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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무생(無生)의 이야기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방 거사 가족의 수행에 대한 표현

겉은 다르나 속 내용 같아




방거사는 아버지가 태수(太守)였던 것으로도 짐작되듯 부귀 속에서 성장한 사람이었으나, 일단 불법을 접하고 나서는 재물을 큰배에 실어다가 동정호에 버릴 정도로 물욕에는 담박한 편이었다.

그리하여 남들이 그렇게 버릴 바에는 가난한 집에 나눠주지 그랬느냐고 하자, 나에게 해로운 것을 어찌 남에게 주겠느냐고 했다는 말까지 전한다. 이런 그였기에 석두·마조를 만나자 이내 깨달음을 이룰 수도 있었겠다 싶거니와, 그 후에도 출가하는 대신 여전히 처자를 이끌고 이곳저곳의 오두막집을 전전하면서 조리 따위 죽제품을 만들어 내다 파는 것에 의해 생계를 이어갔고, 더욱 놀라운 것은 아내와 자녀 모두를 어느덧 자기 같은 도인으로 만들어놓은 일이었다. 그의 다음 같은 게송을 통해 그 가족 생활의 진상을 담 너머로나마 엿보기로 하자.



아들 있어도 장가 안들이고

딸은 딸대로 시집 안 간 채,

온 식구 이렇게 둘러앉으면

무생(無生)의 이야기로 때를 잊는다.



有男不婚 有女不嫁 大家團欒頭 共說無生話



△大家. 여러 사람. △團欒. 둘러앉는 것. 가족의 화목한 모양을 일컫는 데도 쓰이나, 여기서는 그 뜻이 아니다. 그 밑의 頭는 조자. △無生. 생도 없고 멸(滅)도 없다는 도리. 불생불멸(不生不滅).



방거사에게는 영조(靈照)라는 딸이 있어서 제 가족만이 아니라 선사들을 상대해서도 날카로운 기봉을 나타낸 것으로 유명하다. 더구나 방거사가 자기의 죽을 시각인 정오가 됐는 지 알아보도록 이르자, 갔다가 와서는 일식 중이라 확실히는 모르겠다고 하여 방거사를 집밖으로 내보낸 다음, 제가 아버지 자리에 올라가 앉아 숨을 거둔 것에는, 방거사로서도 그 기민함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고 전해 온다.

그리하여 딸을 묻어 주기 위해 죽음을 뒤로 미룬 방거사가 이레 뒤에 죽었을 때는, 들에 나가 있던 아들은 달려온 어머니로부터 그 소식을 듣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괭이로 땅을 짚은 채 서서 숨을 거두었다 하니, 그 또한 예사는 아니다.

이렇게 뜻대로 죽기도 하고 연기하기도 하는 임의사명(任意捨命)과 앉아서도 가고 서서도 떠나는 좌탈입망(坐脫入亡)이 부자·부녀 사이에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뒤에서 밝혀지듯 방거사의 아내 또한 어엿한 도인이었다 할 때,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대화가 어찌 심상한 것일 수 있었겠는가.

이리해 그 이야기의 주제인 무생을 문제삼아야 되겠는바, 주에서도 밝혔듯 불생불멸이 그것이라면 공 자체여서 불법의 진수쯤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리라 여겨진다. 그리고 같은 무생이라도 선에서 다루어지는 바에는 무생이라는 개념으로 끝날 성질도 아니므로, 이것이 그들 가족간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실례를 통해 살펴보자.

어느 날, 방거사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튀어 나왔다.

"어렵고도 어려우이! 백석의 참깨를 나무에서 뿌리다니."

그러자 그의 노처가 맞받았다.

"쉽고도 쉬우이! 백초(百草) 위의 조사의(祖師意)."

이번에는 딸 영조가 끼어 들었다.

"어렵지도 쉽지도 않으이! 허기지면 밥 먹고 곤하면 자는 것 뿐."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이 어려운 것은 장애가 무수한 탓이기도 하지만, 이를 물리치고 나아간대도 그때마다 무엇을 배제하고 무엇을 얻었다는 생각이 또 하나의 장애가 되어 돌아오는 까닭이니, 잔뜩 뿌려놓은 참깨 때문에 이리저리 넘어지는 꼴이 아닐 수 없다.

또 쉽기도 하리니, 온갖 사물(百草)에는 무상의 진실(조사서래의)이 그대로 나타나 있고, 그것이 자기의 본지풍광(本地風光)이었던 때문이다. 또 앞의 두 견해가 다 한쪽으로 기운 분별이라 하여 부정하고, 매임 없는 무심의 경지야말로 불법이라는 판단도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러나 실은 셋중에 우열이 있음도 아니어서, 다른 셋으로 갈리기 이전의 원점에 서서 발언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되리니, 세 사람은 기실 한통속의 사이다. 그리고 이것이 '무생의 이야기'의 실체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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