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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시안 병마용갱

기자명 이재형

민중들 피눈물로 세운 진시황의 잔혹한 야망

시안(西安)의 아침은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분주하게 시작되고 있다. 오전 7시를 조금 넘긴 시간인데 거리는 이미 차들로 가득하다. 여기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많은 자전거 행렬들. 전 세계 자전거의 3분의 1인 4억5000만대가 이곳 중국에서 움직인다는 말이 실감난다. 대부분 시가지에 언덕이 없어 먼 거리를 힘들이지 않고 갈 수 있고, 곳곳에 자전거 전용 도로를 설치한 것이 중국을 ‘자전거 왕국’으로 만들었을 듯하다.

<사진설명>무뚝뚝한 표정에 경직된 모습의 병사들. 2200년의 시공을 넘어 그들과 마주하고 있는 듯 하다.


11개 왕조가 도읍 정한 古都

우리 일행은 시내구경에 나섰다. 거리에 신문을 파는 이, 잠깐 비가 그친 틈을 이용해 공터에서 태극권을 하는 노인들의 모습도 띈다. 멀리로는 강철, 화학비료, 콘크리트 등 공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하늘을 잿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진, 한, 수, 당을 비롯한 11개 왕조가 도읍을 정했던 정치·문화의 오랜 중심지, 이곳이 바로 3000년의 고도이자 실크로드의 출발지 시안이다. 광활한 농경지에 원활한 급수, 여기에 홍수의 피해도 받지 않은 천혜의 땅. 한나라가 들어서면서 ‘자손들이 영원히 평안하기를 바란다(慾其子孫長安)’는 뜻으로 ‘장안’이라 이름짓고, 명나라(1369) 때 이르러 ‘서쪽이 평안하다’는 뜻으로 시안(西安)으로 불려지기 시작했다.

복잡한 도심지를 헤쳐 30분 정도 지나자 거대한 성벽이 나타났다. 성문의 출입구 중 하나인 서문.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고 좁은 계단을 따라 성 위로 올라갔다.

“와, 이렇게 넓을 수가! 4차선 도로 크기는 되겠네.”
일행 중 한 명이 감탄사를 쏟아낸다. 지금은 이 곳 성곽 위에서 자전거를 타고 노니는 연인들의 모습 밖에 볼 수 없지만 과거에는 성곽 위로 군대가 이동하고 마차가 달렸다고 한다. 사실 현재 우리가 보는 성벽은 명대의 것으로 당나라 때는 이것의 8배로 둘레가 36.7㎞에 면적 84㎢의 거대한 규모였다.

<사진설명>시안의 성곽 위는 4차선 도로의 크기를 방불케 한다.

성문 위에 서니 달리는 자동차들 위로 그 옛날 낙타에 짐을 싣고 힘겹게 들어오는 지친 카라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시안에서 지중해 동부까지 장장 7000㎞의 실크로드. 온갖 생명의 위협에 맞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만이 실크로드의 최종 관문인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으리라.

서구에 비단이 알려진 것은 기원전 4세기 무렵으로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알렉산더는 한 전투에서 우연히 ‘세르(ser)’ 혹은 ‘세레스(seres)’라고 부르는 비단을 얻게 되고 이를 계기로 로마에 획기적인 비단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가볍고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하고 화려한 광택은 그들의 넋을 쏙 빼놓기에 충분했다. 로마인들은 비단을 신비한 물건으로 바라봤고, 나중에서 비단이 나무에서 자란다고 굳게 믿기도 했다. 플리니우스는 “중국은 솜털이 자라는 숲으로 유명하다. 그곳 사람들은 물을 이용해 나뭇잎에서 솜털을 채취한다”고 적었으며, 동시에 “비단에 대한 로마 여성들의 갈망 때문에 나라 경제가 고갈될 지경”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그리스와 로마의 귀족들은 중국의 비단을 한 번 입어보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다. 이 때문에 어떤 이는 로마제국이 급격한 쇠락의 길로 들어선 원인의 하나로 금의 무게와 맞먹었던 비단의 유행 때문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사진설명>6개월째 양탄자를 짜고 있는 시골 소녀. 해맑은 미소 속에 애처로움이 담겨있다.

병마용갱 발견한 노인 매일 방문

아무튼 비단의 인기가 수많은 대상들이 그 험한 길을 넘어 이곳 시안으로 찾아오도록 했던 원동력이 됐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실크로드가 서역만 변화시킨 것은 아니었다. 상인들이 낙타에 싣고 온 면직물, 상아, 산호, 호박, 석면, 약품, 유리 등은 중국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서역의 모자나 신발, 화장품과 화장술 등이 장안에서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비단옷을 걸친 뚱뚱한 로마인, 아이쉐도우를 짙게 바른 중국 여인을 떠올리니 시대를 초월한 본능의 위대함에 쓴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성루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옛날 군인들이 있었을 자리에는 상인들이 자리 잡고 있다. 시안과 관련된 책자와 엽서들에서부터 도자기, 동양화, 장신구 등 물건도 각양각색이다. 한층 더 올라가니 30평 쯤 되는 공간이 양탄자로 가득하다. 찻잔을 올려놓는 작은 것에서 바닥에 까는 대단히 큰 양탄자도 있다. 화려한 디자인과 촘촘한 이음새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싼 것은 우리나라 돈으로 몇 천원 되는 것도 있지만 비싼 것은 수백만원대를 호가하는 것도 있다.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나라보다 10배 정도 낮은 것을 감안하면 가히 천문학적인 숫자다. 가게 한 구석에서 양탄자를 짜고 있는 소녀가 있어 말을 걸었다. 처음에 수줍어 외면만 하더니 결국 말을 꺼낸다.

