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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특집-법정 스님 법문 “맑은 가난이 나와 남을 행복하게 해”

기자명 김형섭

길상사 ‘회주’ 법 정 스님의 마지막 법문

지난해 12월 21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는 이른 아침부터 불자들의 발길로 북적였다. 이날 법정 스님이 길상사 ‘회주’로서 마지막 법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2500여 명의 대중들에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기적 같은 일”이라며 “생을 후회 없이 살기 위해선 욕망을 줄이고 함께 나누는 ‘맑은 가난’의 삶을 지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늘 청빈과 침묵의 가르침을 펴왔던 스님은 법문을 마친 뒤 “지금 나이엔 화사한 봄꽃의 아름다움보다 늦가을에 피는 국화의 향기로움처럼 남고 싶다”는 말과 함께 산골 암자로 떠나갔다. 편집자


온 세상이 과잉 소비와 포식으로 인해서 생태계가 말할 수 없이 훼손되고 있습니다. 또 사람이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누구나 똑 같이 부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부자로 산다면 이 지구 하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요. 지구가 몇 개는 더 있어야 됩니다. 모두가 다 부자로 살 수 없다면 이웃과 함께 나누면서 더불어 살 일 밖에 없습니다. 미래학자들과 생태학자들이 다 같이 이야기합니다. 앞으로 지구가 존속되려면 미국식을 흉내 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욕망을 자제하면서 ‘맑은 가난’으로 사는 일밖에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최근 들어서 ‘큰스님’ ‘작은 스님’ 할 것 없이 스님들이 많이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이웃의 죽음은 남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저 또한 스님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선가에서는 죽음에 이르러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는 일이 마치 무슨 의례처럼 행해지고 있어요. 이를 가리켜 ‘열반송’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불교역사 어디를 보아도 열반송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임종게(臨終偈)’ 혹은 ‘유게(遺偈)’라는 말이 정확합니다.

임종게는 대개 짧은 글 속에 살아온 길과 거리낌없는 심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죽음에 이르러서 가까운 제자들에게 직접 전하는 생애에 마지막 한마디이지요. 따라서 죽기 전에 시를 짓듯이 미리 써놓은 것은 ‘유서’일 수는 있어도 ‘임종게’는 아닙니다. 타인의 죽음을 모방할 수 없듯이 마지막 그 한마디는 남의 것을 흉내 낼 수 없습니다. 그의 살아온 자취가 그의 죽음까지도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가장 그 자신다운 한마디라야 합니다.

남악 천태 스님 이야기입니다. 스님은 외떨어진 암자에서 혼자 살기 때문에 전혀 제자를 두지 않고, 맑게 사신 분입니다. 가끔 지나가는 스님들이 그를 찾을 뿐 세상과는 교섭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죽기 바로 전 날이지요. 스님은 산 아래에 내려가서 지나가는 한 스님을 불러다가 화장을 당부합니다. 나무를 암자 앞에 쌓아두고 가사를 입고 그 위에 앉아 입적합니다.

“내 나이 올해 예순 다섯, 사대가 주인을 떠나려 한다. 도는 스스로 아득하고 아득해서 그곳에는 부처도 없고 조사도 없다. 머리 깎을 필요도 없고 목욕을 할 필요도 없다. 한 무더기 타오르는 불덩이로 천 가지 만 가지가 넉넉하다.”

한 무더기 타오르는 불꽃에 모든 것이 타버릴텐데, 무엇 때문에 굳이 목욕하고 삭발하겠느냐는 뜻이지요. 요즘 보는 것처럼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야단스러운 소리도 아니고, 자신의 심경을 평범한 말로써 표현하고 있습니다.

육조 스님의 제자로서 남양 혜충 국사라는 큰스님이 있습니다. 스님은 마지막 유언을 듣고 싶어하는 제자들을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너희들에게 말해온 것이 모두 내 유언이다.”

구차스럽게 유언 같은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죽을 때 무슨 말을 남기느냐’ 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죽을 때 야단스럽게 한 것은 썩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또 스님들이 입적을 하고 나면 ‘사리’가 나왔다고 요란을 떱니다. 사리는 원래 ‘타고 남은 유골’을 말합니다. 사리는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죽어서 사리를 많이 남기면 큰스님이고 그렇지 않으면 큰스님이 못되는 것은 아닙니다.

