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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찌꺼기 비우고 나니 부처님 가피로 채워지더라

기자명 법보

[신행수기 당선작]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상 - 김병우

비리 폭로하고 아파트 옥상서 투신한 동료 사건 수사 요청했지만
‘달걀로 바위치기’ 실감하고 화병 시달리다 오지 신청해 강원도로
절 수행으로 절망 극복…근무지서도 진급 “모든 게 부처님 가피”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포교사가 된 이후 일상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을 꼽는다면 장례식장 출입이 잦아졌다는 것이다. 포교팀 총무가 염불봉사 시간을 알려준다. 그러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일상복에서 포교사복으로 갈아입는 일이다. 옷이 바뀐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는데도 근엄한 포교사의 마음가짐으로 변한다. 

약속된 시간에 늦지 않으려 바삐 서두른다. 그러다 현관문 신발장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본다. 짧은 머리를 손빗으로 다듬고 옷 매무새를 살핀다. 오늘은 어떤 주검을 만날까. 봉사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진 스스로를 보며 만감이 교차한다. 

“사바 세계에 머무느라 한 평생 고생했습니다. 무거운 짐은 다 내려놓고 편히 잘 가십시요.”

처음에는 이 말이 어찌나 입에 붙지 않는지. 어색하고 낯설었다. 하지만 이제 제법 자연스럽다. 감정 수위도 웬만큼 조절할 수 있게 됐다.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때면 뿌듯한 마음도 올라온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염불을 하다가 영정 속 고인의 눈망울과 마주쳤다. 맑은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갑작스레 닭똥 같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뿌옇게 변한 안경을 벗고 숨죽이며 울었다. 들고 있던 손수건이 흠뻑 젖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첫 만남에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세세생생 인연 고리가 그 순간 나를 그렇게 울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고인도 이런 내 마음을 알았을까. 

“이 세상에서 못다 한 인연일랑 더 생각하지 마시고 부디 극락왕생하옵소서.” 

울컥하는 마음을 부여잡고 옹알이하듯 웅얼거린 그날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수년 전 한밤중 걸려온 전화 한통이 내 운명을 바꾸게 했다. 거나하게 취한 목소리였다. 억울하다고 했다. 또 당신이 인사담당관이니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인사 비리에 관한 폭로였다. 

본인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던 그는, 몇 달 뒤 살던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해 생을 마감했다. 언론들은 ‘수사 결과 부부싸움 끝에 벌어진 돌발적 사고사’라고 보도했다. 그것말곤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그의 죽음과 그가 말했던 억울함 사이 무슨 연관이 있었던 건 아닐까. “억울하다” 외쳤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환청처럼 들려온다.

인사 비리는 공공연한 악습이었다. 잊을만하면 터져 나왔다. 내가 ○○○ 인사과에서 근무할 시기였다. 승진 시험에 부정한 돈이 수년 간 개입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실체는 잡히지 않았다. 다음날 출근해 자료를 검토해보니 소문의 대부분은 사실이었다. 

고민 끝에 중앙부처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이 안건을 의논했고, 서울 ○○○위원회의 문을 두드렸다. 그곳의 담당 직원은 우리를 제일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 고문 변호사라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책상을 마주 앉으니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우리는 미리 준비해갔던 자료를 건넸다. A4용지 4장에 그간 승진 시험 관련한 비리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담당자는 건넨 자료를 찬찬히 살펴봤다. 이후 우리를 향해 “수사가 진행되면 당신들은 내부 고발자로 다칠 수 있으니 다시 한 번 신중히 생각한 후 결정하라”고 했다. 조언하는 듯한 모양새였으나 우리에게는 그저 꽁무니를 빼는 듯이 들렸다. 

높은 벽을 실감했다. 처음 기대했던 것과 달리 별 소득 없었다. 달걀로 바위치기라도 해야할까. 나약하기 그지없는 자신을 실감하면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이후 정의로웠던 초심은 점점 사라져 갔다. 나 하나 독야청청 한다고 이 조직의 오래된 악습이 달라지겠느냐 생각했다. 자포자기였다. 

사실 대숲이라도 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고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돌파구가 없었다. 나는 우울증과 화병에 시달렸고, 직장에 대한 회의감과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으로 사직서를 매일 만지작 거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표를 낼까 생각했다. 하지만 가족들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래서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가장이 밥벌이를 버린다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인사과를 벗어나기로 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화두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래서 아무 연고도 없었는 강원도로 떠나기로 했다. 오지를 자청한 것이다. 

그렇게 강원도 생활이 시작됐다. 모든게 낯설었고, 주변 환경에 적응이 되질 않아 또다른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차에 한 지인이 동해 삼화사 불교대학을 추천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삼화사로 갔다. 그리고 불교대학에 등록했다. 무엇에 홀린듯 급작스럽게 이뤄졌다. 이 참에 불법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어보고 싶었다. 매주 토요일에는 모든 일을 제쳐 놓고 불교대학으로 향했다. 1학년 때는 정념반 반장, 2학년 때는 선정반 반장을 맡았다. 울력 봉사도 처음하게 됐다. 모든게 행복했다. 불교대학 2년으로는 아쉬웠다. 그래서 불교대학원 2년 과정을 추가로 등록했다. 그렇게 4년 동안 나는 매주 삼화사로 향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108배였다. 한 배씩 절을 이어나가다 보면 나를 세웠던 마음도 점차 내려놓아졌다. 하심(下心)이었다. 몸도 마음도 가벼워져 갔다. 절을 하는 매력에 푹 빠졌다. 매일 아침 눈 뜨면 가장 먼저 108배부터 했다. 꾸준하게 하다보니 시간도 점차 빨라졌다. 허리를 굽히고 다리를 접고 머리를 숙이는 동작도 점차 부드러워졌다. ‘천수경’의 십악참회(十惡懺悔)를 반복하며 108배를 하는 요령도 터득했다. 절을 할 때마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하지만 절을 마치고 나면 머리는 그지없이 맑아졌다. 그렇게 3년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행을 이어나갔다. 