“1년 반 정도 됐어요. 이 일이 재밌긴 하지만 문양을 제대로 맞추려면 정신을 집중해야 해요. 나중에는 저도 정말 멋진 양탄자를 짤 수 있을 거예요.”

지방에서 올라왔다는 열아홉 소녀의 손놀림이 부지런하다. 말은 안 해도 하루 온종일 저 일을 하려면 몸도 아프고 꽤나 지루하리라. 30센티 정도 짜는데 6개월 걸렸다니 저걸 다 완성하려면 최소한 2년은 족히 걸릴 것 같다. 창백한 듯 해맑은 미소가 오히려 애처롭다.

우리는 다시 차를 돌려 불세출의 영웅 진시황(秦始皇)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병마용갱으로 향했다. 중국 최초로 통일왕조를 이룩하고 장장 5000km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건설한 중국 역사상 최고의 권력자. 그는 후손들에게 ‘만세까지 내 이름을 전하라’고 했건만 진왕조는 불과 15년 만에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후 진시황은 난폭했던 황제로 역사의 기록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 너머로 점차 사라져갔다. 그런 진시황이 1974년, 2000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역사의 무대 위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진시황릉에서 동쪽으로 1.5㎞ 떨어진 밭에서 우물을 파던 한 농부에 의해 병마용갱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거대한 돔으로 이루어진 용갱 안으로 들어가니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수많은 병사들과 말들이다. 흙으로 빚은 병사들은 갑옷을 걸치고 있으며, 다부진 턱, 부릅뜬 눈, 굳게 다문 입술, 표정 또한 각각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마치 2200년 전으로 돌아가 진 제국의 군대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다. 말들도 금방 뛰어나올 듯 생동감 넘친다. 진시황은 70만여 명의 포로와 죄인들을 시켜 이 거대한 용갱의 터를 닦고, 수많은 장인들을 시켜 8000여 기를 토우들을 완성토록 했다. 그리고 갱이 완성되자 입구를 막아 버린 뒤 그 위에 흙을 덮고 나무들을 심었다. 발굴 중에는 순장된 사람들의 뼈가 나오기도 했는데 그 중에는 입구를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을 친 흔적도 생생히 남아있다고 한다. ‘열 개면 미국과도 맞바꿀 수도 있다’는 병마용갱. 오늘날의 여행자들에게는 다시 못 볼 구경거리지만 당시 이 무모한 작업에 희생됐던 사람들에게는 더 없이 잔혹한 일이었으리라. 1인을 위한 천하, 불로장생을 원했던 그에게 다른 사람들의 생명은 무엇이었을까.

1974년 이곳을 발견한 노인이 아직도 병마용갱에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병마용갱을 발견한 뒤 많은 돈을 벌었으나 자식들이 사업을 하다 망해 그 빚을 갚으려고 이곳에서 사인을 해주며 돈을 벌고 있다고 한다. 이곳을 지키고 있는 한 젊은 군인에게 노인의 소재를 물었다. 병마용갱의 병사를 닮은 군인은 이리저리 전화를 하더니 그 노인은 20분 전에 퇴근했다고 말한다. 그는 “팔순을 넘긴 그 할아버지가 거의 매일 나와 사인을 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빚’ 얘기는 처음 듣는 얘기”라고 덧붙였다.


완벽 복원된 동거마 일품

1호, 2호, 3호 갱을 돌아 박물관에 가니 4마리의 말이 끄는 동거마가 눈에 확 들어온다. 지하 7m에 매장돼 있었던 까닭에 엄청난 하중을 못 견디고 1500조각으로 부서졌다는 동거마가 완벽하게 복원돼 있다. 네모진 수레에 둥근 지붕이 인상적인 이 동거마는 진나라의 강대함과 탁월한 전투능력을 한 눈에 보여주는 듯하다.

<사진설명>1인 천하, 불로장생을 꿈꾸던 진시황에게 다른이들의 생명은 무엇이었을까. 사진은 병마용갱 전경.

진시황의 위용을 뒤로 하고 병마용갱을 빠져 나왔다. 주차장까지 이어져 있는 널찍한 대로변에는 상점이 즐비하다. 20살 남짓 됐을 남자가 200여 미터를 뒤쫓아오며 물건을 사라고 반협박이다. 처음 100위옌을 부르더니 나중에는 10위옌에 가져가란다. 물건을 보니 조잡하게 만든 병마용이다. 조금전 용갱에서 보았던 2200년 전 병사의 강인한 모습과 저 장사꾼의 거친 얼굴이 어딘지 닮아 보인다.


글·사진=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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