13세기 송나라 때 한 스님이 계셨어요. 이 분은 이런 임종게를 남겼습니다. “부처니 중생이니 모두 다 헛것, 찾는다면 눈에 든 티끌, 내 사리 천지를 뒤덮으니 식은 재를 아예 뒤적이지 말라.”

요즘 사리 줍는데 한번 보십시오. 타고남은 유골을 돌에 갈고 이걸 채에 걸러내고. 거기서 또 무엇을 골라냅니다. 마치 사금을 캐듯 말이죠. 얼마나 불경스러운 일입니까. 그래서 건져낸 사리가 그렇게 대단한 것입니까.

그러면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무엇일까요. 부처님의 육신에서 나온 사리는 망치로 때리면 깨지는 것이에요. 대단한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부처님의 ‘진신사리’, ‘법신사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45년 동안 중생을 교화하면서 가르친 바로 그것이지요. 진짜 사리는 그 분의 가르침입니다.

백 스무 해를 살다가 돌아가신 조주 스님이 세상을 떠나려고 할 때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내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불태워서 사리 같은 걸 골라 거두지 마라. 선사의 제자는 세속인과 다르다. 이 몸은 헛것인데 사리가 무슨 소용이냐. 이런 짓은 당치 않다.” 이렇게 준엄하게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남의 이야기입니다. 만약 여기 모인 우리 자신이 내일 죽게 된다면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남기겠습니까. 각자 한번 정리해보세요.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에요. 이런 기적 같은 삶을 헛되이 보낸다면 후회할 때가 반드시 옵니다. 죽음을 어둡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죽음은 삶의 한 모습이고 삶의 과정입니다. 죽음이 없다면 삶은 무의미합니다. 죽음이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삶이 빛날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200년, 300년 산다고 가정한다면 얼마나 끔찍해요. 살만큼 살았으면 교체해야 해요. 언젠가 올 그날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일만은 절대로 어김이 없습니다.

죽음이 싫으면 제대로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사는 즐거움을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내가 사는지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살아갈 이유를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살아남습니다.

<사진설명>법정 스님 법문에 2500여명의 대중이 운집. 스님의 마지막 법문을 경청했다.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를 들려드리지요. 자궁암을 비롯해 위암, 장암 등으로 여덟 번이나 대수술을 하고도 살아남은 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수술을 한 의사도 어떻게 살 수 있는지 놀라워했답니다. 그 어머니는 아이가 부실하게 태어난 후 얼마 안되어서 남편과 이혼을 합니다. 의사들 말로는 이 아이는 3년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신비를 현대의학은 아직 모릅니다.

그 어머니가 밖에서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들이 이불 속에서 어머니를 보고 웃음 가득 띠면서 좋아서 어쩔 줄 모른데요. 이런 아들을 대할 때마다 어머니는 하루 일의 피로를 잊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 아이를 위해서 내가 살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어머니만 기다리고 어머니만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아이를 돕고 이 아이를 보살피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하는 염원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의사들이 3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아이가 스무 번째 생일을 맞이하던 날 그 어머니는 아들이 좋아하는 팥을 넣은 찹쌀밥을 지어서 생일을 축하해줍니다. 이날 아들은 어머니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엄마 고마워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은 생일을 축하해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겠지만 어머니로써는 스무 살 성년이 되도록 키워주어서 정말 고맙다는 말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정신지체 장애인인 자식을 연민의 정으로 보살피는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이 죽을 고비를 몇 번이고 무사히 넘기게 한 것입니다.

단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인생은 살아가는 가치가 있습니다. 정신지체장애인 단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어쩌면 그 어머니를 병고로부터 살려내기 위해서 보살이 그 집의 아들로 태어난 것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의미로 보면 충분히 그렇습니다. 살아갈 이유를 충분히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살아남습니다. 병든 자식을 위해서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간절한 소망과 염원이 어머니 자신을 구하고 아들을 구한 것입니다.

합장하고 저를 따라 외우세요.
“중생이 끝없지만 기어이 건지리다”
“중생이 끝없지만 기어이 건지리다”
“중생이 끝없지만 기어이 건지리다”


정리=김형섭 기자 hsk@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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