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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한 아들에 부끄럽지 않은 유튜브 포교사가 될겁니다”

  • 무진등
  • 입력 2021.05.31 15:09
  • 호수 1587
  • 댓글 0

이연수 불교크리에이터

2005년 조계사 근처 꽃집 운영하며 본격적으로 들어선 불자의 길
아들 출가로 다시 짙어진 불연은 불교 유튜버로 들어선 계기
불교설화 소개한 참신한 영상으로 포교원 불교크리에이터로 선정

불교크리에이터 생활을 시작한 뒤 매일이 새롭고 신기한 일들로 가득하다는 이연수씨의 눈빛이 반짝거린다. 
불교크리에이터 생활을 시작한 뒤 매일이 새롭고 신기한 일들로 가득하다는 이연수씨의 눈빛이 반짝거린다. 

“어머니, 저는 스님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이 이연수씨에게 건넨 한 마디. 당혹스러웠다. 우스갯소리로 넘겼다. 당시 조계사 인근에서 운영하고 있던 꽃집엔 손님이 많았다. 스님들도 많이 찾아왔다. 때론 아이를 돌볼 시간도 없을 만큼 바빴다. 조계사 교육국장 소임을 맡아 자주 가게를 찾던 명본 스님이 가끔 아이를 돌봐주었다. 아들은 자연스레 스님의 손을 잡고 여기저기 세상구경을 떠났다. 스님과 보내는 시간이 많았기에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아이는 그 후로도 종종 그런 말을 건넸다.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던 날, 수능을 마친 아들은 진지하게 대학에 진학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학교란 틀에 갇혀 사는 것보다 자신만의 인생을 개척해가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그는 아들에게 이유를 물었고, 돌아온 대답은 “스님이 되겠다”였다. 예상치 못했던 선언에 6년 전 그 순간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불어온 변화의 바람이 둘째 아들에게까지 전해진 것이다. 그래서 당혹감보다는 ‘이젠 정말 때가 왔구나’ 했다. 다른 세계로 떠나버린 것이 아니었기에 아들의 출가는 영원한 이별이 아니었다. 흔쾌히 허락했다. 출가 전날 아들의 머리도 직접 잘라주었다. 아들이 속세를 떠나기 전에 깨끗이 닦아 보내는 게 엄마로서 할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통도사에 아들을 데려다 주는 길, 선택을 존중했기에 덤덤한 척 했다. 20년간 품에 안고 있던 아들을 떠나보내는 일이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대견했지만 어쩔 수 없는 가슴 시림이 온 몸을 휘감았다.

2015년 2월, 겨울의 끝자락서 아들은 부처님 출가제자의 길을 떠났다. 

“출가에 편견은 없었어요. 그런데 정말 연이란게 있구나 했어요. 어린 시절부터 아이와 함께했던 명본 스님이 은사스님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6개월간 행자생활을 마치고 수진이란 법명을 받아 진정한 스님이 된 모습을 본 순간 가슴 속에서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뜨거운 것이 느껴졌어요.” 

불자의 삶을 살아간 지 십수 년, 어느덧 생활의 중심엔 불교가 자리했다. 신실한 불자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인연은  깊어지지 않았다. 종종 탁발을 하러오거나 집에서 제사를 지낼 때 본 스님들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목탁을 두드리는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 불교는 무속신앙과 다를 바가 없었다. 기독교 학교로 진학을 하면서 오래전 들었던 생각은 확고해졌다.

매주 교회를 나가 주보를 가져오고, 성경공부를 했다. 부흥회도 나갔다. 그러나 성경을 배우면 배울수록 의아함만 커져갔다. 결국 타협할 수 없는 벽에 부딪혔다. 애초 기독교는 그에게 맞지 않는 옷이었다. 그렇게 종교와는 거리를 둔 채 학창시절을 보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모든 이들이 동경하던 항공사에 입사했다. 커리어우먼으로의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은 상상과는 달랐다. 매일 사람들을 마주하며 감정을 소모하는 일은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다. 자신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월급은 많이 받았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고민 끝에 회사를 그만뒀다. 대신 가족의 행복을 위해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그렇게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정신없는 세월을 보냈다.

퇴사 후 여유가 생기면서 문화센터에서 꽃꽂이를 배웠다.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렸기에 화훼장식기능사까지 취득했다. 평온했던 생활이 이어지던 어느 해 두 아들이 유학을 떠났다. 아이들의 재잘거림으로 왁자지껄했던 공간이 고요해지고 헛헛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그에게 남편은 꽃집운영을 제안했다. 그렇게 2005년 11월 조계사 근처에서 문 없는 꽃집을 열었다. 

개업과 동시에 문전성시를 이뤘다. 특히 스님들이 많이 찾았다. 자연스레 스님들과 교류도 많아졌다. 가게 한쪽에 작은 테이블을 마련했다. 꽃집이자 사랑방이 됐다. 그곳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조계사 근처에서 장사를 하기도 했지만 스님들이 계속 찾아오니 불교에 대해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더라고요. 궁금해졌어요. ‘내가 어릴 때 생각했던 불교가 맞나’하고요. 그렇게 조계사를 찾기 시작했죠.”

신기한 경험이었다. 법당 안에 발을 들인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린 시절 들었던 스님들의 알 수 없는 말은 주문이 아닌 깨달음으로 가는 길임을 알아차렸다. 그 길로 기본교육과정을 등록했다. 절하는 방법도 몰랐던 그는 교육을 통해 불자로서의 생활을 하나하나 익혀갔다. 산다화라는 법명도 받았다. 
 

