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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 ⑩ (4) ‘중대불교’의 사상적 배경 - 중

3배 확대된 국토, 그러나 남쪽 끝 경주 고수하다 대외확장 한계 직면

고구려는 수도를 옮겨가며 성장…백제는 수도 옮길때마다 쇠락
삼국통일 후 실시된 통합과 포용 정책은 신문왕 등장 이후 퇴색
위화부 강화와 국학 설치, 국가운영원리에 유교 사상 채택 의미 

국보 제6호 충주 탑평리칠층석탑. 통일신라는 충주를 국토의 중앙이라고 생각해 이 탑을 일명 ‘중앙탑’이라 불렀다.
국보 제6호 충주 탑평리칠층석탑. 통일신라는 충주를 국토의 중앙이라고 생각해 이 탑을 일명 ‘중앙탑’이라 불렀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당전쟁을 거쳐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왕대(661~681) 국가정책기조는 통합과 포용이었다. 삼국통일 원훈인 김유신이 문무왕 13년(673) 병상에서 왕에게 최후로 당부한 말은 당시 상황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전략) 지금 삼한(三韓)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이 두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니, 태평에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적이 편안하여졌다고 하겠습니다. 신이 보건대 예로부터 대통(大統)을 잇는 임금이 초기를 초기답게 잘하지 않는 이가 없지만, 나중을 잘하는 이는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대의 공적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없어지니 매우 통탄할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성공이 쉽지 않음을 아시고, 수성(守成) 또한 어려움을 생각하시어 소인(小人)을 멀리하고 군자(君子)를 가까이 하시어, 위에서 조정이 화목하고, 아래서 백성과 만물이 편안케 하여 화란(禍亂)이 일어나지 않고 기업(基業)이 무궁하게 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삼국사기’ 권43, 김유신전하) 김유신의 말 가운데서 삼국을 삼한으로 표현하고 삼국을 통일하였다고 인식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당시 신라 지배층의 자부심을 대변한 것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위에서 조정이 화목(和)하고 아래에서 백성과 만물이 편안(安)을 유지하도록 힘써야 된다고 강조한 것은 통일전쟁을 주도한 원훈으로서 당연한 말이라고 본다. 김유신이 말하는 ‘화(和)’와 ‘안(安)’은 통합과 포용의 의미와 같은 것인데, 결국 임금의 덕인 ‘인(仁)’과 신하의 본분인 ‘충(忠)’의 실천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유교정치이념 수립의 전제조건이 마련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문무왕은 김유신이 말한 바와 같은 ‘화’와 ‘안’, 곧 통합과 포용을 조성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노력하고 있었다.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해인 문무왕 9년(669)에 신료들을 모아놓고, 대사면 조치를 지시하는 교서를 통해 시대정신에 부응하는 통합의 취지를 밝혔다. “지난 날 신라는 두 나라와 관계를 끊고 북쪽을 정벌하고 서쪽을 침공하여 잠시도 편안할 때가 없었다. 전사들의 해골은 들판에 쌓였고, 그들의 몸과 머리는 서로 떨어져 먼 곳에 흩어졌다. 선왕께서는 백성들이 참혹하게 해를 당함을 민망히 여겨 천승(千乘, 제후국)의 귀하신 몸임에도 불구하시고 바다를 건너 중국에 가서 조회하고 황제께 군사를 요청하였다. 이는 본래 두 나라를 평정하여 길이 싸움을 없게 하고, 몇 대에 걸쳐 깊이 쌓인 원수를 갚고, 백성들의 가냘픈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심이었다. (선왕께서) 백제는 비록 평정하였으나, 고구려는 아직 멸망시키지 못하였다. 평정을 이루시려던 유업을 과인이 이어받아 마침내 선왕의 뜻을 이루었다. 지금 두 적국은 평정되어 사방이 안정되었다. 전쟁터에 나아가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이미 모두 상을 주었고, 전사한 혼령들에게는 명복 빌 재물(冥資)을 추증하였다. 다만 감옥에는 죄인을 보고 불쌍히 여겨 울어주던 은혜(泣辜之恩)를 받지 못하고, 칼을 쓰고 쇠사슬에 묶여 고통을 받는 사람들(枷鏁之苦)은 아직 갱신의 은택을 입지 못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생각할 때 먹고 자는 것이 편안하지 못하다. 나라 안의 죄수들을 특별 사면하니, 총장 2년(669) 2월21일 새벽 이전에 5역(五逆) 사죄(死罪) 이하를 범한 자로서 지금 갇혀 있는 사람들은 죄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석방하고, 앞서 대사면 이후에 또 죄를 범하여 관작을 빼앗긴 사람은 모두 복구할 것이다. 도적의 죄인은 단지 그 몸만은 풀어주되, 훔친 물건은 변상할 재산이 없는 자에게는 물리지 말 것이며, 백성이 가난하여 남의 곡식을 빌린 자로서 흉년이 든 지방에 사는 사람은 원금과 이자를 모두 갚을 필요가 없으며, 만일 풍년이 든 지방에 사는 사람은 금년 추수할 때에 단지 그 원금을 갚고 이자는 물리지 말 것이다. (2월) 30일을 기한으로 하여 담당 관서에서는 받들어 시행하라.” (‘삼국사기’ 권6, 문무왕9년조)