건강도 몰라보게 좋아졌다. 나는 평소 지독한 알레르기성 비염을 앓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발작성 재채기로 하루를 시작했다. 집이 떠나가라 서너 번 재채기를 하고 나면 맑은 콧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풀고 닦고를 반복하다보니 항상 코 밑은 헐어 아렸다. 하지만 108배를 하고나서부터 거짓말처럼 증세가 사라졌다. 한약부터 양약까지 비염에 좋다는 건 다 먹어봤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는데, 절로 치료가 되다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기한 일이었다. 비염이 없어지자 온몸에 활기가 넘쳤다. 매일 코를 훌쩍이던 내가 건강한 사람으로 변하자 주변 사람들도 관심을 가졌다. 나는 108배 홍보요원이 돼 주변에 그 효험을 설파했다. 

한 번은 삼화사 불교대학에서 도반들과 하계수련회를 떠났다. 수련장은 무릉계곡 암벽이 병풍처럼 장엄한 장소였다. 그 풍광에 반해 짐을 채 풀기도 전에 마루에 걸터앉아 넋을 잃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물안개가 자욱했고 절벽 사이사이 자란 소나무가 보였다. 거기다 계곡 물소리까지 시원하게 들리니 마치 신선이 된 듯했다. 

수련 둘째날은 1080배 용맹정진이 있었다. 그날 밤 9시 적광전에서 정진을 시작했다. 포교사들이 법당 본존불을 중심으로 서너명씩 배치돼 있었다. 나도 그들 바로 뒷 방석에 자리를 잡고 절을 시작했다. 700배 정도가 됐을 무렵 고비가 찾아왔다. 왼쪽 무릎이 옷과 방석에 자꾸 스치자 살갗이 까졌다. 쓰리고 아팠다. 통증에 집중되다보니 종아리까지 점점 아파왔다. ‘그만 할까’ 하는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그러다보니 억울하기도 했고 아까운 마음도 들었다. 

1080배를 하겠다고 지원한 사람들은 30여명 정도 됐다. 이때 중도 포기한 이들이 법당 뒷쪽에 모여 남은 사람들을 향해 정근을 해줬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하는 응원 목소리가 들렸다. 그 음성을 듣고는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들 덕분에 나는 스스로에게 지지않겠다는 첫 마음을 되새길 수 있었다. 두시간 반 정도 시간이 지나자 사회자 죽비소리가 들렸다. 정진이 끝나고 나니 밤 11시30분이었다. 얼굴은 벌겋게 상기돼 있었고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됐다. 입고 있었던 수련복은 물에 담궜다가 건져낸 듯 축축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몇 배 이상의 보람이 돌아왔다. 

그날은 겨우 3시간 정도 잠을 청했다. 새벽에 일어나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계곡으로 향했다. 얼음장 같은 물에 세수를 하니 정신이 번쩍하고 들었다. 머리도 그지없이 맑아졌다. 새벽 빗소리 때문이었을까. 고요가 주는 적막함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법당으로 향했다. 다시 부처님을 마주 보고 앉았다. 그러자 마음 깊은 곳에서 일렁거렸던 잡념이 잔잔한 바다처럼 평온해졌다. 알게모르게 지었던 두터운 업장이 다시 떠올랐고 참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혹 누구라도 볼까 안으로 꾸역꾸역 삼켰다. 그리고 생각했다. ‘남은 생애는 악업을 짓지 말고 선하게 살자.’ 그렇게 다짐하며 난생 처음 새벽 예불을 두 번씩 올렸다.

그날 이후 평범한 일상을 지냈다. 그러다 꿈만 같은 일이 일어났다. 진즉 포기했던 진급이 통보된 것이다.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기적이었다. 도반들은 “4년 동안 정진을 해서 부처님 가피를 듬뿍받은 것”이라고 축하했다. 나 역시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도피처로 선택했던 삼화사에서 부처님 곁으로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었고 어렴풋이 알게된 불교로 내면에 깔려있었던 찌꺼기들을 비울 수 있었다. 고질병으로 앓았던 비염도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불자들에게 꽃이라 불리는 포교사 시험에도 합격을 했다. 결국 비워낸 그 자리를 가피로 채워주신 건 아닐까. 스스로 해석해본다. 

강원도로 이사간 지 만 6년 만에 다시 전 근무지로 복귀했다. 삼화사에서 도반들과 함께했던 그 시간은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됐다. 소중한 인연에 마음 깊이 감사한다. 앞으로 나누며 살아야 할 의무가 내 앞에 묵직하게 놓여있다. 

여전히 불교는 어렵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지금은 모르는 게 더 많다보니 경전을 읽다보면 안개 속으로 걷는 듯 혼미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부지런하게 정진을 하려한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염화미소를 지었던 가섭존자처럼 그 진리를 깨달아 빙그레 웃을 날이 오리라 믿는다.

[1586호 / 2021년 5월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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