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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끝까지 계율을 지키다

계율 어겨가며 오래 살기보다 마지막까지 청정함 잃지 않아

입적 앞두고 미음 권하자 ‘오후불식’ 어기지 않으려고 거절
유행병 앓던 중 의원이 동물 성분 섞어 처방하자 죽음 선택
지계 엄격했던 율사, 60년 동안 누더기 가사로 지내다 입적

혜원 스님은 여산에 정착한 뒤 35년간 산문 밖을 나서지 않았으며, 죽음의 순간까지 계율을 지키며 청정하게 살았다. 사진은 혜원 스님이 머물렀던 여산 동림사. 법보신문 자료사진.
혜원 스님은 여산에 정착한 뒤 35년간 산문 밖을 나서지 않았으며, 죽음의 순간까지 계율을 지키며 청정하게 살았다. 사진은 혜원 스님이 머물렀던 여산 동림사. 법보신문 자료사진.

계율은 불교의 정체성이며 승가공동체를 지탱케 하는 근간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수많은 이가 계율에 의지해 진리의 길로 나아갔고 깨달음을 이뤘다. “내 차라리 계를 지니고 하루를 살다가 죽을지언정 계를 어기며 백년을 살기 원치 않는다”던 신라 자장율사처럼 계율을 지키기 위해 어떤 고난이나 죽음까지 기꺼이 감수했다. 역사서에는 죽음의 순간에서조차 계율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고자 했던 스님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중국 동진 때 고승인 여산혜원 스님(廬山慧遠, 334~416)은 승속의 제자들과 백련결사운동을 전개한 중국 정토종의 조사다. 수많은 군벌왕조가 생겨나고 스러져갔던 망국과 살육의 시대를 살았던 혜원 스님은 최고 교육기관인 태학에서 공부한 수재로, 젊은 시절부터 탁월한 식견으로 유명했다. 이런 그가 우연히 도안 스님의 ‘반야경’ 설법을 듣고는, “유교와 도교 등 아홉 학파가 모두 찌꺼기에 불과하다”며 불문에 들었다. 불경의 깊은 세계에 심취한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경을 읽고 정진했다. 불과 3년 만에 혜원 스님에게 강의를 맡겼던 스승 도안 스님은 “중국불교 앞날이 저 사람 혜원에게 있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혜원 스님은 여산 동림사에 정착한 후 평생 그곳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그의 명성은 강남 전역에 미쳤다. 해박한 지식과 수행력, 무엇보다 청정한 계행은 수많은 이를 감화시켰다. 유유민, 종병, 뇌차종, 주속지, 도연명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여산을 찾아와 기꺼이 혜원 스님의 제자가 됐다.

군벌들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해 혜원 스님을 정치권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회유하고 협박도 했지만 혜원 스님의 마음을 끝내 움직일 수는 없었다. 동진의 최고 권력자 환현(桓玄)이 불교 교단을 향해 왕권에 대한 종속을 요구하자, 오히려 혜원 스님은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써서 그것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출가자를 세속의 권위에 복종시키려는 것은 자유가 생명인 출가자를 세상의 그물에 걸리게 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중생까지 구제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젊은 폭군 환현도 마침내 “불법은 크고 위대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군주를 받드는 마음을 헤아려 그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공경을 표하는 것을 허락한다”며 승단의 특성을 인정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양나라 혜교 스님이 편찬한 ‘고승전’(519년)에는 혜원 스님이 살아서는 물론 마지막 순간까지 계행에 철저하려 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416년 8월 초, 83세의 혜원 스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됐다. 6일째 되던 날 병이 더욱 위중해졌다. 누군가 된장을 넣은 술이 효험이 있을 거라고 말하자 원로 스님들과 대중이 이를 마실 것을 간곡히 권했다. 그러나 혜원 스님은 “율장에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잠시 후 원로들이 쌀로 쑨 죽을 드시라고 권하자 “정오가 지났다”며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출가자는 오후에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오후불식(午後不食)’의 계율 때문이었다. 대중이 이번에는 꿀물을 타서 권하니 “율장에서 허용하는지 확인하라”고 말했다. 제자가 율장을 뒤적이는 동안 위대한 신앙의 수호자이자 엄격한 계율의 실천자인 혜원 스님은 적멸에 들었다.

