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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님들 못 깨닫는 결정적인 이유 있다

기자명 법보
  • 기고
  • 입력 2021.02.04 17:18
  • 수정 2021.02.05 19:43
  • 호수 1573
  • 댓글 46

기고-부산 작은절명상센터 일진 스님

화두 끊기는지 아닌지 문제로 선원서 평생 씨름하는 스님들 많아
‘오매일여’는 잘못된 수행론…‘육조단경’ ‘전등록’ 등에도 안 나와
선의 종지는 ‘직지인심견성성불’…오매일여 매여 허송세월 말아야

일진 스님은 “의식적으로 붙잡는 것은 생멸법이기에 그 무엇이라도 반드시 끊어질 수밖에 없고 화두도 마찬가지다”라며 “잠을 잘 때나 꿈속에서나 꿈도 없는 깊은 잠속에서나 화두가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은 병리적 착각이다”라고 지적했다.
일진 스님은 “의식적으로 붙잡는 것은 생멸법이기에 그 무엇이라도 반드시 끊어질 수밖에 없고 화두도 마찬가지다”라며 “잠을 잘 때나 꿈속에서나 꿈도 없는 깊은 잠속에서나 화두가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은 병리적 착각이다”라고 지적했다.

부산 해운대구 작은절수행센터 교장 일진(日震) 스님이 한국 선수행 문화와 관련해 2월4일 기고를 보내왔다. 일진 스님은 1979년 송광사에 입산해 1985년부터 문경 봉암사 선원을 비롯해 송광사, 통도사, 해인사 등 제방 선원에서 30년 넘게 선공부에 매진했다. 현재 블로그( https://blog.naver.com/existinggg)로 대중과 소통하며 선수행과 조사어록을 지도하고 있다. 편집자

한국불교 선가(禪家)의 스님들 중에는 화두가 일념(一念) 여부를 가지고 평생 씨름하는 분들이 많다. 조주의 심처(心處)를 깨달으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끊기느냐, 안 끊기느냐로 헤매다 보니 도무지 답이 나오지를 않는다. 이 같은 잘못된 관념으로 우리 절집 선공부 풍토는 이미 관념화 되어간다.

나이는 먹어가고, 몸은 여기저기 아프고, 타성에 젖어 생동감도 없고, 무기력해진다. 기약 없는 시간을 보내니 좌절감과 해태심도 커진다. 이렇게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 우리 선가의 민낯이다.

근래 어떤 큰스님께서 ‘오매일여(寤寐一如)’를 이야기하시며 “일체의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아야 되며, 아뢰야식에 가장 깊숙이 자리 잡은 미세망념까지 끊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시고 깨달음의 척도로 삼았다. 나도 한때 이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정진하면서 절망하고 자괴감으로 괴로워했었다.

큰스님은 깨어있는 의식 상태[寤]와 잠든 의식 상태[寐]가 24시간 일여(一如)함을 의지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화두로 잠속에서도 꿈과 꿈 없는 상태를 자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죽기 살기로 화두를 공부한다면 화두일념이 언제나 뇌 속에 함께 하게 되고 비로소 화두가 충분히 익어 타파(打破)될 때가 가깝다고 했다.

큰스님께서 그 말씀을 하셨기에, 우리는 그 권위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이 사실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후학들에게 심각한 오해를 초래한다. 화두선이 없었던 대혜 스님 이전의 선사들은 못 깨달았다는 말인가? 달마, 오조홍인, 육조, 마조, 백장, 임제, 덕산, 암두, 설봉, 조주, 황벽, 위산, 운문, 원오, 대혜, 고봉, 무문 등등 대체 누가 ‘오매일여’를 통해서 도를 깨달았는가?

8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오매일여를 말하지 않았다. 선사의 언하(言下)에 직지인심(直指人心)해서 또는 기연(奇緣)을 통해서 깨치면 될 뿐이다.

당송시대 깨친 선의 종장(宗匠)들의 오도기연(悟道奇緣)을 모아놓은 ‘전등록’에 ‘오매일여’라는 단어는 단 한군데도 나오지 않는다. ‘육조단경’에도 ‘오매일여’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육조혜능 문하의 마조, 백장, 암두, 설봉, 황벽, 임제, 덕산, 조주, 위산, 운문, 원오, 대혜, 무문혜개, 고봉, 등 화두선을 해서 ‘선정의 힘’을 키워야 한다거나 ‘몽중일여’ ‘오매일여’에도 화두가 성성하면 깨달음에 가깝다는 가르침 역시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육조단경’과 ‘전등록’에 오매일여란 단어가 단 한군데도 나오지 않을까? 이상하지 않은가?

