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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 ① (1) 삼국통일 과정과 역사적 의의 - 상

김춘추 빼어난 외교적 역량이 삼국통일 전쟁서 승자가 된 비결

중국이 수·당에 의해 통일되면서 삼국전쟁은 국제전 양상
치열한 외교전 끝에 당과 맺은 군사동맹이 삼국통일 발판 
김춘추의 외교·김유신의 군사적 재능은 후손들에게 대물림

사적20호 무열왕릉 전경.
사적21호 김유신묘 전경.                           출처=문화재청

7세기 중반 즈음 달성된 삼국통일은 신라의 역사를 전기와 후기로 양분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민족의 전체 역사에서도 특기할 만한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삼국통일이 고구려・백제・신라 3국 가운데 국가의 발전이 가장 뒤떨어졌던 신라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우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 3국의 국가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 각 나라의 전성기를 맞게 하였던 국왕들을 비교하면, 고구려의 19대 광개토왕(391~413)과 백제의 13대 근초고왕(346~375)에 견주어 신라의 24대 진흥왕(540~576)은 무려 150~200년이나 뒤늦게 출세하였다.

신라는 17대 나물마립간대(356~402)에 이르러 비로소 김씨가 왕위 세습권을 확보하고 낙동강 동쪽의 경상북도 일대를 지배하는 연맹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이미 전성기에 도달해 있던 때였다. 신라는 나물마립간대부터 3국의 항쟁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으나, 가야와 왜(倭)를 동원해서 신라를 괴롭히는 백제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서 광개토왕이 파견한 원군의 도움을 받았던 사실을 계기로 고구려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됨으로써 국가발전에 상당한 제약이 되기도 하였다. 나물마립간 26년(381)에 중국의 5호16국 가운데 하나인 전진(前秦)에 사신을 파견함으로써 국제무대에 처음 등장하는 기회를 맞은 적도 있었으나, 고구려 사신을 따라간 것이었고, 1회로 그치고 말았다. 그 뒤 신라가 다시 중국의 왕조와 직접 교류하게 된 것은 무려 140년이나 지난 23대 법흥왕 8년(521)이었다. 그러나 그때도 남조인 양(梁)에 사신을 보내면서 동맹국인 백제의 사행편에 딸려 보내야 할 정도로 국제사정에 어두웠으며, 고구려와 백제에 갇혀있던 상태였다.

한편 신라는 19대 눌지마립간대(417~458)에 이르러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확립하고, 6촌을 6부로 개편하여 중앙집권화를 위한 정책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광개토왕을 뒤이은 장수왕대(413~492)의 남진정책으로 위기의식을 갖게 되면서 그 압력에 벗어나기 위해 눌지마립간 17년(433)에 백제와 군사동맹을 맺고 공동으로 대응하였다. 그 뒤 나제동맹은 120년이나 유지되면서 두 나라 공동으로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대응하게 되는데, 백제가 고구려의 침입으로 한성을 상실하고 웅진(공주)로 국도를 옮긴 뒤에는 이(벌)찬 비지의 딸을 백제의 동성왕에게 시집보내는 혼인을 통하여 동맹을 강화하고 군사적 공동작전을 여러 차례 펼쳤다. 신라는 22대 지증왕대(500~514)와 23대 법흥왕대(514~540)에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정비하였고, 24대 진흥왕대(540~576)에 이르러서는 대외적인 영역확장정책을 추진하여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완전히 차지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한강 유역을 독차지함으로써 공동작전을 수행한 동맹국인 백제의 반감을 사게 되어 120년간이나 계속되던 두 나라의 동맹은 마침내 깨져버렸고,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모두 적으로 돌리는 고립된 존재로 만들었다. 이제는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고, 중국으로의 통로가 가로막힐 위험에 처하였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3국 관계가 변화하던 6세기 후반 이후는 동북아시아 전체의 국제정세도 새로운 긴장이 조성되던 시기였다. 그것은 중국 대륙에서 오랜 동안 분열을 계속해 오던 남북조를 수(隋)가 통일하는데 성공하고(589), 오래지 않아 당(唐)으로 이어졌으며(618), 또 북방의 초원지대에서는 돌궐의 신흥세력이 일어나 수・당을 위협하는 형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만주와 한반도의 북쪽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고구려는 돌궐과 연결하여 수・당에 대항하려고 하였다. 한편 한반도 남쪽의 백제는 신라와의 동맹 파기 대신에 새로 고구려와 연합하고, 바다 건너 왜와 소통하고 있었다. 그밖에 중국 동북지역의 거란과 말갈 세력도 직간접적으로 이러한 국제전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관계의 변화에 대응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두 강국에 포위됨으로써 위기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 신라가 수・당과의 연결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였다. 