이렇듯 마지막까지 계율에 철저한 혜원 스님이었기에 3000여명이 넘는 스님과 지식인, 황제를 비롯한 최고 권력자들까지도 그를 깊이 존경하고 신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입적을 앞두고 계율을 엄수하려는 모습은 당나라 초기의 혜군(慧頵) 스님에게서도 잘 나타난다. 스님은 어려서 출가에 뜻을 두었으나 대를 이어야 한다는 부친의 반대로 번번이 뜻을 접어야했다. 그는 불교를 공부할수록 심오함에 탄성을 자아냈고 출가에 대한 염원도 간절해져갔다. 결국 그는 부친에게 “출가를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맹세코 더 이상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선언했다. 깜짝 놀란 부친은 아들이 목숨을 끊을까 두려워 그를 사찰 대신 결혼이 가능한 도교사원에 보냈다. 부친의 뜻에 따라 그곳에서 수련하던 혜군은 도교의 목적이 불로장생 추구에 있음을 알고는 크게 낙담했다. 모든 번뇌와 의문점을 해결할 수 있는 궁극적 진리 추구와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법화경’을 몰래 구해 공부를 시작한 그는 곧 그것을 모두 외웠고, 깊은 뜻까지 이해할 수 있었다. 혜군 스님은 불문에 들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때마침 나라에서 승려를 공식으로 인정하는 도첩을 내린다는 소식을 듣자 곧바로 일정 과정을 이수하고 스님이 됐다. 부친과 가족들이 뒤늦게 그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국가에서 허가한 일이라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출가 후 ‘법화경’을 비롯해 ‘중론’ ‘백론’ ‘반야론’ ‘유식론’ 등 수많은 경전을 익혀나갔다. 몇 해 뒤 혜군 스님이 경전 강의에 나서면서 스님의 이름도 널리 알려졌다. 경전의 오묘한 뜻을 펼쳐 보이고 알기 쉽게 설명하는 데 스님을 따라갈 이가 없었다. 강백이면서 율사였던 스님은 일거수일투족이 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제자들에게도 늘 “불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지계(持戒)가 청정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해마다 정기적으로 계율을 강의했다. 이런 청정한 행으로 백성들은 혜군 스님을 숭모했고, 황실에서까지 스님에게 법문을 청해 들었다.

세월이 흘러 혜군 스님이 74세가 되던 637년 여름, 중풍을 앓던 스님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다. 이때 스님은 문도들을 불러 말했다.

“오래지 않아 이별을 할 것 같네. 이런 때일수록 몸가짐을 신중히 하되 애석해할 것은 없네. 만약 내 정신이 혼미해져서 때가 아닌데 음식을 찾더라도 내게 먹을 것을 절대 주어서는 안 되네.”

혜군 스님은 제자들에게 신신당부한 뒤, 자신의 겨울 승복을 잘라 수의를 만들게 했다. 그 후 스님이 사경을 헤맬 때 미음을 찾기에 문도들이 “재시(齋時: 공양시간)가 지났습니다”라고 말하자 곧 입을 다물고 다시는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해 7월26일 입적한 혜군 스님의 언행은 마지막까지 계율에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그의 문도들도 눈물을 머금고 스승이 끝까지 청정할 수 있도록 도왔다.

문도들은 남산 풍덕사 동쪽에 암석을 뚫고 감실을 만들었다. 그곳에 스승의 시신을 안치하고, 비를 세워 스님의 덕을 기렸다. 제자가 쓴 혜군 스님의 비문도 뭉클하다. 15살에 출가해 20여 년간 혜군 스님을 직접 모셨던 제자는 “이곳에 좀 더 머무르며 공부하라”며 눈물로 만류하던 스승을 뒤로하고 만행을 떠났었다. 잠시 갔다 온다던 제자가 10년이 지나 돌아와 보니 스승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비통함으로 스승의 행장을 써내려간 제자의 비문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나는 도를 듣는 일에 용기를 내서 곧 돌아오겠다고 하였는데, 뜻밖에 나무에 부는 바람은 시끄럽기 쉽고 흘러가는 강물은 고요하기 어려워, 갔다가 돌아오는 데 10년이나 걸렸네. 그런데 스님은 무심히 세상을 떠나셨구나. 아, 슬프도다.”

이들 스님 외에 약을 잘못 복용해 돼지고기로 약기운을 눌러야 한다는 의원을 말에 “어떻게 다른 생명체를 희생할 수 있겠냐”며 젊은 나이에 죽음을 받아들인 당나라 도무(道撫) 스님, 유행병에 걸려 의원이 동물의 지방성분을 섞어 만든 약을 처방하자 이를 거절하고 깨끗이 몸을 씻은 뒤 입적한 양나라 혜소(慧韶) 스님도 비슷한 경우다. 이런 사례는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와(應和) 원년(961) 2월18일 대중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율사 도다이지(東大寺)의 묘유(明祐) 스님도 입적을 앞두고 며칠 째 아무것도 먹지 못할 때였다. 노심초사하던 제자들이 죽이라도 올리게 해달라는 간청에 “공양 때가 지났다. 평생 그런 일이 없었거늘 하물며 떠날 때가 가까운 지금 어찌 그것을 깨뜨리겠느냐”며 거절한 뒤 염불하며 입적에 들었다. 세수 84세였다.

수나라 때 승조(僧照) 스님도 율사다웠다. 청정한 계행으로 수문제의 공경을 받았던 스님은 황제가 두 차례나 칙사를 보내 황궁으로 올 것을 요청했지만 완곡히 거절할 정도로 세속과 거리를 두었다. 스님은 구족계를 받고 60년 동안 가사 3벌[三衣]로 일생을 지냈기에 깁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온통 누더기였지만 스님은 입적 때까지 늘 정성껏 수지(受持)해 몸에서 떨어지지 않게 했다. 시자 등 다른 이가 옷을 들려고 하면 무겁기가 태산 같아 끔쩍 않다가도 스님이 들어 올리면 깃털처럼 가벼웠다고 한다. 사람들은 생전 스님이 보였던 숱한 신이함이 청정한 계행에서 비롯됐다고 여겼다. 611년 스님은 세수 83세 법납 60세로 율장에 어긋남 없이 세연을 마쳤다. 이들 모두 계율을 어겨가며 오래 살기보다는 마지막 순간까지 계율을 지키고자 했던 스님들이다.

이재형 편집국장 mitra@beopbo.com
 

[1574호 / 2021년 2월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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