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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스티브 라이히의 미니멀리즘

기자명 김준희

시대 앞서간 미니멀리즘, 붓다 재세시 불교 빼닮아

일정하게 중첩된 패턴으로 변화 만드는 ‘페이징’ 기법
한정된 시공간 속 절대적으로 보이는 가치도 변화 가능
‘일정한 법 없는 것이 최상 깨달음’이라는 불설 오버랩

스티브 라이히는 미국의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작곡가다.
스티브 라이히는 미국의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작곡가다.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 1936~)는 필립 글래스와 함께 미국의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음악에서의 미니멀리즘은 소리의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패턴화된 음형을 반복시킴으로서 구성되는 형태를 말한다. 어렸을 때부터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던 라이히는 코넬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줄리어드 음악원에 입학했다. 개방적이고 현대적인 음악을 추구했던 그는 현대음악의 중심지인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밀즈 대학에서 루치아노 베리오를 사사했다. 뉴욕으로 그는 돌아와 미니멀리즘 미술가들과 교류를 하며 주로 갤러리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라이히의 미니멀리즘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곡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피아노 페이즈(Piano Phase, 1967)’이다. 이 곡은 그가 처음으로 그의 고유한 작곡 기법인 ‘페이징(phasing)기법’을 사용해서 작곡한 기악곡이다. 페이징은 같은 음형을 여러 악기가 동시에 연주하다가 점차 한 박자씩 서로 어긋나며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 내는 작곡기법이다. 캐논이나 푸가의 아이디어와도 유사한 이 작곡법은 듣는 이를 집중하게 한다. 

그의 작품에는 단순히 반복뿐만이 아닌 상당히 미묘한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다섯 개의 음으로 이루어진 16분 음표 여덟 개의 계속된 반복이 이 곡의 첫 부분이다. 두 명의 연주자가 연주를 같이 시작하지만, 한 명이 조금 빠르게 연주하기 시작하며 두 명의 연주 속도는 어긋나게 된다.

‘피아노 페이즈’는 그가 밝힌 대로 “점진적인 과정으로서의 음악”이다. 일정하게 중첩된 패턴에 의해 형성된 그 결과물은 예기치 않은 변화를 가져오고 듣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형태의 멜로디를 만들어지게 한다. 일종의 계획적인 우연성이다. 대칭적인 특징을 보이는 첫 번째 부분은 많은 음악학자들의 연구 대상이기도 하다. 라이히는 후에 이 작품을 한 옥타브를 낮춰 두 대의 마림바를 위한 곡으로 편곡하기도 했다.  

1960년대 미국 음악계의 주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니멀리즘 열풍은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에게서 일부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 규모에 있어서는 미니멀리즘과는 거리가 멀지만, 박자표와 마디가 없는 한 페이지 분량의 곡을 840번 반복하라는 지시어가 쓰인 ‘벡사시옹(Vexations, 1893)’을 들어보자. 물론 단순한 ‘반복에 대한 개념의 집요함’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반복’이라는 매우 단순한 명제를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며 음악 그 자체로 감상할 때에는 결과적으로 매우 평온하고 심플하다.

라이히의 1972년 작품인 ‘클래핑 뮤직(Clapping Music)’은 리듬으로만 이루어진 작품이다. ‘손뼉음악’이라고 풀이 할 수 있는 이 곡은 두 사람이 손뼉으로만 연주되며 아이디어는 상당히 원시적이면서도 간단하다. 음악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의 반복이라는 매우 간단한 명제를 약간의 변화만으로 시종일관 두 연주자는 주어진 한 마디를 지속적으로 연주한다. 12개의 단위로 나눠져 있는 리듬(12/8박자로 인식되는 한 마디)을 동시에 연주하고 한 단위씩 어긋나게 연주하여 12번씩 반복을 하는 과정의 이 작품은 개념적으로 군더더기가 없는 미니멀리즘이다. 장소와 주위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두 명의 사람’만 존재하면 작품이 연주될 수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스티브 라이히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수 세기에 걸쳐 당연하다고 여겨져 왔던 예술적인 가치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가치관이라는 것은 문화, 종교, 사회라고 하는 한정된 시공간 안에서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처럼 보여도 전체적인 관점에서는 상대적 일수 밖에 없다. 개념과 상황에 따라 모든 가치관은 상대적이며 예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여래가 가장 높은 최상의 깨달음을 얻은 바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또한 여래가 어떤 특정한 진리를 설했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물으셨다. “제가 알기로는 부처님께서 ‘가장 높은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할 만한 일정한 법이 없다(無有定法)’라고 말씀하셨으며, ‘이것만이 진리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래가 설한 법은 얻을 수도 없고, 말 할 수도 없으며, 또한 법이라고 할 수도 없고, 법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금강경’ 제 7품의 내용이다. 

‘일정한 법이 없는 것이 최상의 깨달음이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오버랩 되는 상당히 흥미로운 곡이 있다. ‘나무 조각을 위한 음악(Music for Pieces of Wood, 1973)’으로 특정한 음정과 울림을 지닌 음색에 따라 선택된 나무 클라베(clave) 한 쌍으로 연주하는 곡이다. 스페인어로 열쇠를 뜻하는 클라베는 원통형으로 된 나무 조각으로 된 쿠바의 리듬악기이며, 주로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춤곡의 리듬을 연주 할 때 쓰인다. 

이 곡은 다섯 명의 연주자가 각기 다른 음정을 가진 클라베로 반복된 리듬을 겹겹이 쌓아가며 연주하도록 작곡되었다. A, B, C#, D# 그리고 한 옥타브 위의 D#음정을 소리 내는 다섯 개의 클레베 소리는 목탁소리와도 비슷하다. 이 곡 역시 라이히만의 고유의 기법인 ‘페이징’이 사용되었으며 계속되는 반복과 중첩을 보여준다. 또한 가장 단순한 악기들만으로 음악을 만들며 형식과 내용 모두 ‘미니멀’한 아이디어를 담고자 했던 그의 전작인 ‘클래핑 뮤직’과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예술과 문화적인 흐름을 나타내는 미니멀리즘은 불필요한 것들을 없애고 최소한의 것으로 최대한의 것을 지향하는 하나의 경향이지만 상당히 오랫동안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음악에서의 미니멀리즘은 미술에서 영향을 받아 1960년대 전후로 나타났다. 지나친 소비주의에 대한 반향으로 경제적으로 미니멀리즘을 추구했던 1970년대 초반의 경향보다 10년을 앞서갔다. 21세기가 20년이 지난 현대사회에서도 하나의 트렌드가 되고 있는 미니멀리즘의 아이디어를 기원전 500년부터 이야기 했던 불교야말로 가장 현대적이고 세련된 종교가 아닐까. 목탁을 연상케하는 스티브 라이히의 클라베를 위한 작품과 ‘무유정법’의 가르침, 그리고 간결하고 단순한 외형으로 더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미니멀리즘을 함께 생각해 본다.

김준희 피아니스트 pianistjk@naver.com

[1582호 / 2021년 4월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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