문무왕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직후 영광스러운 전승 이면에 가려진 희생자들에 대한 사면과 채무자들에 대한 부채탕감 조치를 통하여 대통합을 기도하였는데, 문무왕의 이러한 노력은 즉위 21년(681)년 임종 때 남긴 유조(遺詔)에서 다시 강조되고 있다. “과인은 나라의 운세가 어지러운 전쟁의 시대를 당하여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강토를 안정시켰고, 반역하는 자들을 치고 협조하는 자들을 불러들여 드디어 멀고 가까운 곳을 편안케 하였다. 위로는 조종(祖宗)의 남기신 염려를 안심시켰고 아래로는 부자의 오랜 원한을 갚았으며, (전쟁에)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널리 상을 주었고, 벼슬길을 터서 중앙과 지방에 있는 사람에게 고르게 주었다. 병기를 녹이어 농기구를 만들었으며, 백성을 어질고 장수하는 지방으로 이끌었다. 세금을 가볍게 하고 부역을 덜어주어 집집이 넉넉하고 인구가 늘며, 민간이 안정되고 나라 안에 근심이 없고, 곳간에는 (곡식이) 산언덕처럼 쌓여 있고 감옥은 (죄수가 없어) 풀이 무성하게 되었으니, 죽은 자와 산자에 대하여 부끄럽지 않고 관리와 백성에 대해서도 저버린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삼국사기’ 권7, 문무왕21년조)

그런데 문무왕이 즉위 21년(681)에 사망하고 아들 김정명(金政明)이 31대 신문왕(681~692)으로 즉위하자, 국가정책의 기조인 통합과 포용의 분위기는 상당히 퇴색하게 되었다. 신문왕은 전제적인 왕권 확립을 위해 귀족세력의 숙청을 단행하였다. 그는 즉위하던 해에 왕비의 아버지 김흠돌의 반란사건을 계기로 연루자를 샅샅이 찾아 죽였다. 심지어 반란사건을 사전에 알고 고발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전직 상대등이자 현직 병부령인 군관을 사형에 처하였다. 그리고 4년(684)에는 보덕왕 안승을 소환하여 소판의 관등과 함께 김 씨의 성을 주어 서울에 머물게 하였으며, 다음해 반란을 일으킨 보덕국의 주민을 남쪽 지방의 주군으로 옮기고 그 땅을 금마군으로 삼아 보덕국을 폐지하였다. 문무왕대 고구려 유민을 적극적으로 포섭하면서 안승을 고구려왕, 이어 보덕왕으로 책봉하여 제후를 거느리는 제국으로의 국가의식의 성장을 보여주었는데, 보덕국의 폐지로 그러한 의식은 축소되고, 통합과 포용의 분위기를 퇴색케 하는 사건들이었다.

신문왕은 귀족세력을 도태시키고, 고구려 유민들의 포용에 한계를 노정시킨 반면, 왕권을 뒷받침하는 정치・군사・사상・제사 등에 관한 제도정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우선 중앙의 중요 관서들을 정비하여 5단계의 행정조직으로 정비하였는데, 특히 신문왕 2년(682) 관리의 인사를 담당한 위화부에 장관인 금하신(衿荷臣)을 처음 설치하고, 다시 3년 뒤에 1인을 추가하였으며, 아울러 차관인 상당(上堂) 2인을 설치함으로서 1급 관서로 승격시켰다. 인사 담당 부서를 강화한 것은 그만큼 관료적 성격으로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에 인재를 양성하는 국립대학으로 국학을 설치하여 유교와 한문학을 전문적으로 교육케 하였다. 원래 국학은 삼국통일에 앞선 진덕여왕 5년(651)에 이미 실무직인 대사를 설치하였으나, 본격적인 출발은 신문왕대에 와서 이루어졌다. 위화부의 강화와 국학의 설치는 관료제의 발전과 그 운영원리로서의 유교사상의 채택을 의미한다.