‘서장’에는 대혜가 스승 원오에게 낮에는 화두가 늘 여여한데 잠만 자면 화두고 뭐고 몽땅 없어져버린다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원오는 "그게 망상이다. 그저 깨닫기만 하라"라고 일러준다. 훗날 대혜가 마침내 깨닫고 보니 비로소 “꿈꾸는 때가 바로 깨어있는 때요, 깨어있는 때가 바로 꿈꾸는 때”라는 것을 깨치게 된다. 깨닫고 나면 “자나 깨나 한결 같다”는 의미를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결코 잠속에서도 화두를 성성하게 붙들었다는 말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오매일여를 강조한 것은 몽산덕이(1231~1308?)이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근래 사용하는 오매일여와는 차이가 있다. ‘몽산법어’의 ‘시총상인(示聰上人)’조에 나타나듯 화두일념이 오매일여가 되어 실제적 화두선정 경지가 돼야 비로소 깨닫는다는 말이 아니라 곧장 ‘회광자간(廻光自看)’해야 깨닫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깨달음의 기준을 오매일여라는 의식상태의 유지 여부로 규정짓는다면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한다.

의식적으로 붙잡는 것은 생멸법(生滅法)이기에 그 무엇이라도 반드시 끊어질 수밖에 없다. 화두도 마찬가지다. 잠을 잘 때나 꿈속에서나 꿈도 없는 깊은 잠속에서나 화두가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은 병리적 착각이다.

굳건한 의지로 화두를 24시간 이어가는 오매일여를 지향하는 것이 수행의 정도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좇는다면 심각한 오해를 초래해 헛된 세월만 보내게 될 것이다.

붓다와 선의 종장들은 ‘심즉시불(心卽是佛)’ ‘비심비불(非心非佛)’ ‘무심무불(無心無佛)’ 등으로 간명하게 최상승선을 제시했다. 최상승선은 곧바로 불성을 보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이다. 불성[眞如]은 처음부터 잠을 자지 않는다. 의식이 잠들 뿐이지 불성은 애초 24시간 오매일여하다. 온통 불성임을 깨닫는 것, 그것이 최상승선(最上乘禪)이다. 선의 종지는 ‘직지인심견성성불’이지 오매일여가 절대 아니다.

깨달음은 늘상적으로 쉽게 일어나는 것이다. 어록에 나오는 노파들과 재가자들…. 밭 매던 할매도, 쟁기질하던 할배도, 지나가던 선사의 말 한마디에 몰록 순간적으로 깨닫는다. 그래서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쉽게 깨달음이 일어난다. 깨달음은 이론도 논리도 아니다. 생각 틀 밖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생각을 해도 생각하는 자가 없고, 말을 해도 말하는 자가 없고, 꿈을 꿔도 꿈꾸는 자가 없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49년간 설하시고도 한마디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하루에 생각들이 5~6만 가지 일어난다고 한다. 어떻게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돌덩이 흙덩이가 아닌 다음에야.

‘유마경’에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든다’(不斷煩惱 入涅槃)거나 조사어록에 ‘번뇌가 곧 깨달음(煩惱卽菩提)’ ‘한 번에 바로 여래지에 이르는 것(一超卽入如來地)’ ‘말끝에 단박 깨닫는다(言下大悟) 기연(奇緣) 등은 무엇을 말함인가? 깨달음은 논리가 아니다. 그냥 생각 이전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일진 스님
일진 스님

한국불교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서양에서는 깨달은 자들이 수시로 나오는 세상이다. 서점에 가 보시라 그들의 책들이 즐비하다. 한국불교가 이렇게 뒷걸음치는 동안 대만이나 티베트 스님들의 설법을 들어보면 우리 한국 스님들 보다 훨씬 앞서 있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각종 경전과 논서, 인문학과 서양의 현대 심리학 등을 자유자재로 아우르며 방편설을 하며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한다. 깨달음은 논쟁이 아니다. 더 이상 논쟁하지 말라.

[1573호 / 2021년 2월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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