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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詩’를 찾아서-[23] 雲水詩

기자명 김종만
  • 동정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길위에서 진리의 탐색 행위 詩化
자연과 세상 융합하는 禪味 일품

구름처럼 물처럼 정처없이 떠도는 선자들의 삶을 읊은 시가 운수시다. 천하를 유람하며 만행하는 운수납자들에게 수행처는 굳이 산만을 고집하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재로운 수선(修禪)의 길을 바람에서 얻고 산에서 얻고 구름에서 얻으며 어느 곳이나 도량 아닌 곳이 없는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 비록 산을 떠나 운수의 길을 걷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시비곡직에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철저히 자기의 ‘마음 비움’ 자세로 세상과 자연을 관조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3일 동안 한 곳에 머물지 말라’는 수행과 전법의 당부를 어쩌면 이들이 자연스레 실천했는지 모를 일이다.

운수시의 대상은 온갖 자연이다. 스스로 나그네가 되어 떠도는 납자들의 발길은 자연과 하나가 된다. 단풍, 흰구름, 물 소리, 매미소리 모두가 있는 그대로의 빛과 소리다. 운수납자들은 그 속에 대립이 없이 동화된 작자들이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매미소리 듣기까지 그저 물 흐르듯이 흘러가고 또 흘러간다. 운수시의 아름다움은 시정(詩情)과 선사(禪思)가 절묘하게 결합되고 있는 점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운수시를 감상해보면 저마다 선기의 묘지를 담고 있으면서 자연의 서정을 읊고 있다. 하지만 시를 읊게 되는 동기에 따라서 납자들의 의취(意趣)가 각각 다르다.

시정과 선사가 운수시라는 형식에서 만나게 되면 선지의 뜻이 깊기에 세상의 사려가 사라질 수 있고 거기에서 돋아나는 시정이기 때문에 사람을 감동시키고 놀라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시가 시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를 함축한 진리의 세계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고 이렇게 이루어진 시이기 때문에 그 격조가 더하다. 운수시가 선시로서의 절대적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납자들은 머나먼 정처없는 길위에서도 진리의 탐색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시흥이 돋아나면 직관의 경지로 이를 시화했고 자연의 울림을 선지로 담아냈다. 운수납자들에겐 자연의 진리가 바로 깨달음의 근원이었으며 이 깨달음의 본체를 표현해 낸 것이 시다.

이 시로 나타난 모든 것이 불리(佛理)다. 자연의 서경을 읊을 때 불리를 표현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가 바로 불리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대표적 운수시인은 매월당 김시습이 꼽혀진다. 그의 시에서도 나타나듯 운수의 골짜기엔 산과 강을 바꿔놓을 당찬 선적 기백이 놓여있고 때로는 자연과 세상을 융합하는 선리(禪理)의 가르침이 있다.

우선 중국 선종의 가장 대표인 운수송으로 꼽을 수 있는 포대화상(布袋和尙 ?∼916)의 운수시를 살펴보자.

한 그릇으로 천가의 밥을 빌면서
외로운 몸은 만리를 떠도네
늘푸른 눈을 알아보는 이 드무니
저 흰구름에게 갈 길을 묻네.

一鉢千家飯 孤身萬里遊
靑目睹人少 問路白雲頭

포대화상은 포대 자루 하나를 어깨에 메고 일생동안 떠돌던 수행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그의 떠돌이 심정이 이 시에 남김없이 잘 드러나 있다. 그의 유일한 재산이랄 수 있는 발우 하나로 그는 천가(千家)의 밥을 빌면서 세상을 정처없이 유람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예사 수행자가 아니다. 그의 만행은 깨달은 이의 전법행위다. ‘청목(靑目)’은 ‘깨달은 이의 눈’이다.

포대는 깨침을 얻은 각자의 신분이었지만 그것을 알아보는 이는 드물다고 독백처럼 말함으로써 깨달은 이의 외로움을 진하게 표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포대는 여느 선사들처럼 일정한 산에 주처하려는 욕심은 전혀 내비치지 않는다. 흰구름에게 자기의 갈 길을 물어 발 길 닿는대로 운수하려는 ‘외로운 자유인’의 심정을 읊고 있다. 수많은 선자들을 제접하며 본지풍광을 발산하는 여타 산주(山主)의 선사들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면서 포대 특유의 행장과 사상이 잘 어우러져 있다.

아련한 젖대소리 고성에서 들리나니
십릿길 산은 점점 아득해지네
이 한가락의 무진한 정취여
무심한 길 손의 애간장 다 녹이네.

幽幽寒角發孤城 十里山頭漸杳冥
一種是聲無限意 有堪聽與不堪聽

임제종 문하 양기파의 3대 법손 오조법연(五祖法演 ?∼1104)의 운수시다. 시상에 군더더기가 전혀 없어 절제되고 절제된 수묵화 한편을 연상케 한다. 법연은 일대사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산과 회림(會林)을 찾았던 이력을 갖고 있다. 이 운수시는 그 과정에서 읊은 법연의 심정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그는 촉의 성도에 있는 강석에 참석해 유식교학을 학습하다 일대사 의문을 일으켜 변경 혜림원의 원조종본에게 참알해 고금의 인연을 회진하게 됐고 이어 종본을 떠나 서주부산의 법원에게 알현, 청익했다. 하지만 법원 역시 늙었음을 이유로 백운수단을 찾아 참구하면 대오할 것이라 하며 그의 회하에 들어가도록 했다.

백운의 회하로 들어온 법연에게 “수명의 선객이 노산으로부터 왔는데 이들은 모두 오입처가 있어서 그들로 하여금 불법을 설하게 하면 설할 수 있고(說得), 인연을 들어 물으면 밝힐 수 있고(明得), 또 하어토록 하면 하어(下語)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철저하지 못하다(未在)”고 했다. 이미 깨달았고 설할 수 있고 밝힐 수 있는 자들인데 철저하지 못하다니 법연은 대의단에 봉착, 여러날 고수(苦修)한 끝에 대오철저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이후 황매산에 개당하고 가풍을 드날렸다. 이런 그가 남긴 운수시는 당시의 심정이 잘 묻어있다. 깨침을 구하기 위해 잰 걸음을 하는 그에게 ‘십릿길 산은 점점 멀어진다’는 내용과 아름다운 정취가 길손의 애간장을 녹인다는 말은 운수행각의 심정 그대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물따라 구름따라 정처없이 떠도는 나그네의 심정을 잘 읊은 시다.

바다 하늘은 넓고 연못은 깊은데
솔그늘 아래 내려와 솔바람 거문고 소리를 듣네
내일이면 또 바람 따라 어디로 가려는가
저 흰구름 더불어 그저 무심할 뿐이네.

海天空闊九皐深 飛下松陰聽鼓琴
明日飄然又何處 白雲與爾共無心

청대의 선승 소만수(蘇曼殊 1884∼1918)의 작품이다. 시의 도처에서 시정과 선리가 뒤얽혀 굽이치고 있다. 운수납자의 무심한 행각이 잘 드러나 있다. 가다 지치면 솔그늘 아래서 바람소리를 거문고 삼아 쉬고 기약없는 내일 또한 바람따라 흘러간다. 무심의 경지는 하늘에 떠있는 흰구름도 마찬가지다. ‘나와 자연’이 무심의 경지에서 합일되고 있다. 운수시로서 역시 선지를 듬뿍 담은 채 우리에게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김종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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