신문왕대의 지배체제 정비과정에서 특히 주목되는 사실은 9주5소경이라는 지방제도의 완성이다. 삼국통일로 3배 이상으로 확대된 국토를 통치하기 위하여 신문왕 5년(685) 전국을 9주로 정비하였는데, 중국의 전설상의 우(禹)의 9주를 모범으로 한 것은 천하를 통일하여 통치한다는 의식이 표출된 것이다. 신라 및 가야・백제・고구려의 지역에 각각 3주씩 할당되었는데, 북방은 한강유역 이남에 한정되고, 예성강 이북 지역은 제외되었다. 예성강 이북 대동강 이남 지역은 신라가 점유하였으나, 당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여 군현을 설치하지 못한 실정이었다. 이 지역 군현 설치는 신라 하대인 헌덕왕대(809~826)까지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9주와 동시에 완성된 5소경은 중앙의 중원경(충주)를 중심으로 북원경(원주)・금관경(김해)・서원경(청주)・남원경(남원) 등 동서남북의 4소경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위치가 강원도 남부와 충청도 이남, 즉 소백산맥의 외곽지역에 한정됨으로서 그 이상의 북방 진출의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5소경은 동남쪽에 편재된 왕경(경주)을 보완하기 위하여 필요했던 것이며, 당시 국토의 중앙은 중원경으로 의식하였던 것 같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충주 소재 7층 석탑이 ‘중앙탑’으로 불렸다는 사실, 또한 왕경인 경주가 동경으로도 불렸다는 사실 등은 그 증거이다. 신문왕 9년(689)에는 수도를 달구벌(達句伐,대구)로 옮기려고 하였다. 경주의 편재성을 해결하고, 동시에 경주를 기반으로 한 귀족들의 압력에 벗어나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이나, 종래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말았는데, 중앙귀족들의 반발에 부딪친 때문으로 보인다. 3국 가운데 고구려는 환인⤍국내성⤍평양으로 서울을 옮기면서 확장 발전하였던 데 반하여 백제는 한성⤍웅진⤍사비로 서울을 옮기면서 국력이 위축되어 갔었다. 그런데 신라는 시종 경주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더욱이 왕성도 월성을 고수하였다. 신라 지배세력들의 보수적인 자세와 전통을 고수하려는 의식이 특히 투철하였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점은 뒤늦게 출발하여 착실한 발전을 이룩한 신라 저력의 한 요인이 되었으나, 영토가 3배 이상으로 확장된 통일신라시대에는 발전의 한계를 노정한 원인이 되었다.

삼국통일 이후 전통의 고수와 발전의 한계성은 명산(名山) 대천(大川)의 제사 제도에서도 나타난다. ‘삼국사기’ 권32, 제사조에 의하면, 명산과 대천에 대한 제사를 대사・중사・소사의 3등급으로 구분하였는데, 대사는 경주 일대의 나력(奈歷)・골화(骨火)・혈례(穴禮) 등의 3산, 중사는 동쪽의 토함산(吐含山)・남쪽의 지리산(地理山)・서쪽의 계룡산(雞龍山)・북쪽의 태백산(太伯山)・중앙의 부악(父岳) 등의 오악이다. 이 가운데 3산은 삼국시대의 명산이고, 오악은 삼국통일 뒤 명산으로 지정된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오악제도가 마련된 시기는 조상에 대한 오묘제와 함께 신문왕대로 추정된다. 

그런데 오악은 3산보다 격이 낮을 뿐만 아니라 소백산맥의 외곽지대로 한정되어 있어 5소경의 위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중앙의 부악(팔공산)은 천도 지역으로 계획했던 달구벌(대구)과 연관된 것 같다. 결국 한강 이북의 지역은 제외되어 북방으로의 진출에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전성기에 이른 신문왕대 이후 요동지방은 당의 안동도호부의 관할 밑에 놓였는데, 안동도독이 고구려의 보장왕과 그 아들 덕무로 이어지면서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으며, 만주 동북지역의 송화강 유역은 부여 계통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의 장군 대조영이 동모산을 근거로 자립하여 발해를 건국함으로서 신라는 대동강 이남 지역의 영유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대외발전의 한계에 직면한 통일신라로서 더 이상의 국가의식의 확대와 정치사상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89호 / 2021년 6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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