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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중도의 사회적 실천

기자명 마성 스님

분별심·이분법적 사고 벗어나는 게 급선무

초기불교 중도사상, 실천체계로 구성…사회서도 중대한 의미 지녀
평등심으로 대립적 심리상태서 벗어남이 곧 중도의 사회적 실천
붓다 유행 때 “나라의 풍속·법 따라 옳고 그름 따지지 말 것” 강조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인도 붓다가야 보리수 밑의 스님들. 부처님은 중도로 이원적·이분법적 입장을 파기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인도 붓다가야 보리수 밑의 스님들. 부처님은 중도로 이원적·이분법적 입장을 파기했다.

대법원 청사 정면에는 자유・평등・정의라는 세 단어가 새겨져 있다. 국민의 기본권인 자유・평등・정의를 최종적으로 보장하는 사법기관이 대법원임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 자유・평등・정의가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 이것은 하나의 이상일 뿐만 아니라 자유・평등・정의는 서로 모순되기도 한다. 즉 ‘자유’와 ‘평등’은 대립되는 이념이다.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한,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의 차이 등으로 인해 오히려 불평등이 심화된다. 정의도 마찬가지다. 어떤 가치에 토대를 두느냐에 따라 정의의 개념이 달라진다. 존 롤스와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이 다른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최소한 사회적 차별이 철폐되어야 한다. 사회 각 분야에는 너무나 많은 차별이 현존한다. 그러한 차별을 법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국회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은 특정 소수자 집단에 대한 차별을 막기 위한 법이다. 여러 국가 및 국제단체에서는 각기 다른 차별금지법을 채택하고 있으며, 보호하는 집단과 금지하는 차별 사유 등에 있어서 서로 차이점들이 있다. 보통 성별, 인종, 종교, 장애, 성정체성, 성적지향, 사상, 정치적 의견 등을 이유로 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영역에 있어서 합리적인 이유 없는 차별과 혐오 표현을 금지하는 법률이 이에 해당한다.”‘위키백과'

차별금지법은 모든 종류의 차별을 다루는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인종, 성별, 장애 등 특정 차별만 다루는 개별적 차별금지법으로 나뉜다. 우리나라의 차별금지법은 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 일부 내용을 정하고 있으나 중앙 정부에서는 2007년 제17대 국회에서 처음 발의된 이래 새로 출범하는 국회마다 계속하여 발의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동성애를 문제 삼아 반대하고 있다.

사회적 차별을 법적으로 차단하는 차별금지법 제정도 중요하지만, 불교에서는 사회적 현상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분별과 차별의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중도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초기불교의 중도사상은 이론체계라기보다는 실천체계로 되어있다. 개인과 사회에서의 다툼이 없는 완전한 평화[열반]를 위한 실천의 길이다. 완전한 평화의 길은 바로 양극단의 분별과 차별에서 벗어난 삶을 말한다. 분별과 차별은 고락(苦樂), 자타(自他), 단상(斷常), 유무(有無), 일이(一異), 일다(一多) 등이다. 이러한 두 극단을 극복한 것이 바로 중도이다. 불교의 중도는 사회 실천적 측면에서도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붓다는 중도로 이원적이고 이분법적인 입장을 파기(破棄)했다. 이른바 우열, 빈부, 귀천, 미추(美醜), 정(淨)과 부정(不淨), 다소(多少), 고하(高下), 장단(長短) 등과 같은 이분법적 가치관에 사로잡혀 끊임없는 시비와 싸움의 삶을 떠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녀차별, 인종차별, 민족차별, 종차별, 외모차별, 종교차별, 빈부차별, 지역차별 등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아라나위방가-숫따(Araṇavibhaṅga -sutta, 無諍分別經)’(MN139)에서 붓다는 양극단을 극복할 수 있는 중도를 설하고 있다.

“① 저열하고 비천하며 속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 없는 감각적 욕망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 없는 자기 학대에 몰두해서는 안 된다. ② 양극단을 떠나 여래는 중도를 완전히 알아차렸다. 그것은 눈을 뜨게 하고 앎을 일으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끈다. ③ 칭찬해야 할 것을 알아야 하고 비난해야 할 것을 알아야 한다. 칭찬할 것을 알고 비난해야 할 것을 알고는 칭찬도 비난도 하지 말고 오직 법을 설해야 한다. ④ 즐거움을 판별할 줄 알아야 한다. 즐거움을 판별할 줄 알아서 안으로 즐거움을 추구해야 한다. 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해서도 안 되고 공개적으로 비판을 해서도 안 된다. ⑥ 침착하게 말해야 하고 다급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 ⑦ 방언을 고집해서도 안 되고 표준어를 무시해서도 안 된다.”[MN Ⅲ, 230]
①과 ②는 ‘전법륜경’에 나오는 중요한 대목이다. 즉 붓다는 고행주의와 쾌락주의 양극단을 떠나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를 완전히 알아차렸다. 즉 중도는 눈을 뜨게 하고 앎을 일으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끈다. 그것이 바로 팔정도이다. 그러나 나머지 부분은 중도의 사회적 실천에 관한 것이다.

이른바 “칭찬할 것을 알고 비난해야 할 것을 알고는 칭찬도 비난도 하지 말고 오직 법을 설해야 한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해서도 안 되고 공개적으로 비판을 해서도 안 된다.” 이 경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마음속에 우열과 시비를 떠나 분별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별심이란 외모의 아름다움과 추함, 가난함과 부유함이라는 두 극단에 따른 외모차별과 빈부차별 등을 말한다. 잘생기고 못생겼다는 우열과 아름다움과 추함의 시비는 바로 차별로 나타난다. 그러나 평등심으로 상대적이고 대립적인 두 극단의 심리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바로 중도의 사회적 실천이다.

붓다는 비구들이 이 나라 저 나라 국경을 넘나들며 유행할 때, “그 나라의 풍속과 법을 따라 옳거니 그르거니 따지지 말라”고 했다. 이것을 출세간과 정교분리의 태도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대단히 적극적인 ‘사회 실천적 중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구절은 단순하게 세간의 풍습과 법에 대한 무관심이나 방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문화적 상대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사회적 실천을 담고 있는 경구로 해석해야 한다.

인류는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문화와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배타적으로 차별하여 대립과 갈등 그리고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로써 집단 간, 국가 간, 문화권 간에 전쟁이라는 극단의 폭력까지도 불사한다. 이 때문에 현재 구조적 폭력은 물론 문화적 폭력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차별은 모든 종류의 폭력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차별금지법 제정보다 마음속의 분별심과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마성 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ripl@daum.net

[1604호 / 2021년 10월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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