불교 설화를 소재로 제작한 ‘불야설’로 이연수씨는 조계종 포교원 불교크리에이터 2기로 선정됐다. 5월6일 열린 위촉식에서 범해 스님으로부터 위촉장을 받았다.
불교 설화를 소재로 제작한 ‘불야설’로 이연수씨는 조계종 포교원 불교크리에이터 2기로 선정됐다. 5월6일 열린 위촉식에서 범해 스님으로부터 위촉장을 받았다.

부처님 가르침 자체에 매료되어 가기 시작했으나, 짧은 기본 교육으로 불법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불교공부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싶었다. 조금 더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은 마음에 불교대학에 입학했다. 비어있던 곳간을 채우듯 가르침을 차곡차곡 채워갔다. 배움의 순간순간이 환희로 다가왔다. 수강하면서 불교에 대해 더 알아갔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를 가슴에 아로 새겼다. 토양 깊은 곳에 심어졌던 불심의 씨앗은 40여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싹을 틔우고 꽃으로 피어난 것이다.

조계사 육법공양팀에 소속돼 활동을 이어갔다. 행사가 많다보니 꽃집 운영과 병행하는 데 어려움도 있었다. 빠질 수는 없었다. 그럴수록 더 부처님께 드리는 공양물을 정성껏 다듬어 올렸다. 그러나 둘째 아들이 유학을 끝내고 돌아올 무렵 이런저런 이유로 2년여 만에 꽃집도 문을 닫게 됐다. 육법공양팀 활동도 더 이상 할수 없게 됐다. 

불교대학을 졸업하며 봉사활동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겠다 서원했다. 부처님의 자비정신을 실천하는 길은 곧 봉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몸은 조계사에서 멀어졌지만 대신 집 근처에 있는 정서장애 특수학교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발달장애인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은 고됐다. 그럼에도 묵묵히 아이들과 함께 했다. 2017년까지 활동은 이어졌다. 상패도 받았다. 봉사자로 긴 시간을 지내며 놀라운 변화도 맞이했다. 모난 곳은 둥글어지고,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커져갔다.

“마음에 깃대 하나 꽂고 내 자신을 바라보니 삶이 편해지더라고요. 기쁨도, 슬픔도, 좌절도 누군가가 만드는 것이 아닌 내가 만들어 내는 것임을 깨달았죠. 어떤 힘든 상황이 닥쳐도, 화가 나도 그 순간 나를 바라보면 풀어져요.”

아들의 출가를 계기로 다시 짙어진 불교와의 인연은 그를 불교 크리에이터의 길로 이끌었다. 온라인 포교사가 된 것이다. 불교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탈종교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이기에 포교를 위한 콘텐츠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본격적으로 영상공부를 시작했다. 훗날 아들인 수진 스님의 전법활동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바람도 있었다.

시민영상교실에서 10회짜리 기초 영상교육을 받았다. 그에게 영상기기는 어색한 물건이 아니었다. 숭의여고 재학시절 사진 동아리 선배들로부터 사진과 진학을 권유받았을 정도로 재주가 뛰어났다. 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빠르게 습득해갔다. 유튜버 교육은 물론, 포토샵도 배웠다. 영상 교육 중급코스 수강을 하며 수진 스님의 출가영상을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신나게 영상을 배우고 2018년 ‘유니크맘’이란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그러나 막상 시작하려니 방향을 잡지 못했다. 대중의 공감은 물론 흥미까지 유발해야하기 때문이다. 고민은 오랜 기간 이어졌다. 그때 명본 스님이 손을 내밀었다. 템플스테이, 성지순례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사찰 문화탐방 영상을 제작키로 한 것이다. 전문가가 붙으니 전문성과 재미, 모두를 잡을 수 있었다. ‘명사문(명본 스님과 함께하는 사찰 문화답사)’은 그렇게 탄생했다.

좋은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조회수가 1만이 넘는 영상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스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기에 혼자 할 수 있는 신선한 콘텐츠가 필요했다. 자칫 어렵게 들릴 수 있는 불교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소개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사찰을 소개하면서 보니 그 속에 담긴 재미난 설화들이 무궁무진했다. ‘설화를 영상으로 만들면 사람들이 재미있어하지 않을까?’ 무릎을 탁 쳤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불교 이야기와 설화(불야설)’를 만들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을 불교로 끌어당기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카메라를 켜고 그 앞에 앉았다. 셔터를 계속 눌렀다. 본격적인 채널운영 시작 1년이 채 되지 않을 무렵 구독자 2000명을 달성했다. 높은 조회수는 아니지만 끊임없는 도전을 거듭한 결과 최근 조계종 포교원 불교크리에이터 2기에 선정되기도 했다. 

“제 영상의 구독자 연령대가 갈수록 내려가고 있어요. 굉장히 고무적이에요. 영국, 호주에서도 시청을 하더라니까요. 저는 지인들에게 ‘절에 다녀보라’고 말하지 않아요. 대신 영상을 통해 자연스럽게 불교라는 물을 적셔주고 있죠. 신기하게도 교회를 다니는 친한 친구가 갑자기 템플스테이에 가보고 싶다고 연락을 해왔어요. 제 영상이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 같지 않나요?” 

이연수 불교 크리에이터의 생활은 유튜브라는 세계를 접하면서 매일이 새롭고 신기한 일들로 가득 차고 있다. ‘공양주와 함께하는 사찰음식’ ‘불교 여행사와 함께하는 사찰 투어’ 등 더 많은 프로그램으로 자신의 공간을 채워가고 싶다고 말하는 그의 눈빛이 반짝거린다. 국경 없는 온라인 세상서 포교사 역할을 하고 있는 그는 오늘도 카메라 앞에 선다. 15년 전 가슴 속 한가득 피워낸 연꽃은 이젠 영상을 타고 향긋한 내음을 퍼트리고 있다.

김민아 기자 kkkma@beopbo.com

[1587호 / 2021년 6월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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