로 잘 합의하여 추대로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다. 후보 스님들은 유권자의 솔직한 마을을 알 수가 없다며 힘겨워하지만 막상 대중 스님들도 후보자를 만나면 마음의 흉금을 터놓고 말할 수도 없다며 안타까워하기는 마찬가지다.

오백나한 중 가슴을 열어젖히고  찢어 자신의 속 모습을 꺼내 보이는  자세의 대상(大相)존자가 있다. 예전엔 무심히 보았는데 누구에게도 자신의 흉금을 당당히 열어 보이는 경지는 아라한과를 증득해야 가능한가 보다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성원 스님

세상사 모든 인연 뒤로하고 길을 나선 스님들이 자유로이 내리는 눈발같이, 가득 쌓인 백설같이 초연히 갈 길을 걸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스스로 하지 못하면서 백설에 망상만 눈보다 더 깊이 쌓이는 것 같다.

성원 스님 약천사 신제주불교대학 보리왓 학장 sw0808@yahoo.com

 

[1569호 / 2021년 1월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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