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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 대종사 수행과 일화

기자명 남배현

당대 권력자의 전횡 호통치기도

“큰스님! 왜 출가 하셨는지요.”
“그냥 불자가 되고 싶어서 절에 왔어.”
“고향은 충청도 부여인데 어찌 금강산까지 가셔서 출가하셨는지요.”
“그냥 금강산엘 한 번 가보고 싶었지.”

월하 대종사의 깔끔하고 소박한 그리고 어디하나 툭 튀어나옴이 없는 성품을 잘 드러낸 대화 내용이다. 대종사는 ‘사실’만을 말하고 그 말에 무언가 덧대기를 싫어했다. 늘 후학들을 향해 ‘부지런히 수행하고 말보다 실천이 앞서야 한다’는 아주 평범한 가르침으로, ‘말’에 앞서 ‘몸’으로 바른 길을 보이신 대종사는 불가에 몸담은 지난 71년 동안 한국 불교의 정화와 개혁, 청규의 실천, 선풍진작만을 위해 외길을 걸어 왔다. 60년대 한국 불교의 틀을 정비하고 다지는 정화 불사 땐 청담 스님을 비롯한 대휘 스님 등 당대의 대표적인 고승들 곁에 대종사가 있었다.

대종사의 소박한 성품 뒤에는 강직함이 숨어 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유행어를 만들어 낼만큼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누렸던 월파 이후락 거사를 향해 월하 대종사는 호통쳤다. 1969년 말 당시 신도회장이었던 이후락 거사가 ‘조계종’을 ‘대한불교’로 개명하고 재가 불자를 종회에 참여시키는 중차대한 일을 힘으로 밀어붙이듯 추친하자 대종사는 “당신들이 그렇게 불교와 종단을 사랑한다면 이 자리에서 머리를 깎으라”며 일갈했다. 매사에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강직한 성품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스님은 수행 열심히 하고 재가불자는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면 돼. 마찬가지로 사회 각계각층이 맡은 바 본분을 다하면 되는 일이지 다른 비법이 어디 있나. 다른 비법이 있어서는 안되지.”

대종사는 어떠한 사안에 대해서도, 설령 그것이 ‘대종사 자신’을 드러낼법한 일인데도 간단 명료하게 답하곤 했다. ‘바른 길’에는 군더더기가 없다는 확신을 후학이나 불자들과 함께 한 법석에선 늘 이르셨다. 93년 동국학원 이사장으로 재임할 당시 ‘대입 부정 사건’이 터지자 세간을 향해 서울과 지방의 대학간 격차를 줄이고 취업과 승진에 있어 차별을 못하게 하는 제도를 마련할 것과 사학에 대한 지원책이나 기부금 입학제를 도입할 것 등을 촉구해 교육계의 눈과 귀를 자극하기도 했다.

대종사의 일상엔 ‘소박함’과 청규 실천의 곧은 정신이 짙게 배어 있기도 하다. 월하 스님이 평소 가장 자주 가시던 곳은 통도사 앞에서 나물을 파는 할머니들의 노점이었다. 대종사는 나물 파는 할머니들과 격의 없이 대화하고 노니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월하 스님이 행여 보이지 않을 때 큰스님의 후학과 제자들은 가장 먼저 할머니들의 노점을 찾았다고 하니 할머니들과 대종사가 얼마나 가깝게 지냈나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대종사는 또 80세의 노구에도 매월 두 차례 삭발을 위해 대중 목욕탕에 갈라치면 직접 속옷을 들고 가 빨 정도로 스스로에게 더욱 철저한 계행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월하 대종사는 이제 마지막으로 남겼던 임종게 처럼 가고 머뭄을 논할 수 없고 일체의 미혹이 사라진 열반에 들었다. 대종사는 50여 안거를 성만할 만큼 오랜 기간 동안 화두를 참구하며 운수행각에 진력하면서도 종단의 정화와 청규 실천을 끊임없이 외쳤다. 60년대의 정화가 한국불교의 전체 틀을 다시 마련하는 기초불사였다면 8∼90년대 대종사가 추구해 온 ‘정화’는 대중 모두가 일상에서 철저히 계행을 따라야 한다는 한 단계 성숙한 청규 불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98·99년 종단 사태 당시 대종사는 또 한번 종도 전체의 정화를 촉구하고 종단의 화합을 위해 나섰으나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종단 정치의 복잡한 역학 관계에 의해 대중은 반목하고 종단은 급기야 폭력사태로 얼룩지고 말았다. 사태 발발 3년 후인 2001년 8월 월하 대종사는 ‘종도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잘못된 것은 지탄을 받아야 하고 참회해야할 일은 참회를 해야된다고 생각하며 모든 책임은 노납에게 있다”면서 종단 사태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이 글에서 대종사는 “98년 종단문제는 종단 안정과 발전을 위해 종헌 종법에 의해 종정으로서 행하였던 일대 결단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유례 없는 혼란과 사회적 우려와 지탄이 야기되는 참담한 사태가 있었다”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아마도 그 마음에는 理事에 회통해 바른 길만을 고집해 왔으나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종단이 엇나간 점에 대한 회한도 담겨 있는 듯 하다.

대종사가 가신 지 꼭 일주일이 지났다. 치통이 심해 부산까지 이를 뽑으러 갈 때도 ‘내 육신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한 사중의 차를 절대 이용하지 않고 버스를 타겠다’던 스님의 ‘소탈한 선지식’이 벌써부터 그리워진다.


남배현 기자 nba710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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