이제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남북으로 연결되는 돌궐・고구려・백제・왜의 연합 진영과 동서로 연결되는 수~당・신라의 동맹 진영이 대립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 같은 대립은 십(十)자 형세를 이루어 북쪽에서는 고구려와 수・당 사이에 국가의 명운을 건 대외전쟁으로 폭발되었고, 남쪽에서는 신라와 백제・고구려 사이의 혈투,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신라와 당 사이의 사활을 건 삼국통일전쟁으로 전개되었다. 이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전쟁은 단순히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하는 통일전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동북아시아 전체에 관련된 국제적인 전쟁으로서의 성격을 띤 것이었고, 동시에 신라가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외세에 대항하여 살아남기 위한 사투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선덕여왕 10년(641) 백제의 의자왕이 즉위하고, 다음해(642)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집권하면서부터였다. 그런데 그 통일전쟁과정에서 주요한 변곡점을 이룬 것은 진덕여왕 2년(648) 당에 사신으로 간 김춘추와 당태종 사이에 이루어진 나당군사협정의 체결이었다. 그 협정에 따라 태종무열왕 7년(660) 백제를 멸망시키고, 문무왕 8년(668) 고구려를 멸망시키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다시 7~8년 동안 당과의 치열한 투쟁을 통하여 당의 세력을 한반도 밖으로 축출하고, 평양 이남의 영역을 확보함으로써 문무왕 16년(676) 삼국통일전쟁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실로 삼국통일은 30여년의 사활을 건 투쟁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다시 삼국통일전쟁의 추이를 정리하여 보면 6세기말 중국대륙에서 수・당이라는 통일세력이 대두한 이래 한반도의 북쪽에서는 고구려가 중국의 수・당과 혈투를 계속하고 남쪽에서는 백제가 신라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였다. 특히 해동증자(海東曾子)로 칭송을 받던 의자왕이 즉위하면서 호전적인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군사적 공격을 강화하여 즉위 다음해 7월 신라 서쪽 40여 성을 빼앗고, 이어 다음 달에는 서쪽 방어선의 요충지인 대야성을 함락시키었다. 동시에 고구려에서 새로 집권한 연개소문과 연합하여 신라의 당과 통하는 관문인 당항성(경기도 남양)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이에 신라는 서쪽 방어의 일선을 낙동강까지 후퇴시키고, 당에의 사신 왕래가 위협받는 상태가 되었다. 신라는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김춘추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는 외교적 모험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구려의 집권자인 연개소문이 출병의 댓가로 죽령 서북의 한강 유역의 반환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김춘추 자신도 억류되는 위기를 맞았다. 김춘추의 임기응변의 대응과 김유신이 인솔한 1만명의 결사대의 출동으로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진덕여왕대(647~654)부터 김춘추의 눈부신 외교활동과 김유신의 치열한 군사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이 두 사람은 삼국통일전쟁을 주도하였다. 국제전쟁의 성격을 띤 삼국통일전쟁에서 외교와 군사 두 분야가 국운을 좌우하는 요소가 되었는데, 김춘추와 그 아들들은 외교 분야, 그리고 김유신・김흠순 형제는 군사 분야를 분담하여 삼국통일의 주인공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김춘추는 통일전쟁의 주도권을 놓고 고구려의 연개소문, 및 백제의 의자왕과 치열한 외교전을 펼치게 되는데, 김춘추의 외교적 완승이 삼국통일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김춘추의 외교활동은 그 아들들에게 계승되어 7명의 아들 가운데 첫째 김법민・둘째 김인문・세째 김문왕 등 3인이 각각 당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특히 김인문은 7번이나 당에 다녀왔으며, 그곳에 머문 기간을 합하면 무려 22년간이나 되었고, 삼국통일을 완성한 뒤인 효소왕 3년(694) 당에서 생을 마쳤다. 그리고 김유신의 군사활동은 그의 형제로 이어졌는데, 특히 문무왕 8년(668) 김인문과 함께 고구려 원정군을 지휘한 장군이 김유신의 동생인 김흠순이었다. 또한 김흠순의 아들 반굴과 손자 김영운 등도 삼국통일전쟁에 참여하였는데, 김영운은 소년으로 아버지를 따라 태종무열왕 7년(660) 백제와의 황산벌 전투에 참여하여 품일의 아들인 관창에 앞서 장렬히 전사함으로서 신라군의 사기를 높였다.

한편 27대 선덕여왕이 즉위하면서 신라는 대내적・대외적 양면에서 국가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장녀로서 노년에 즉위하였으나, 실제 정권을 담당하지 못하고, 왕실의 원로대신인 을제가 국정을 총괄하였다. 그리고 상대등(상신) 수품과 내성사신 용수 2인이 권력의 실세로 등장하여 귀족공동의 과두체제 형태의 지배체제를 운영하였다. 그 결과 국왕의 권위는 실추하였고, 국정은 효율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대내적으로 불안한 정치적 상황에서 치열해진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당에 원군을 요청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당태종은 신라의 위기에 대한 처방책으로 선덕여왕의 교체안을 제시한 바도 있었다. 마침내 선덕여왕 16년(647) 1월 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 비담이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구실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르렀고, 여왕은 반란 중에 세상을 떠났다. 선덕여왕을 이어 28대 진덕여왕이 즉위하였으나, 역시 정권을 직접 장악하지를 못하고 국정은 귀족연합의 과두체제 형태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비담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김유신이 발군의 활약으로 군사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그의 지원을 받은 김춘추가 정권의 실세로 등장하여 내치와 외교를 관장하게 되었다. 김춘추는 먼저 진덕여왕 원년(647) 일본에 사신으로 갔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다음해(648) 당에 가서 우대를 받고, 마침내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군사동맹협정을 체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보다 3년 앞서 고구려에 친정(親征)으로 대규모의 원정군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낙담하고 있던 당 태종이 김춘추의 요구를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 협정의 중요 내용은 먼저 백제를 정복한 뒤 고구려를 남북에서 협공하는 전략과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의 이남, 백제의 토지는 모두 신라가 영유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 협정에 따라 태종무열왕 7년(660) 나당연합군은 백제를 쳐서 멸망시키게 되었는데, 이로 보아 김춘추와 당 태종의 군사협정 체결은 사실상 삼국통일전쟁의 출발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71호 / 2021년 1월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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